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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름푸 Jun 10. 2021

예상치 못한 영국공항 16시간 노숙, 나 노숙자 아냐!

인천에서 런던을 거쳐 더블린에 도착하기까지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날 밤. 싱숭생숭한 마음을 붙잡고 선택한 마지막 식사는 치맥이었다. 거창하고 푸짐한 음식들을 놔두고 웬 치킨? 싶겠지만  우리나라만큼 치킨의 종류가 다양하고 맛있는 곳이 없다는 걸 저번 유럽여행을 통해 깨달았기에, 한동안 먹지 못할 한국 치킨의 맛을 오래오래 입안에 간직하고 싶었다. 치킨은 언제나 옳다.



다음 날 아침 비행기였기에 치킨 먹고 이른 저녁쯤 집에 다시 돌아왔다. 비행기표 사고 나서 두 달 넘게 시간이 있었음에도 귀차니즘에 굴복해버린 나는 짐을 출발하는 날 새벽까지 쌀 수밖에 없었다. 진작에 할걸... 하는 후회는 언제쯤 안 하게 될까?





아침 5시 반쯤 25킬로 캐리어 두 개에 6킬로에 육박하는 무거운 백팩과 애착 쿠션 하나를 손에 끼고 신발을 주섬주섬 신고 있었는데 우리 집 강아지 푸르미가 자다 말고 토-토-토-토- 경쾌한 발톱 소리를 내며 나에게로 왔다. 뭘 주워 먹었는지 입에 하얀 걸 묻히고 배웅해주는 푸르미. 우리 최소 8개월은 못 본다는 걸 아니?



평일이라 떠나는 길 혼자일 줄 알았는데 엄마가 반차 내고 차로 공항까지 데려다줬다. 이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있게 되는 게 처음이라 나도 엄마도 아직은 실감하지 못한 채 차에 몸을 실었다. 인천대교에 도착했을 때 즈음엔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낑낑거리며 짐을 내리고 엄마가 주차하러 간 사이 마주한 탑승수속 카운터 안내 화면. 항상 설레면서도 긴장되는 순간이다. 혹시 내 비행기 없는 거 아니겠지? 예약 잘못한 거 아니겠지? 경험에서 기반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2016년에 영국으로 한 달간 하계 방학 전공연수를 갔었는데, 항공권을 세 번이나 취소하고 다시 예매한 탓에 비행기 시간을 헷갈린 적이 있었다. 밤비행긴 줄 알고 공항버스 리무진 막차 타고 와서 체크인 카운터 확인하는데 내 비행기가 없었을 때의 기분이란... 그날 결국 공항 10시간 노숙을 하며 왜 인천공항이 세계에서도 1,2위 하는 공항인지 깨달았다. 노숙하기 좋은 인천공항.



떠나는 날 아침까지 열심히 체중계에 올려가며 겨우 25킬로 맞춘 캐리어는 공항 가서 재보니 무게 규정을 0.5킬로 초과했다. 밤새도록 싼 캐리어를 공항 한복판에서 열어 티셔츠 두장을 빼서 백팩에 꾸역꾸역 넣었다. 캐리어의 반은 한식 반조리식품으로 가득 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먹을걸 왜 그렇게 챙겨갔는지. 더블린도 다 사람 사는 곳이었는데 말이다.





비행기 탑승하러 가기 전 엄마와 마지막으로 던킨도너츠에서 빵을 먹었다. 한식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냐 하셨지만 며칠 동안 잠도 잘 못 자고 원래 아침을 안 먹는 터라 밥이 안 들어갈 것 같았다. 모닝커피도 한 잔 하고 싶었지만, 긴장한 상황에서 커피만 마시면 화장실 신호가 오는 체질이라 꾹 꾹 참았다. 빵 먹으며 미리 환전해둔 유로를 꺼내 들어 보니 새삼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엄마와 마치 내일도 볼 것인 양 어색하고 덤덤한 작별 인사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장시간 비행할 딸이 조금이나마 편히 가길 원했던 엄마는 체크인 데스크 직원분께 복도 자리, 그리고 옆에 사람 없는 자리 있으면 그쪽으로 달라고 넌지시 말했었다. 풀북킹이라 자리가 없을거라는 말에 기대를 전혀 안했었는데 막상 탑승해서 보니 이코노미석 제일 앞자리라 두 다리도 쭉 뻗을 수 있고 옆엔 아무도 없었다. 인천에서 런던까지 긴 비행이었는데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고마워 엄마♡



내가 탄 항공은 영국항공. 긴 비행할 때마다 사육당하는 기분이다. 난 운송수단 안에서 굉장히 잘 자는 편이라 타자마자 자버린다. 자고 있으면 깨워서 밥 주시고, 또 자고 있으면 깨워서 주스 주시고 그걸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유럽에 도착해있다. 그래서 기내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영국항공 기내식은  꽤나 맛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라 그런지 볶음 고추장이랑 김치가 나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컵라면이었다. 출발하기 전 인천발 영국항공은 신라면 컵라면을 무료로 제공해준다는 이야기를 블로그에서 봤었다. 그 얘길 듣고 꼭 나도 시켜먹어야지 마음먹었지만 메뉴판 같은 것도 없고, 영어 울렁증이 도져서 못 물어보다가... 자다가 어디선가 나는 라면 냄새를 맡고 용기를 내서 시켰다! 그리고 건너 자리 사람이 와인 마시고 있는 걸 포착하곤  Can I get one bottle of wine as well? 했다. 승무원의 친절한 'of course'를 듣고는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 위에서 먹는 라면은 한국의 맛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그 후로 한동안 기내에서 라면 냄새가 났던 걸로 보아 냄새에 이기지 못한 몇몇 승객들도 시켜먹었으리라 짐작한다. 나에게 앞으로 영국항공은 신라면이다.





