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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 - 아버지 미국인과 아버지 유대인

모던에서의 상실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불완전한 재건

by joyakd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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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탈리스트>는 건축 영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에서 나치로부터 박대당하며 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를 좇으며, 그가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을 추구함에 따라 영화의 제목은 브루탈리스트가 된다. 브루탈리즘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연장선이자 반향에 있는데, 미니멀리즘 특성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단순한 형식이지만 큰 규모로 지어지는 특성을 지닌다. 'Brutalism'은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를 의미하는 '베통 브뤼트'에서 유래되었지만, 영미권에서는 'Brutal'이라는, '잔혹한'의 뜻을 가진 의미로 오독하는 경우가 많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가 터전을 잃어버린 유럽인이 미국에 정착하며 겪는 고통을 다루는 점을 상기했을 때, 이 제목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서막(프롤로그), 제1막(1947-52), 인터미션, 제2막(1953-60), 에필로그로 구성된다. 서막은 라즐로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 자신의 아내 에르제벳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기까지다. 이를 통해 제1막의 목표가 '아내를 만나는 것'으로 설정된다. 제1막은 아내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까지를 다루며 1막이 끝나면 15분 간의 인터미션이 시작된다. 인터미션에서는 라즐로와 에르제벳, 그들의 조카 조피아까지 함께 나오는 웨딩 사진이 화면을 채운다. 2막은 그들 가족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를 짓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표면적으로는 문화센터를 짓는 모습이지만 이는 곧 가족의 삶을 재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20년 후의 1980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에서 에필로그가 서술된다.


1947년부터 1980년까지를 다루는 이 영화는 근현대의 문제를 스크린 위에 올려둔다. 라즐로가 건물 모형을 완성했을 때, 옆에 있던 사람이 '이건 확실히 모던이군요'와 같이 말하는 것은 영화가 근대 위에 서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브루탈리즘은 모더니즘 양식과는 분리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으로 여겨진다. 건축에서의 모더니즘은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것으로, 브루탈리즘은 전후 유럽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차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전쟁터의 유럽에서 도주해 미국으로 넘어온 유대인에게는 자신의 삶과 문화를 재건하기까지의 과정이 남아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전쟁터가 되지 않은 미국에서 근대는 애초에 끝이 난 것으로 보이고, 그의 재건은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브루탈리즘이 되는 것이다.


서막


영화는 소련군의 손에 의해 강제로 끌려 자리에 앉아, 조피아와의 관계를 증명하라는 군인의 말을 듣는 에르제벳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르제벳이 그곳에서 쓰는 편지는 내레이션으로 발화되어 미국에 도착하는 라즐로의 원씬원컷 장면과 매치된다. 핸드헬드 롱테이크로 라즐로를 좇아가는 카메라는 갑판 위로 나가 미국을 발견하는 라즐로의 기쁜 얼굴을 보여주다가 이내 카메라를 그대로 위로 돌려 자유의 여신상을 거꾸로 뒤집어진 형태로 비춘다. 이내 바닷물에 비치는 자유의 여신상을 다시 한 번 거꾸로 보여주는 연출법은 꽤나 직설적으로 작가의 태도를 암시한다. 즉, 이 영화는 자유의 횃불이 바다를 건너오는 이들에게는 거꾸로 뒤집어져 위협으로 작용하는 구조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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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즐로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친구와 함께 매춘부를 찾는다. 라즐로는 매춘부에게 유사성행위를 요구할 뿐 그녀와 삽입성교를 하지는 않는다. 이는 라즐로가 에르제벳을 만나기 전까지의 태도가 된다. 뒤에서 다시 말하게 되겠지만, 영화는 성관계에서의 삽입행위를 중요한 메타포로서 사용한다. 여기까지는 표면적으로 라즐로가 전쟁의 트라우마와 가족을 상기하며 직접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보인다. (유사성행위 또한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뤄진다.) 나아가 그에게 쾌락을 주고자 노력하는 매춘부는, 탈출 도중 다친 라즐로의 코를 못생겼다고 말한다. 미국의 첫 얼굴은 얼핏 그를 기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의 고통을 조롱함을 보여준다.


