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빼어남'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다.
무슨 일을 잘 해내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 일을 즐길 수 있다.
- 펄 벅(Pearl S. Buck) -
조직에서 일을 하다보면, 한 사람을 중심으로 아랫사람이 계속 바뀌는 경우가 있고, 윗사람이 계속 바뀌는 경우도 있다. 보통은 아랫사람이 바뀌면 리더십에 의문을 종종 품기도 한다. 나의 경우는, 업무는 그대로였으나 조직은 자주 바뀌었고 나의 윗사람이 자꾸만 회사를 떠났다. 유능한 상사라기보다는 나름 각자의 사정과 이유가 있었다. 십여 년 이상 나를 지켜보던 어떤 동료들은 어쩌면 그리 만만치 않으신 상사 분들과 일을 하냐면서 안됐다는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었다. 만만치 않은 여러 유형들과 일하다 보니 웬만한 상사는 어렵지도 않았으며, 계속 바뀌는 상사로 인해 일에 있어서는 점점 독립적인 오너십을 갖게 되고,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자긍심도 직급에 비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끔씩은 ‘내가 너무 기가 세서 윗사람들을 쫒아내는 건가?’ 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입사 이후 지금까지 매년 상사와 나의 평가 문구를 보관하고 있는데, 책임 진급 즈음에 쓴 코멘트가 지금 다시 보아도 인상적이다. 대략 내용은 ‘나의 개발 인프라 시스템, 프로세스의 구축과 효율성 수준이 바로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의 시스템, 프로세스의 수준을 결정한다.’라고 씌여 있었다. 한 기업을 다양한 시각에서 볼 때 내가 맡은 업무의 수준이 바로 우리 회사의 글로벌 수준이었기에, 대표 선수로서 끊임없이 혁신하고 개선하였으며 5년 후, 10년 후의 모습을 꿈꾸면서 일해 왔다. 그리고 지금의 업무도 이런 흐름에서는 동일하게 일치한다. 내가 맡은 업무가 무엇이든 그 수준과 성과가 바로 나의 회사의 수준이므로, 올림픽 대회에 출전한 어느 종목의 국가 대표 선수처럼 회사의 대표 선수로서의 자긍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수준을 높이고 끊임없이 최고이기를 노력하며 지향했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요? 라는 말 한마디]
그런데, 상사가 계속 바뀌었다. 대리 때부터 개발팀장, 사업부장 보고 자료도 만들고 가끔은 프레젠테이션도 했어야 했다. 업무에는 익숙했지만 보고서 작성이나 발표는 다른 영역이었다. 회사 내에서 효과적인 업무 소통인 보고서, 그 보고서를 나도 잘 쓰고 싶었다. 진행되고 있는 업무와 계획을 보고서로 잘 표현하여 빠른 의사 결정을 하도록 하는 것은 나보다 훨씬 몇 배, 몇 십 배나 시간당 비용이 비싼 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아껴드리는 것이며, 이것은 회사에 내가 기여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업부에서 잘 썼다는 보고서가 메일로 전달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모아놓고 분석해서 나의 업무 보고서에 적용해 보기 시작했다. 어떤 유형은 불량 대책서, 어떤 것은 전략 수립, 어떤 것은 기술 로드맵, 어떤 것은 현황 보고 등등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가 발생하면, 보고서 유형을 모두 검토한 후 원하는 내용과 양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나만의 보고서 양식을 만들어 갔다. 어떤 상사이든 업무 보고서에 피드백 주는 것이 싫지 않았다. 내용을 알아야만 작성하고 표현할 수 있으므로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면 그동안 몰랐던 내용도 점점 확실히 이해되고 복잡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쉽게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재미있었다. 점점 나아지고 완벽해져 가는 보고서를 볼 때면 그 희열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요한 문서의 경우에는, 같은 내용에 대하여 어떤 전달 표현 방식을 선호할지 몰라서 2안, 3안 등 여러 형태로 만들어서 - 사실 이것은 요즘 회사에서 Work Smart 개선에서 가장 먼저 개선을 요구하는 항목이지만 - 선택하도록 미리 준비하기도 했다. 여러 형태의 안(案) 중에서 내가 선호하는 것이 선택되면 이 또한 재미있었다. 