체감 비행시간 5시간, 실제 비행시간 12시간. 먹고 자고 마시고를 반복하니 어느새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 반이었고 더블린행 비행기는 익일 아침 6시 반 출발이었다. 비행기표 끊을 당시엔 16시간의 레이오버 동안 런던 시내에 나가 야경을 보고 펍에서 맥주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장시간 비행으로 너무 꼬질 해지고 피곤한 데다가 돌덩이 같은 백팩을 들고나갈 엄두가 안 났다. 그래, 런던은 이미 두 번이나 와 봤으니까. 자기 합리화를 하곤 환승 대기 구역으로 향했는데... 환승 심사받고, 티켓도 보여주고 다 오케이 한 후, 환승 대기 구역으로 가는 게이트에 보딩패스를 찍었는데 WRONG DATE라고 뜨는 것이다... 몇 번을 찍어봐도 결과는 같았다. 쭈뼛거리며  직원에게 물어보니 내가 탈 더블린행 비행기가 다음 날 출발하는 항공편이라 영국에 입국을 아예 했다가 다시 들어와야 한다고... 아직 더블린 땅 밟지도 못ㅠ했는데 발생한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16시간 그나마 안전한 환승동에 있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졸지에 밖으로 쫓겨나버리다니. 그렇게 강제(?) 영국 입국을 하고 16시간 런던 히드로 공항 노숙이 시작됐다. 





쫓겨나서 짐 들고 낑낑거리며 공항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샌드위치 하나 사 들고 노숙하기 좋아 보이는 의자에 앉았다. 핸드폰 충전할 수 있는 곳 옆, 그리고 팔걸이 없는 의자가 두 개 붙어 있는 곳. 의자 2개면 안락하게 새우잠 자세를 취할 수 있다. 158cm의 작은 키가 이럴 땐 도움이 된다. 낮시간부터 저녁시간까진 공항이 굉장히 시끄럽고 영국 청소년들이 소란을 피워댄 덕에 괜히 긴장해서 가방 부여잡고 미어캣처럼 주위만 경계하다가 주위가 조용해진 저녁 8시쯤부터 아주 곯아떨어졌다. 다행히 항공편이 하나 둘 종료되는 늦은 저녁쯔음부터 나처럼 노숙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마음이 놓였다. 



신기할 정도로 꿀잠 자고 있었는데 조심히 나를 흔들어 깨우려는 손짓에 눈이 떠졌다. 눈 앞에는 형광조끼를 입고 있는 서양인 두 명이 있었다. 아직 잠에 취한 채 영문을 모르겠는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는데, 그 들이 나에게 한 말을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ㅋㅋㅋㅋㅋ 'Hello We are running a homeless shelter. It's just around the corner. Would you like to go with us?' 즉, 내가 노숙자인 줄 알고 그들이 운영하고 있는 노숙자 보호소에 같이 가기를 권했던 것이다. 유럽 땅 밟자마자 처음 받는 취급이 노숙자 취급이라니 정말 웃긴 일이지만 그 당시엔 너무 당황해서 'No! No! I am traveller!' 하며 황급히 여권과 비행기표를 보여줬다. 그들은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사과를 하곤 자리에 떠났다. 꿀잠을 방해받아 기분이 언짢은 상태로 어떻게 날 노숙자로 오해할 수 있지? 괘씸해하다가 문득 내 행색을 보니, 장시간 비행으로 부스스해진 머리카락, 얼굴엔 기름기가 돌고 있었고 아빠 옷 주워다 입은 듯한 오버핏의 후드티에 초록색 운동복 바지, 문방구에서 3000원 주고 산 삼선 슬리퍼에 양말 안 신은 맨발. 그리고 여행자라면 들고 있지 않을 큰 쿠션까지.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행색이었던지라 이내 빠른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별일이 다 있네 하며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비행기 탑승까지는 두시간남짓 남은 시간이었다. 피로는 어느 정도 가신 터라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에게 이 웃긴 이야기를 전해주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더블린행 비행기에 탑승할 시간이 됐다. 런던에서 1시간 반 정도 날아 더블린에 도착했다. 거진 35시간 만에 보는 나의 캐리어들. 이것저것 욱여넣어서 터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무사히도 도착했구나. 이렇게 내 몸보다 큰 짐들과 함께 내가 앞으로 살아갈 더블린에 첫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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