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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Aug 13. 2021

소크라테스의 '나는 모른다'

무지의 겸허 속에서 살고 죽는법을 안사람

[편집자 주]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라면 흔히 '너 자신을 알라'를 떠올린다. 이 말이 델피 신탁 중 하나라는 사실쯤은 이제 웬만큼 알려진 것도 같다.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말 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라는 말이 있다. 이른바 '무지의 철학'이다. 서양 철학사의 간판처럼 간주되는 인물의 대표적인 고백이 '나는 모른다'라는 것은 역설이다. 이를 두고 철학자들마다 다양한 해석들을 펼쳐 왔다. 여기에 또 다른 해석의 글을 소개한다.  '설득에 반대하며Against Persuasion'라는 제목으로 보스턴 리뷰에 수록된 에세이이다. 저자는 시카고대학의 고전철학 교수인 아그네스 콜라드Agnes Callard. 해석의 키워드는 겸허함(humility)이다. 단순한 겸손을 넘어 진리 탐구와 삶의 항구적인 조건으로까지 밀어붙이는 논변이 힘있다. 왜 우리는 함부로 설득하려 들 것이 아니라 찾아가 대화하고 토론하고 탐구해야 하는가.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물론 철학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자신의 지혜를 사랑한다. 실제 그런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지혜 말이다. 철학자는 뭐가 다를까. 철학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지혜를 사랑한다. 따라서 철학은 겸허의 형식이다. 정말 중요한 것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런 형식의 겸허를 누구보다 완벽하게 구현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서양에서 그가 첫 번째 철학자로 간주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글로 남기지write' 않았다. 그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이 대화가 낳는 변화의 힘은 너무나 강력했다. 플라톤 같은 사람은 평생을 바쳐 시민과 이야기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대화 편으로 써서 후대에 남길 정도였다. 이 대화 편들은 실제 대화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소크라테스의 생각뿐 아니라 그의 인간됨까지 담겨 있다. 플라톤은 세상이 그런 소크라테스를 기억하기를 바랐다. 소크라테스가 죽고 여러 세대가 지나 몇몇 경쟁적인 철학 학파들이 등장했는데, 스토아주의자와 회의주의자 모두가 소크라테스를 자신들의 원조로 삼았다. 구체적인 철학적 견해에서는 서로 달랐을지 몰라도 스스로 철학자임을 자처하려면 소크라테스의 전통 속에서 활동해야 했다.


도대체 소크라테스의 어떤 점이 그를 온 철학계의 상징으로 만들었던가? 델피 신탁이 소크라테스를 당대의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했을 때를 떠올려 보자. 소크라테스는 그 신탁이 틀렸음을 입증하려 했다. 플라톤은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변명'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갔습니다. 어디에선가 할 수 있다면 거기서 그 예언을 논박하고 신탁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해서였죠. "여기 이 사람이 나보다 지혜로운데, 당신은 내가 그렇다고 말했지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꼼꼼히 살펴보았어요. 내가 굳이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저 정치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을 살펴보면서, 또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이 사람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렇거니와 특히 그 자신에게 지혜롭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실은 아니라는 생각이 내게 들었습니다. 그 후 나는 그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실은 아니라는 걸 그에게 보여 주려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인해 난 이 사람에게도 다른 많은 참석자들에게도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난 떠나오면서 나 자신에 관해 추론을 했습니다. "이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롭다. 왜냐하면 우리 둘 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어떤 것을 알지 못한다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나는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니까 바로 그렇게 알지 못한다고 생각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점에서 조금은 더 지혜로운 것 같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도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라고요.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역, 60-61쪽)


소크라테스의 대표적인 주장이 이러한 무지의 단언이라면, 그의 대표적인 활동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논박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이 남긴 대화 편들이 다 그런 것들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주장과 활동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동기가 이타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은 교사도 아니며, 그가 벌이는 대화의 주된 수혜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얻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의 의도는 뭐란 말인가?


