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사(Narrative)
지난 30년의 내 인생을 돌아보면 요 근래 드는 생각의 나래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 스스로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를 꼽자면 ‘안전’이다. 어릴 때부터 겁이 많아서인지, 항상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성격이었고, 낮은 리스크의 선택들만을 해왔다. 특목고에 들어가서, 별다른 장래희망 없이, 제일 좋은 학교에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공부했고, 소위 말하는 부모님 속 썩이는 일 없는 ‘모범생’이었다. 군대 전역하고, 남들 다 하는 로스쿨이나, CPA, 각종 고시 준비를 하지 않고 빠르게 취업하는 게 내 방식의 소심한 반항으로 생각할 정도니까 말이다.
2020년 8월, 코로나 시기 좁은 취업문을 뚫고, 첫 직장에 들어갔다. 나의 첫 직장은 대기업의 신생 해외벤처투자팀이었는데,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막연하게 투자 업무를 해보고 싶던 와중에 고등학교 친구의 제안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가장 재밌는 방식으로 일했던 곳이었다. 신기술들에 대해서 깊게 파보기도 하고, 해외 스타트업들과 컨퍼런스 콜을 하면서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업계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들도 역동적인 순간들로 기억에 남아있다. 다만, 대기업 특유의 꽉 막힌 문화와 사람과 기술을 보는 벤처 투자가 끔찍한 혼종을 이루면서, 어린 마음에 투자 의사결정 과정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애매한 grey area가 아닌, 아예 금융권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랐고, 약 10개월 남짓한 신입사원 시절, 누구보다 빠르게 퇴사를 해버린다.
다음 직장은 증권사였다. 10개월 경력이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전환형 인턴부터 시작했다. 몇몇 친구들은 정규직을 버리고 전환형 인턴을 하는 나를 대단하다고 해줬지만, 그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어찌해서 정규직 전환에 성공했지만, 인생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IPO 부서에 가고 싶었는데, 채권 발행하는 DCM 부서로 배정을 받았으니 말이다. 채권이 뭔지도 모르고, 내가 생각하던 투자를 하려면 IPO 부서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당시에는, 상당히 불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인지, 오히려 좋았다. DCM 부서는 허구한 날 야근하는 IPO 부서와는 다르게 워라밸이 보장되는 삶이었고, DCM 특유의 따뜻한 문화 덕분에 조직에 대한 애정을 처음으로 느꼈다. 너무나도 잘 맞는 동기들과, 존경스러운 사수 형까지,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만약 지금도 그 회사에 있었다면, 정년퇴직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입사 2년 후 또 한 번의 퇴사를 한다. 증권사에서의 삶은 만족스러웠지만, 이직 제안을 받았을 때 흔들렸던 것은 ‘일‘에 대한 결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따뜻한 복지가 있었지만, 채권 발행을 하는 일은 성장하는 시간이 아닌 소모적인 시간이라고 느꼈다. 당시 나에게 ’ 일‘이란 ’ 회사에서 하는 일‘로만 정의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성장할 수 있는 ‘일’을 원했었다.
나의 다음 행선지는 자산운용사였다. 우연한 기회로 이직 제안을 받았고, 언젠가 바이사이드로 가고자 했던 마음이 가장 큰 이직 동기였다. 돌이켜보면, 이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중요했다기보다는, 바이사이드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더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정한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약 1년 4개월째 다니고 있는 지금의 회사에 감사함을 느낀다. 나에게 새로운 도전의 욕구를 일깨워졌으니 말이다. 여기서는 새로운 업무도 경험하고, 팀원들에게 인정도 받았으며,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고 있다. 다만, 여기서의 ‘일‘도 내가 느끼는 성장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돈을 버는 수단과 미래에도 안정적으로 회사에서 근무할 수 있는 정도의 의미라고 느꼈다. 지금 회사에 다니면서, 마음을 서서히 먹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어쩌면 계속 반항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3번의 회사를 거치고, 또 한 번의 퇴사를 꿈꾸는 저니맨(Journey Man)이 될 것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