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랑비 Nov 03. 2019

육아하면서 생각하는 전래동화

스트레스 관점 입각

남편이 아무리 같이 육아를 한다고 해도 절대적인 육아시간은 주부인 엄마가 많기 마련이다.

주말쯤 되면 주중에 차곡차곡 쌓인 울분이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살 뺀다고 주중에 마시지 않았던 맥주. 주말에 몰아서 마시고. 맘 같아선 밖에 나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고, 노래방에 가서 소찬휘의 tears라도 부르고 싶다. 그런데, 밖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자니 동네에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창피하고, 노래방은 저녁 6시부터 영업한다. 난 주말에 낮술 하는 여자인데 말이다.


아기 분유를 주고 불어 터진 라면을 먹고 있자니 문득 전래동화 얘기가 스쳐 지나간다.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생각해보면 이 나무꾼은 자기 주제에 넘치는 천상계 여자를 아내로 얻었다. 단지 사슴의 생명을 구해줬다는 이유로 언감생심 살아생전에 만날 수도 없는 여자를 와이프로 맞아 아이를 둘이나 얻고 행복한 부부생활을 했겠지. 선녀 입장에서 보면 나무꾼=호로새끼나 마찬가지다. 까짓거 그냥 다 벗은 상태로 집에 돌아가도 되지. 뭐에 발목 잡혀서 결혼생활을 응했을까? 지상에서의 시간은 천상에서의 시간보다 짧아서 그랬으려나? 새로운 경험을 한번 해보자는 취지였을까?

아이 둘을 낳는데 얼마나 걸릴까? 한 4년? 도중에 임신됐던 아기들이 유산되거나 사산되지 않으면 그런 시간을 지냈으리라. 선녀랑 결혼하고 나서도 그 나무꾼은 업그레이드되지 않는다. 바보온달은 평강공주랑 결혼해서 장군이 됐는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천상계 여자도 신분상승을 하는 데에는 별 필요가 없나 보다. 나무꾼은 겁나 예쁜 와이프랑 알콩달콩 생활했겠지. 근데 선녀는 뭐야. 천상계에서 있었으면 만날 수 있었을 번듯한 다른 천상계 남자를 뒤로 하고, 고기를 먹일 수 있는 사냥꾼도 아니고 산속에서 겨우 나무나 하는 남자를 어쩔 수 없이 남편으로 맞는다. 나꾼이 납치하듯이 데려와 살림을 차리고 부부생활을 하던 기간. 나꾼은 선녀에게 최선을 다했을까? 공주대접을 해줬을까? 아니면 하늘 같은 서방님을 떠받들고 살라고 했을까? 상세한 부부생활 묘사는 그려지지 않는다. 여염집 아낙네로 쥐 죽은 듯이 산지 몇 년. 날개옷을 어렵게 입고, 선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정인 천상계로 모든 아기들을 데리고 돌아간다. 어쩌면 나무꾼은 인과응보일 수도 있다. 사슴의 생명을 구한 결과, 너무너무 아름다운 와이프와 토끼 같은 아기들을 얻는다. 근데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선녀는 자상하다. 아이들을 다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서 나무꾼에게 마음에 부담 없이 새장가를 들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던가!


이와 궤를 같이하는 서양 전래동화가 있다. 바로 미녀와 야수다.

이 동화내용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 남자는 야수가 될 수도 있으니 순종하라. 그러면 사랑과 지위를 얻을 것이다. 이런 내용 아닐까? 야수가 왕자였기에 망정이지 아무것도 아닌 범부였다면? 왕자니까 예쁜 미녀를 쟁취하는 건가? 그럼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이 더 부인복이 많은 건가?


심청전은 아버지 부양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효사상을 강조한다. 그 비슷한 전래동화가 또 하나 더 있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위해 자기 자식인 아기를 고아서 그 육수를 먹이라는 전래동화다. 그 동화의 논리인즉슨 아기는 또 낳을 수 있고, 어머니는 한 분뿐이니 자신들의 아이를 희생하자라는 얘기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뜨악할만한 논리의 이야기들이다. 자식도 부모도 자신의 목숨도 다 소중하다. 그런데 그중 제일 가치 있는 삶은 부모님의 목숨이니 다 희생하라는 근본 사상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이야말로 조선시대 사상과 가치관을 명확히 반영한다.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을 희생해서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준 부모님을 봉양한다. 어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부모를 부양하라는 메시지겠지. 이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자식들은 요즘 우리 세대에도 있다. 낀 세대인 부모님은 부모님을 부양하랴, 자식들인 우리를 뒷바라지하랴 정말이지 숨이 턱턱 막히실 거 같다. 그런데 돌아가신 시할아버님의 10년간 혈액암 구완 간호비를 위해 희생된 우리 신랑의 사교육비. 12년도 더 된 옛이야기를 "우리 아들이 과외라는걸 좀 더 했었더라면 의사 되는 건 문제없었을 텐데."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우리 시어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자식의 미래와 부모의 간호는 등가교환이 가능한 거 같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자식. 오랫동안 정해진 그 역할 강조보다 요즘 우리 세대는 우리의 꿈, 성공을 위해 더 달려온 세대다. 20년 동안 받았던 교육을 뒤로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엄마 아빠 역할을 하려니 일주일에 한 번씩은 숨이 턱턱 막힌다.

작가의 이전글 예전과 다른 출산 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