소크라테스는 반복해서 자기 겸허의 결여-다시 말해, 무엇이 정의롭고, 경건하고, 용감하고, 적정한 것인지에 대한 자기 확신으로 주목받는 사람에게 다가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자각으로 유명한 사람이니만큼, 이런 자칭 '지혜로운 사람(소피스트)들'에 대해서는 경멸과 적의, 혹은 무관심으로 대하지나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접근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상대에 대한 꼼꼼한 예의바름과 진지한 열광이다. 대화는 보통 소크라테스가 상대에게 부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신은 안다고 생각하니 말일세, 내게 용기(혹은 지혜, 경건, 정의...)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나? 매번 상대는 답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희망은 끝이 없다. 그가 철학 활동으로 고발되어 (결국 사형에 처해지는) 법정으로 걸어가는 도중에도, 잘난 체하는 사제 에우튀프론과 마주치자 반가워한다. 그가 경건함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스포일러: 실패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는 앎을 얻는 데 자기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단지 그들은 이미 안다는 착각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그들의 근거 없는 확신, 그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를 그들에게로 이끌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면 그 주제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하려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고 이론을 펼치고 주장을 내놓는다-이 모든 것이, 소크라테스의 가차 없는 질문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들이 스스로 이미 아는 줄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길이 된다.


가령, 당신이 소크라테스를 만난다면 대화는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소크라테스: 용기란 무엇인가?

당신: 용기란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고서도 기꺼이 큰 위험을 무릅쓸 의향이 있는 상태다.

소크라테스: 가령 자신의 목숨까지 걸 정도로?

당신: 그렇다.

소크라테스: 용기는 좋은 것인가?

당신: 그렇다.

소크라테스: 당신은 자신과 자녀를 위해서 그것을 바라는가?

당신: 그렇다.

소크라테스: 당신은 자녀가 목숨을 무릅쓰면서 돌아다니기를 바라는가?

당신: 아니다. 아마도 나는 아까 용기는 신중하게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상태에서 위험을 무릅쓴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 마치 전문 투자자가 더 많이 벌기 위해서는 어떻게 돈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 아는 것처럼?

당신: 아니다. 그건 용감한 게 아니라....


이 지점에서 당신은 길이 막힌다. 용기를 두고 무지한 위험-감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신중한 위험-감수라고도 할 수 없다. 빠져나갈 길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르는 상황에 이른다. 이것은 빠져나갈 길이 없는 혼돈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되면 소크라테스를 처음 마주쳤을 때보다 기분은 더 나빠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당신을 해친 것은 아니다. 사실 당신은 전보다 더 나아졌다. 용기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개선이 늘 기분 좋은 것은 아니다.


둘째, 소크라테스는 뭔가를 배웠다. 용기는 지구력이나 끈기 같은 뭔가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될 수는 없다. 거기에 지혜 같은 다른 요소를 더해도 마찬가지다. 이런 대화가 있기 전에는 소크라테스도 용기가 무엇인지 몰랐다. 이제 그의 무지는 보다 구체적인 형태를 띨 수 있다. 그는 용기와 지구력 간의 연결점이 무엇인지 모른다. 자신이 아직도 용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사정도 전과 같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에 대한 지식은 한결 개선되어, 보다 명확해졌다.


이것은 그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혹자는 "대체 누가 진정으로 참되게 뭔가를 안단 말인가?"라며, 무시하듯, 알고 싶지 않은 듯, 무심하게 질문할 수도 있다. 이런 태도는 "참된 지식은 얻을 수 없어, 그런데도 왜 시도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방식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겸허는 그보다 더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고 더 진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지의 영역을 지도로 그리고, 산과 강을 표시하고, 그곳을 여행하는 법을 배우려 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무지의 지식'을 이야기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서 거주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역설적인 프로젝트처럼 보일  있다. 당신의 지갑을 잃어버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이것은 지갑을 찾고 나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갑을 잃었을  아니라 지갑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심지어 지갑이 무엇인지도 잊고 있다고 가정해보라. 소크라테스대화자  명인 논은 아는  너무 없는데 어떻게 대체 어떤 것을 아는 상태에 이를  있는지 의심한다. 자신이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옳은 방향으로 첫걸음을   있을까? 완전한 어둠 속에서 지도를 그릴  있나?


