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보기라도 하겠다는 건
눈치를 본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배려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약간 비틀어 해석하자면 눈치가 없다는 말은 배려심이 없단 말과도 같다.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딘딘도 누나들 덕분에 눈치를 볼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이 자기 위주로만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누나들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도 움직일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눈치를 보게 만드는 건 또 어떤가. 그것 또한 역으로 배려심이 부족한 태도일 수 있다. 특히나 한쪽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 대등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예컨대 갑과 을의 관계, 팀장과 팀원의 관계, 혹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 나이차이가 나는 형제자매의 관계에서는 배려와 존중이 적절하게 필요하다.
얼핏 진부하게 들리는 이 단어들은 생각보다 거창한 옷을 입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대화에서부터 그 존재감이 확연히 드러난다. 배려와 존중이 없는 대화는 본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우선시하는 대화다. 그것은 차라리 대화라기보단 외침에 가깝다. 내가 뱉어낸 말에 상대방이 반응해야만 하는.
긴 연휴 중 길지 않은 시간을 언니와 보내며 몇 번이나 마음이 덜컹거렸다. 요즘 들어 말에 민감한 탓이리라. 언니와 나는 같은 모국어를 가졌기에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부분 그녀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공감은 연결'이라고 했던 박재연 소장님의 말에 따르면 나는 그녀와 거의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치를 보는 건 언제나 힘이 든다. 어린 시절 '저기 있는 거 가져와'의 저기가 어디인지, 그 근처까지 가서도 서성이던 내게 다시 날아와 꽂히던 그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는 여전히 불편하다. 그녀의 까딱하던 고개와 눈동자의 방향을 가늠하는 동안 한없이 작아졌던 어린 시절의 자아는 구멍 난 튜브처럼 쉽게 펼쳐지지 않았다.
같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똑같이 자녀를 둘 낳고 어른이 되어 바라본 나의 언니는 그저 속이 시끄러운 사람일 뿐이었다. 혼자서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엉켜버린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 얽히고설킨 감정들을 날 선 말로 내뱉다가 자기도 걸려 넘어져 울어버리는 사람.
인상을 잔뜩 쓰고 신경질 내며 말하는 모습은 덫에 걸려 포효하는 사나운 짐승 같기도 했다. 흔히들 겉은 강한데 속은 여리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나의 언니다. 약한 속사람이 복잡한 생각의 덫에 걸려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자신을 감당하는 것조차 힘이 든 사람을 감당하는 것은 또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가.
함께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하고, 외식하기 위해 외출을 하고 행선지와 식당을 정하는 과정에서 나는 언니와 아슬아슬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언니와의 대화가 불편한 건 단순히 말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많은 경우 자동적으로 툭 떠오른 자기만의 생각 때문에 쉽게 갈등에 휩싸였고, 불안과 조급함 속에서 거칠게 던져낸 순간적인 발화(發話)는 갈등의 불씨가 되어 발화(發火)해버리는 것 같았다.
나라고 어찌 그 불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안에도 비슷한 불씨와 발화점이 있기에 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눌려있던 자아가 폭발하게 되는 건 한순간이다. 기름에 불이 붙는 듯한 참사를 피하기 위해 늘 조심하려 하지만, 긴장이 계속되면 피로도가 쌓이고 결국 스트레스가 되어버린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나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책임의 부분이기도 하다.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제대로 전달했는지 내게 먼저 책임을 물을 줄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며 상대방의 탓을 하거나, 내가 맞고 네가 틀리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 대화는 더 이상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가 될 수 없다. 그저 자기 소리를 내는 발화(發話)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아직 언니를 감당할 수가 없다. 언니에게 새로운 언어를 가르쳐줄 수도 없다. 나 또한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향하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있어야만 겨우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언니만큼이나 약하고, 언니만큼이나 세다. 우리는 다른 것 같으나 닮았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반대편에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대편이라는 건 맞은편이기도 하다.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평행선을 그려온 지난 세월만큼 앞으로도 나는 많은 경우 그녀와 함께 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내 앞에 존재하고 있는 그녀를 외면하지는 않기로 했다. 차마 더 가까이 가진 못하더라도, 맞은편에서 그녀의 삶을 조용히 지켜보며 응원하기로 했다. 그녀가 화염에 휩싸이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이것 또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 사진 출처: unsplash
* 박재연, <엄마의 말하기 연습> 중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