심지어 같이 일하던 동료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거 어짜피 빠꾸 맞아서 수정할 거를 굳이 힘들게 2안, 3안을 왜 만들어요? 그냥 하나 만들어서 수정하라고 하면 거기서 수정하면 되지. 나도 처음에는 잘 만들려고 했는데 그래봤자 소용없어서 이제는 수정하라는 것만 그것만 수정해요.’ 똑 같은 걸 기획해도 기획의 배경과 목적, 해결할 문제나 위기, 다른 대안이나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논리 구성과 자연스럽게 결론을 이끌어 내는 설득 방식의 스타일을 몇 가지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엄청난 즐거움이었다. 스토리라인을 구상한 후 그 업무에 대한 철학적 주장을 기반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이야말로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며 함께 깨어나고 통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와 대단해. 어떻게 새벽 2시가 넘어서 수정하라고 하는데도 인상을 한번 안 쓰냐?’ 그렇다. 어느 날은 밤 12시에도, 새벽 1시가 넘어서도 수정하라는 빨간펜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짜증나거나 힘들지 않았다. 결과를 더 좋게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이니까 당연히 수정이 필요하면 수정할 수 있었다. 상사 또한 그 시간까지 퇴근하지 않으면서 함께 일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도리어 나는 보고서를 더 잘 작성하는 스킬을 또 한 가지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책임(과장) 초반까지 나의 업무를 자신의 일처럼 봐 줄 수 있는 상사가 없었다. 그래서, 조직장이 김 그룹장님으로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요?’ 라는 말 한마디에 ‘세상에나 나의 일을 도와주려는 상사가 있다니’ 하면서 혼자 감동했고 늦은 시간까지 부서원들과 함께 있어줬다는 고마움이 10년이 훌쩍 지난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서운함도 없고 대안을 제시하고 막판에 부정적인 코멘트를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도와준다고 여겨져서 그저 고맙게만 느껴진다. 막막하던 일을 혼자 꾸역꾸역 어렵게 해내는 순간이 내가 가장 많은 배움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끓는 물이 99도에서 100도로 1도를 올릴 때 가장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처럼.
[성과로 말하는 핵심인재 하이퍼포머, 되기 바로 직전의 자기계발 하드워커]
일을 더 잘 해내고 싶었다. 보고서 작성법, 파워포인트 작성법, 프레젠테이션 스킬, 문서의 스토리라인 구성, 로직트리로 논리를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책을 읽고 정리했다. 또, 맥킨지 컨설팅에서 발간한 문제 해결, 사고방식, 일하는 방식, 차트의 기술, 발표의 기술, 표현법 관련된 책을 구입해서 읽을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나의 업무 보고서에 적용해 봤다. 이때는 스티브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이 한창 유행이었지만 마케팅 경쟁 프레젠테이션이 아닌 한 장의 문서에 많은 기술 정보가 담긴 개발 부서에 어떻게 효과적인 소통 수단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스토리 논리 구성이나 프레젠테이션 등 외부 교육도 많이 다녔다. 외부 교육에 가 보면 그런 교육에 개인 비용으로 참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회사 교육 담당이거나 경쟁 PT를 주로 해야 하는 어떤 기업의 대표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연차 비용과 지불한 교육 비용을 합하면 진짜 비싼 거였는데도 아깝지 않았다. 몇 년 동안은 ‘직장인 열정 충전 컨퍼런스’와 같은 유명한 일일 특강은 휴가내고 참석하면서 사내외 어디든 열리는 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고, 새벽마다 일어나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 지금의 미라클 모닝 – 변화경영연구소의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을 500일이나 하기도 했다. 