소크라테스의 대답은 '노'였다. 혹은 최소한 혼자서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자기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것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다른 누군가의 '지식'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왜 당신은 이런저런 주장을 자신의 지식으로 아직은 받아들일 수 없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에게 이런 방법을 시현한다. 어린 노예 소년을 상대로 질문을 거듭해 그의 잘못된 가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기하학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의 무지가, 자신이 알 수 있는 무언가로 형체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가 다른 사람의 '안다'는 주장을 논박할 때다. 어둠의 바다로 보이던 것이 성찰적으로 접근했을 때 항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안다'는 주장과 접촉했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


소크라테스는 별난 사람이었다. 신탁에 대한 그의 반응을 보라. 대다수 사람은 신뢰받는 권위자로부터 지혜롭다는 말을 들으면 그 권위를 부정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러기보다 평생에 걸쳐 듣고 싶어 한 그런 찬사의 영화를 누리려 들 것이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이 전문인 영역으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 좀처럼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기초에 대해 확고한 지식이 있다는 배경적 확신이 있다. 다른 사람-자신과 다른 정치적 종교적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다른 교육을 받았거나 다른 지역에서 사는 사람-은 무지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안다고 남들에게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런 차이를 가지고 '대다수 사람'이라는 이 집단을 깔보거나 무시하기 위한 근거로 삼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과 그 대다수 사람이 천상에서 점지된 짝(match)이라고 봤다. 그 대다수 사람은 주장을 내놓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논박한다. 대다수 사람은 진리를 소유할 필요성에 주목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거짓을 얻는 것의 위험을 주시했다. 대다수 사람은 스스로 풍부한 통찰과 빛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고 느낀 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그런 것은 없다고 봤다. 이 대다수 사람의 도움 없이는 소크라테스는 생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궁핍함을 잘 알았다. <테아테토스>에서 그는 자신을 일종의 산파라고 말한다. 자신은 지식을 낳지 못하지만 대다수 사람의 지혜라는 자식을 '분만'하는 데 참여하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추구를 아주 다른 두 역할을 포함하는 협업 프로젝트로 봤다. 당신이나 나 혹은 또 다른 대다수 사람의 대표가 있어서, 앞으로 나와 대담한 주장을 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나 당대 후예 중 한 명이 질문하고 신문하고 구분하고 해명을 요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도 종종 하는 것이다-철학자로서 과학자로서 인터뷰어로서 친구로서 혹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그리고 많은 일상적인 개인적인 대화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조사하고 묻는다, "조건이 X, Y, Z라고 했을 때,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반대와 해명과, 누군가 말한 것을 지식으로 취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아는 자/반대자라는 짝의 형태로 조직화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다 보니, 우리가 지금도 소크라테스가 만든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의 영향력의 범위는 놀랍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놀라운 것은 그것이 성취된 수단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아는 것도 없이, 쓴 것도 없이, 이룬 것도 없이 그토록 대단한 일을 해냈다. (He did so much by knowing, writing, and accomplishing-nothing at all.)


그 모든 영향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많은 방식이 소크라테스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우리 정치는 점점 더 협업적 탐구 대신 일방적인 설득을 일삼는다. 소크라테스처럼 당신이 지식을 본질적으로 협업적인 프로젝트로 본다면, 대화를 하면서 상대를 설득하거나 아니면 설득당하거나 할 걸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당신이 안다고 가정하면 당신은 미리 설득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논쟁을 통해 사람들에게 동의하게 만들 자세를 취할 것이다. 논쟁에서 지면, 당신은 불일치 상태를 참아낼 수도 있겠지만-사안이 심각한 경우에는 상대에 대한 어떤 유인이나 처벌을 통해 당신의 견해를 관철시키려 들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설득의 압력을 피했다. 동시에 그는 토론에서 관대함을 관용하지도 않았다. 그의 겸허의 정치는 분쟁 중인 사안에 대해 진정성 있게 질문을 제기하는 것을 포함했고, 상대가 동일한 답에 이르지 않는 한, 어느 일방이 종결짓거나 어떤 답으로 정리되지 않는 방식이어야 했다. 그에 비춰보자면 지금 우리의 -설득의, 관용의, 유인의, 처벌의- 정치는 탐구심과는 거리가 멀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순간을 파이돈에서 묘사한다. 소크라테스는 독미나리즙을 마시고 사형 선고를 완수하기 전에 영혼의 불멸에 관한 일련의 주장들을 제시한다. 이 주장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던 앞의 주장들을 개선해 보려던 것들이다. 뛰어나긴 하지만 상대의 확신을 얻지는 못한다. 오랫동안 대화 편을 가르치고 읽은 경험에서 볼 때, 나는 소크라테스가 독자 또한 확신시키는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주장컨대, 그는 심지어 자신을 확신시키지도 못한다. 그는 살았던 대로 죽었다, 무지한 채 묻는 채로(He died as he lived, ignorant and inqui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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