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 단락]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편집자 주] 한 해가 저물어 간다. 곧이어 새로운 해가 시작될 것이다. 코로나 터널에 들어선 뒤로는 엇비슷한 날의 반복이다. 해가 바뀌는데도 도돌이표를 마주한 것 같다. 구태의연하거나 짐작 가능한 범위의 소식과 가십들만 '정보'와 '뉴스'라는 이름을 달고 경쟁적으로 쏟아질 뿐, 그 긴 기간 진정 가슴 벅찬 일은 무엇이었던가. 왜 이렇게 된 걸까.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에서 발췌했다. 저자의 메시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작 필요한 것을 하기 위한 현명한 거절과 거리 두기를 제안한다.
내가 도망치고 싶은 것은 이런 것들이다. 최근 몇 년간 가장 우려되는 소셜미디어의 사용 방식 중 하나는 뉴스 미디어와 사용자들이 피드에서 히스테리와 두려움의 파도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끝없는 광란의 상태에 빠져 뉴스 사이클을 만들어내고 자발적으로 그 사이클의 지배를 받는다. 불안을 호소하고,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발 빠르게 뉴스를 확인한다. 광고와 클릭의 논리에 따라 미디어 경험이 결정되고, 플랫폼 디자인이 이 경험을 착취한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디어 기업들은 일종의 '속보 경쟁'을 벌이고, 이 경쟁이 우리의 관심을 악용해 생각할 시간을 모조리 빼앗아간다. 군대에서 포로를 고문할 때 사용하는 수면 박탈 전략과 유사한데, 그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다. 2017년과 2018년에 나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에게서 "매일 새로운 일들이 터져"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 폭풍은 모두 함께 만든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 이후 나 역시 많은 지인이 이 아수라장에 뛰어들어 온라인에 길고 감정적이며 성급한 비난을 쏟아놓은 뒤 당연하게도 엄청난 관심을 끄는 것을 목격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까지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나의 페이스북 게시물은 트럼프에 반대하는 장광설이다. 내 생각에 이처럼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글들은 딱히 유익하지 않다(이 글들이 페이스북에 엄청난 가치를 더해준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반성과 사유에서 나온 의사소통의 형태라기보다는 두려움과 분노가 일으킨 순간적인 반응이다.
물론 이 감정들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 감정을 소셜미디어에 과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주 작은 방에서 터뜨린 폭죽이 다른 폭죽을 터뜨려 곧 방 안이 연기로 가득 차는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절박하지만 목적 없는 글을 이러한 플랫폼에 올리는 것은 우리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광고주와 미디어 기업에는 엄청난 수익이 된다. 이 장치를 돌아가게 하는 것은 정보의 내용이 아니라 참여율이기 때문이다. 한편 미디어 기업들은 일부러 끊임없이 자극적인 미끼를 던지고, 우리는 그 헤드라인을 보고 즉각적으로 분노한 나머지 그 기사를 읽지 않거나 공유하지 않는 선택지는 고려조차 하지 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기적으로 한 걸음 물러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우리가 무분별하게 복종하는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거리와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행동이나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거리와 시간이 필요하다. 윌리엄 테레저위츠는 2010년에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설 '고독과 리더십'에서 이 같은 현상을 경고했다. 그는 소셜미디어에서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뉴스 사이클에 얽매이는 것을 두고 이렇게 경고한다. "스스로 통념에 파묻어버리는 일입니다. 통념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든 그 밖의 것에 대해 생각하든 이렇게 만들어진 불협화음 속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디지털 환경의 현 상황을 고려할 때, 내게 거리 두기란 보통 산책이나 짧은 여행을 떠나 잠시 인터넷을 멀리하거나 뉴스를 읽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원히 바깥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숲 속에 살고 싶고, 마이클 와이스와 함께 캐츠킬에 있는 그의 오두막집에 살며 아예 신문을 멀리하고 싶고,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평생 감자에 대해 사색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은 실수다. 1960년대의 코뮌의 이야기는 이 세계의 정치적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피터 틸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언제나 우주가 남아 있으니까). 지금 이 세상은 우리의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역시 문제는 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 방식이다.
하이브리드적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색하는 것과 참여하는 것, 떠나는 것과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것. <행동하는 세계에서의 사색>에서 머튼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이 두 가지 움직임을 동시에 실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는 그 가능성을 따라 도피나 망명의 언어 대신 다른 것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한 발짝 떨어지기'라고 명명한 단순한 분리 상태다.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외부자와의 관점을 갖는 것,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도 떠나갔을 곳을 흔들림 없이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적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적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 적은 이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이 세계를 접하는 채널이다. 이는 또한 미디어와 사이클과 서사가 허락하지 않는 중요한 휴식을 자신에게 제공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우주에 호소하는 자유의지론자의 빈 서판이나 역사와 단절되고자 했던 코뮌과 달리, 이 '다른 세상'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함께 정의를 실현한 이 세상의 완벽한 이상향에 가깝다.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여기에 수반되는 모든 희망과 슬픈 사색을 품고 현재의 세계를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현재에 책임을 느낌으로써 우리는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는 좋은 삶의 희미한 윤곽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삶은 '신화와 미신', 즉 인종차별과 성차별,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외국인 혐오, 기후변화 부정, 그 밖에 현실에 기반이 없는 다른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삶이다. 이는 하찮은 일이 아니다. 관심경제는 우리를 참담한 현실에 계속 붙잡아두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고충이 과거에 어떤 형태였는지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어떻게든 실망하거나 타격받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 발짝 떨어지는 순간에 영원히 떠나고 싶은 절박한 욕망이 지금 이곳에서 거부라는 선택지를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다짐, 거부라는 공동의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만나겠다는 다짐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저항은 참여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이 참여는 새로운 방식, 즉 패권 경쟁의 권위를 훼손하고 그 바깥의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의 참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