자기계발, 리더십, 전략, 성과 관련한 책도 닥치는 대로 엄청 많이 읽었다. 읽다보니 어느 순간 목차만 봐도 ‘이 책은 몇 년 내공이 담긴 내용이겠네.’ 라고 근거 없는 추측이 떠오르자 그제서야 자기계발 서적 읽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메일로 전송되는 외부 마케팅 자료, 사업부 주요 임원 보고 자료 등 잘 정리된 보고서를 보면 무조건 보관하고, 이미지 캡처를 해놓았다. 파워포인트 템플릿, 이미지 등도 모조리 다운로드 받아서 나의 업무 보고서의 대략저인 스토리 라인과 내용이 잡히면, 어느 템플릿과 구성이 가장 표현에 적합한지 몇 백 개의 이미지를 살펴보면서 확인하여 선택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최대한 비슷하게 이미지를 만들어서 표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문서의 스토리라인, 논리력과 내용을 이미지와 도형으로 나타내는 표현력과 색감 등이 나아지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컬러의 톤을 낮춰라 너무 튄다 색상이 화려하다 등 여러 피드백이 있었다. 내용에 따라 다른 이미지와 구성을 만들다 보니 통상적인 기존의 문서와는 다른 특성이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사업부에서 파워포인트와 보고 문서를 잘 작성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특히 복작한 내용을 구조화하고 시각적 이미지 표현을 잘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작성된 문서를 보면 한눈에 촌스럽든 화려하든 만족스럽든 아니든 어쨌든 원작자가 나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어느 작가의 작품의 느낌처럼.
점점 리더십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회사의 많은 선배 여성 리더십 강의와 패널 토의를 듣기도 했다. 여성의 날 특강으로 오셨던 김미경 강사님이 회사에서 일 잘한다고 육아나 집안일도 잘한다고 착각하며 애쓰지 말라면서 ‘약은 약사에게’처럼 육아는 육아 전문가에게 과감하게 아웃소싱 하라고 했을 때 가슴에 막혔던 체증이 훅 내려감을 느꼈다. 좋은 책들이 많았지만 일하는 방법에 관해 가장 인상에 남았던 책은 『하이퍼포머-성과로 말하는 핵심 인재』이다. 업무에 있어서 그냥 열심히 성실하게 하는 것이 아닌,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개인의 성과 창출을 어떻게 만들며, 표현할 것인가의 방향을 잡게 해 주었다. 그 당시 이 책을 회사 동료 중 한명에게 추천했었는데, 결혼 전에 장인어른에게 이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자신의 미래 계획을 작성하여 보고했다고 한 친구도 있을 정도였다. 이 때부터 나의 일하는 방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시작하기 전부터 일의 목표와 결과를 염두해 두고, 어떻게 결과를 KPI (핵심 성과 지표, Key Performance Indicator) 숫자로 표현할 것이며, 전략적으로 구성하고 디테일하게 완성도 높은 품질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고, 적용하고, 몰입하는 연습을 즐기기 시작했다.
제 버릇은 개에게도 주지 못하나보다. 나는 누가 알까봐서 하드커버의 책 표지를 다른 종이로 몰래 싸서 읽었던 책이 있었다. 회사 도서관에서 빌렸던 『그들은 어떻게 임원이 되었을까』라는 책이었다. 지금도 내가 이 책에 적혀 있었던 내용을 얘기하면 정말 그걸 읽었냐 면서 깔깔대면서 모두들 웃는다. 난 임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승진 후에 무엇이 달라지는지 진짜 궁금했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소풍이 끝나면 빈 도시락만 딸가닥 소리를 내는 가벼운 가방을 등에 매고는 서점에 갔다. 서점 바닥에 편하게 앉아서는 주로 『하버드의 공부벌레들』과 비슷한 종류의 마치 간증과 같은 책을 많이 읽었다. 그때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를 잘할 수 있는지 어떤 방식과 태도로 진짜 궁금했었다. 호기심으로 물음표가 가득했던 가슴은 책에서 만난 하버드의 유학생들을 포함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 분야에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삶을 견주어 보고 선택의 기준을 하나씩 세워볼 수 있는 상대 좌표가 되었다. 상대 좌표가 많아질수록 성공 확률의 정확도는 높아져갔고 나만의 전략과 전술은 정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