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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추억은 내가 바라는 현실이다.>>

나의 바램이 투영된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무감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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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회상한다는 것: 나의 바램이 투영된 현실

어릴 적, 방학이면 이종사촌들과 남해 바닷가에서 보냈던 시간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여름과 겨울 방학마다 한 달씩, 1년에 두 달을 거의 붙어 지냈으니, 1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가족 이상의 친밀감을 나누었습니다. 부모님들끼리도 형님, 동생 하며 가까웠고, 우리 모두는 외할머니라는 든든한 중심 아래 자연스럽게 모였습니다.


그 시절의 추억은 바닷가의 소금기 가득한 바람, 해 질 녘 노을빛,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떠들던 우리들의 모습과 함께 아직도 제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모두가 성인이 되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예전처럼 모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쁜 일상, 각기 다른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여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원인인 듯합니다. 곱씹어보면, 그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던 외할머니라는 공통분모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을 걷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는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성장의 한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득문득 그 시절을 떠올리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램이 커집니다. 아마도 이는, 하루하루 쌓여가는 책임과 피로 속에서, 그때의 천진난만함과 심적으로 기댈 수 있었던 존재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추억, 그리고 ‘사람’에 대한 그리움

성인이 된 후, 사회에서 맺는 인간관계는 어릴 적 친구나 가족과는 다릅니다. 솔직히 말해, 어릴 적 사촌들과 같은 친밀감이나, 아무 조건 없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새로 맺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생각이 많아져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순수한 관계를 꿈꾸면서도, 실제로는 서로에게 바라는 바, 기대, 이해득실이 관계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투사(projection)’라고 설명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내적 욕구나 바램을 타인에게 투영함으로써, 현실을 해석하고 관계를 맺습니다. 즉, 추억을 회상할 때도 현재의 바램이나 결핍이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심리학자들은 기억이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과 욕구에 의해 재해석되는 ‘재구성적 과정’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그리워할 때, 그 시절의 순수함이나 즐거움만을 떠올리는 것은,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결핍이나 바램이 그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성인 관계의 심리학: 기대, 투사, 그리고 솔직함

성인이 된 후의 인간관계는 더 복잡합니다. 각자 삶의 무게와 책임을 지고 살아가다 보니, 서로에게 기대는 것보다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 바램을 더 우선시하게 됩니다. 이는 심리학자 에릭 번(Eric Berne)의 ‘거래분석(Transactional Analysis)’ 이론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거래분석에 따르면, 성인기의 관계는 ‘어린이-부모-성인’의 세 가지 자아 상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특히 ‘성인’ 자아는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즉,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얻고자 하는 바를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며, 관계의 득실을 따지게 되는 것이죠.


이런 관계 속에서 진정한 친밀감을 쌓기란 쉽지 않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바램을 내세우고, 상대방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욕구가 강해질수록, 관계는 점점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해집니다. 결국, 이런 관계의 지속 가능성은 ‘솔직함’과 ‘정직함’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바램을 숨기거나, 상대방의 기대에만 맞추려다 보면, 언젠가는 오해와 실망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바램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에게도 그 진심을 묻는 태도가 관계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예를 들어,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히 말해볼게”, “네가 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해”와 같은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열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추억의 재구성과 현재의 나

심리학에서는 ‘자기일관성(self-consistency)’과 ‘자기확장(self-expansion)’ 이론을 통해, 우리가 왜 과거의 추억에 집착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설명합니다. 자기일관성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현재의 자신과 연결짓습니다. 즉, 추억을 회상하는 것은, 지금의 나를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심리적 노력의 일환입니다.


또한, 자기확장 이론은, 새로운 관계나 경험을 통해 자신을 확장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강조합니다. 과거의 추억 속에서 느꼈던 친밀감, 소속감, 안정감은, 지금의 나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욕구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현재의 바램과 결합시켜, ‘이런 관계가 다시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관계의 본질: 이해와 배려, 그리고 새로운 추억 만들기

결국, 인간관계의 본질은 ‘상호 이해’와 ‘배려’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고, 각자의 가치관과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상대방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바램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입장도 존중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더욱 건강하게 만듭니다.


만약 자신의 바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를 묻고, 상대방의 솔직한 심정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진정한 의미의 친밀감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사촌들과의 추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그 시절에는 이해득실이나 계산 없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완전히 순수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지라도, 솔직함과 배려, 그리고 진정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이 순간도 또 다른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미래의 나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추억, 그리고 나의 현실

결국, 추억을 회상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의 바램과 결핍이 투영된 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기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시절의 순수함과 친밀감이 지금의 나에게 여전히 필요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바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관계 속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참고 및 출처

Freud, S. (1911). Psychoanalytic Notes on an Autobiographical Account of a Case of Paranoia (Dementia Paranoides).

Conway, M. A., & Pleydell-Pearce, C. W. (2000). The Construction of Autobiographical Memories in the Self-Memory System. Psychological Review, 107(2), 261–288.

Berne, E. (1964). Games People Play: The Psychology of Human Relationships.

Swann, W. B. (1983). Self-verification: Bringing social reality into harmony with the self. In J. Suls & A. G. Greenwald (Eds.), Psychological perspectives on the self (Vol. 2, pp. 33-66). Erlbaum.

Aron, A., & Aron, E. N. (1986). Love and the Expansion of Self: Understanding Attraction and Satisfaction.

Baumeister, R. F., & Leary, M. R. (1995). The need to belong: Desire for interpersonal attachments as a fundamental human motivation. Psychological Bulletin, 117(3), 497–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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