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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ddie Journey Mercury Mar 16. 2018

1. 길(camino) 위에 서다

길 위에서는 나만의 속도가 있을 뿐-

길 위에 섰다. 길을 걷기 시작했다. Santiago de Compostela를 향해-


Castrojeriz를 떠나 Fromista로 가던 날. 이 때부터 지루한 메세타 평원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좋은 날씨 덕에 지루함은 느낄 수 없었다-


스페인어로 Camino de Santiago. 영어로는 Santiago's Road, 우리말로 직역하면 산티아고의 길(일반적으로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부른다)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간단히 'Camino'라고 한다.


Camino : (일반적으로) 길, (어떤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계속할 방향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산티아고(Santiago)는 예수의 수제자중 한 사람인 야고보 성인을 일컫는 스페인어다. 당시 사람들은 이베리아 반도가 세상의 서쪽 땅끝이라고 알고 있었다. 산티아고는 예수가 부활 후 구름 위로 올라가며 남긴 유언과 같은 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을 기억했다. 그래서 '땅 끝' 스페인으로 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선교 활동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겨우 두 명의 제자를 만드는데 그쳤을 뿐이다. 예루살렘에서 생을 마감한 산티아고는 자신의 유해를 스페인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유언에 따라 두 제자는 그의 유해를 스페인으로 가져와 Galicia 지방의 어느 평원에 묻었는데, 그 곳이 바로 지금의 Santiago de Compostela이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의 박해와 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반도 지배 속에 산티아고 유해의 존재는 쉽게 잊혀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중세시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발견된다. 그의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각지에서 그를 만나기 위한 순례 행렬이 이어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 사람들이 산티아고를 만나기 위해 걸었던 길은 모두 Camino de Santiago가 되었다. 그래서 까미노는 유럽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길은 프랑스 길(Camino de Santiago Francés)이다. 이 길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근처 작은 마을 Saint-Jean Pied de Port(일반적으로 '생장'이라고 부른다)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너머 산티아고로 이어진다. 약 800km에 이르는, 서울-부산 간의 거리보다 약 400km가 더 긴 길이다. 유럽에서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생장은 이 산맥을 넘기 직전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순례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기 위해 이 곳을 거친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일종의 베이스 캠프 역활을 하는 셈이다. 많은 순례자들이 생장에서 까미노를 시작하는 이유다.


물론, 모두가 생장에서부터 까미노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 어디서든 이 길을 시작할 수 있다. 짧게는 산티아고로부터 대략 100km 지점에 위치한 Sarria라는 도시에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Sarria에서 산티아고까지는 걸어서 대략 1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시작점이다. 참고로, 까미노 완주로 인정해주는 최소의 거리가 100km여서, 여기서부터 시작해도 완주증을 발급해준다. 나는 길 위에서 로마, 취리히, 투르즈, 리스본 등등 유럽 각지에서 까미노를 시작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심지어는 스위스에서 시작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가, 다시 스위스까지 걸어서 돌아가는 중인 순례자도 있었다. 꼭 종교적인 목적으로 까미노를 걷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거꾸로 산티아고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그래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까미노 위에는 수 많은 각자의 길과 각자의 스토리가 있다.


Saint-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Roncesvalles로 향하는 까미노의 첫날. 모든 순례길에서 가장 힘든 날 중 하루-




11월에서 2월 까지의 겨울은 까미노의 비수기다. 날씨가 추워지면 길을 걷는 순례자의 숫자가 줄어든다. 문을 닫는 알베르게도 많다. 그래서 길 위에서 순례자를 만나는 일이 드물고, 홀로 길을 걷는 시간이 많다. 나는 매섭고 스산했던 1월 30일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다.


매서운 겨울을 이기기 위해 묵묵히 서있는 포도나무를 볼 때면 뭔가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길을 걸은지 1주일 정도 되었을 때였다. 포도주로 유명한 Rioja 지방을 걷고 있었다. 이 동네에서는 어디에서나 포도밭을 만날 수 있다. 온통 포도나무로 가득한 광활한 평원의 풍경은 길을 걷는 피로를 잊게 할 정도로 장관이었다. 아쉽게도 겨울이라 포도는 보지 못했지만, 혹독한 겨울을 이기기 위해 묵묵히 서있는 포도나무를 볼 때면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꼭 한 겨울의 인삼 밭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진 길을 걷는 날이었다. 포도밭의 풍경을 즐기며, 가끔은 사진도 찍고 하면서, 열심히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앞을 보았는데 저 멀리 뻗은 길 위에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역시나 쫒아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말 그대로 이 길 위에 오로지 나 혼자였다.


많은 생각들이 스쳤다. 이 길 위에서는 누구도 내 길을 대신 걸어 줄 수 없다. 어깨 위의 짐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대신 지어주지 못한다. 잠시 누군가 옆을 지나치며 고독한 이 길의 말벗이 되어주는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다. 모두가 각자의 속도로 자신의 길을 걷는 이 곳에서는 오로지 ‘나의 길(my way)’만 있을 뿐이다.


문득 이 길이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인생의 무게 또한 누구도 대신 지어줄 수 없다. 또한, 인생이 내게 던지는 질문을 회피한다고 다른 쉬운 길이 생기는 법은 아니다. 모든 길은 결국 산티아고로 향한다는 순례길 조개 껍데기의 의미처럼, 결국 모든 인생도 한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회피는 나를 더 길고 복잡한 길로 빠뜨릴 뿐이다. 내가 짊어 지어야 할 인생의 무게를 지고, 묵묵히 내 앞의 길을 가는 것이 무식하지만 가장 빠른 길이다.


인생에 요령이란 없다-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는 가을, Rioja 지방의 포도 맛을 보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꼭 다시 순례길을 걸으러 오리라-


하루는 좀 더 빨리 산티아고에 가고 싶다는 욕심에 무리해서 먼 거리를 걸은 적이 있다. 하지만 2-3일 뒤에 이전 마을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결국 다시 만났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누군가는 빨리 가고, 누군가는 천천히 간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긴 순례길의 어디선가는 다시 만나는 때가 분명 있다. 그냥 각자의 속도가 있을 뿐이다. 나만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가끔 지쳐서 천천히 걸을 때가 있을 뿐, 누구도 뒤쳐지는 법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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