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라이트의 <인류의 약사>를 중심으로
[편집자 주] 기후생태 위기, 팬데믹, 인간 소외 같은 지구적 차원의 문제가 중첩되면서 '진보의 덫progress trap'이라는 개념이 다시 눈길을 끈다. 위키피디아에 별도 항목으로 올라 있을 정도다. 작가 로널드 라이트의 강연-단행본으로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은 2006년 국내에 <진보의 함정>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다. 아래에 영문 위키피디아에 소개된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진보의 함정
로널드 라이트
이론과실천
'진보의 덫'이란 현재 인간 사회가 처한 조건을 말한다. 인간의 창의성을 통해 진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주의하게 문제를 유발하고서도 지금의 지위와 안정, 삶의 질의 단기적 손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해결할 자원이나 정치적 의지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이것은 더 이상의 진보를 막고 어느 시점엔가는 사회적 붕괴로 이어지게 된다. 이 증후군을 처음 이야기한 사람은 월터 폰 크래머Walter Von Krämer인데, 1989년 'Fortschrittsfalle Medizin'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일련의 논문에서 언급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진보의 덫'이라는 용어는 나중에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로널드 라이트가 2004년 책으로도 출간된 메시 강연 시리즈 '진보의 약사'에서 세계 역사를 진보의 덫의 연속으로 기술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라이트의 책은 '진보에서 살아남기Surviving Progress'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마틴 스코세이지가 후원했다.
라이트는 진보의 덫의 핵심을 규모와 정치적 의지의 문제로 파악한다. 즉, 작은 규모에서는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그보다 더 큰 규모로 키워서 적용하는 데서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가령 개발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 손상을 초래하는 식이다. 또한 대규모의 실행은 수익 체감의 법칙을 따르기 마련이다. 과잉출산, 토양 침식, 온실가스 방출 등이 가시화하면서 사회는 불안정해진다.
진보의 덫에 걸린 상황에서 사회적 권위를 가진 지위에 있는 이들은 미래 생존에 필요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나설 의향이 없다. 그렇게 하려면 위계제의 최상층을 차지한 자신들의 현재 지위와 정치권력을 희생시켜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설령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해도 대중의 지지와 필요한 경제적 자원을 모으기란 쉽지 않다.
그럴 경우 자연 자원의 새로운 원천을 확보한다면 회복을 도모할 수도 있다. 유럽이 '신세계'를 발견하고 착취한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현재 지구적 문명은 새로운 자원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정도까지 범위가 확장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어떤 다른 수단에 의해 위기를 피하지 못할 경우 글로벌 차원의 붕괴 위기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현재 경제 위기와 인구 문제, 글로벌 기후 변화는 국가 경제와 생태학이 상호 의존 관계에 있음을 웅변하는 징후들이다.
진보의 문제는 더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석기시대 초기 인간의 사냥 기술이 개선되면서 많은 종이 희생된 끝에 멸종되기도 했고, 인류는 불어난 인구에 식량을 공급해야만 했다. 당시 생존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였던 농업은 이제 '진보의 덫'인 것으로 드러났다.
의약의 사례에서 보듯이 기술의 거의 모든 영역이 '진보의 덫'이라는 특성을 보인다. 집약적 농축산도 그런 사례로 볼 수 있다. 라이트는 무기 기술의 발달이 핵무기에 의한 인류 절멸의 위협에 이르는 것도 그런 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라이트는 '모더니티'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적 사고를 반박하려 했다.
참고로 '진보' 개념의 보다 심층적인 역사에 관한 고전적 저서로 로버트 니스벳의 <History of the Idea of Progress>(199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