제 1막: 도착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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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딛기 어려운 미국에서 그는 사촌 아틸라를 찾아간다. 아틸라는 미국에 일찍이 먼저 도착한 선경험자로 등장한다. 그는 아직도 영어가 서툴지만 미국식 이름 '밀러'를 쓰면서, 아들이 없는데도 '밀러 부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가구 가게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아틸라는 헝가리인이기보다는 헝가리계 미국인으로 보여진다. 또한 미국인들이 '부자'가 하는 사업을 좋아하기에 '밀러 부자'로 이름을 지었다는 그의 말도 중요한데, 아버지라는 존재를 중요히 여기며 그를 아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관계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미국인들의 성향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리의 등장은 그 속에 숨어있는 미국인의 진심을 암시한다. 해리는 사업가 해리슨 리 밴 뷰런의 아들인데, 해리슨에게 서프라이즈 선물을 주고 싶다며, 그의 서재 인테리어를 바꿔놓는 공사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후에 해리슨 본인이 서프라이즈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해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바탕으로 아버지에 대항하며 일종의 쿠데타를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리모델링한 공간이 서재라는 사실은, 미국 아버지 세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전복하고자 하는 아들 세대의 욕망을 입증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사용은 해리가 처음 등장하자마자 해리슨의 이름을 부르는 아틸라에게 자신의 이름은 아버지와 다르다며 제대로 일러주는 장면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아들의 유쾌한 반란은 자리를 비운 줄 알았던 아버지 해리슨이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복귀하게 되며 실패한다. 해리슨은 처음 등장하며 자신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서재를 공사하던 라즐로와 아틸라, 인부들을 내쫓는다. 자신 집 마당에 흑인이 있다고 지적하는 해리슨의 태도는 환대의 맞은편에 있는 박대를 보여준다다. 미국의 아버지 세대는 자신들의 역사가 침략으로 시작되었음을 망각한 채 이민자들을 박대하는 성격을 지닌다. 특히 그가 분노하는 것은 단순히 흑인과 이민자가 자신의 장소를 침범한 사실이 아닌, 그의 사고체계를 상징하는 공간인 서재가 임의로 변형당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천장의 유리돔이 교체를 위해 철거되던 도중 추락함으로써 훼손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개신교 신앙이, 유대인 이민자에 의해 위협당하는 사건으로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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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상위에 자리하는 아버지 미국인의 등장과 박대에 아들 미국인과, 헝가리계 미국인은 무책임하게 대응한다. 해리는 유리돔이 깨진 것을 이유로 자재비마저 못 주겠다고 이야기하는데, 기존에 그가 유리돔을 교체하는 것에 동의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는 의아하다. 또한 아틸라는 공사가 무산된 것과 더불어 라즐로가 자신의 아내에게 추근댔다는 이유로 그를 내쫓는다. 이민자들을 내쫓고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데는 본질적으로 타자에 대한 적대심만이 기능하지만, 형식적으로 온갖 이유가 덧붙여진다.


이제 라즐로는 흑인 친구 고든과 함께 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며 건설 노동 일을 한다. 고든은 라즐로가 식량 배급을 받으러 갔을 때 만났던 인물인데, 박대당하는 사람들로서 유대를 형성하며 친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흡입하며 생활한다. 다친 코의 통증을 잊기 위해 시작한 마약은 라즐로에게 고통을 일시적으로 떨쳐내는 도구가 된다. 고통은 전쟁의 과정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유럽인의 상실을 직접적으로 상징하며, 그 트라우마를 통해 정상적으로 생활하지 못할 위험을 마약으로 해결한다. 이는 삽입성교로 절대적 쾌락을 좇는 것을 거부하는 라즐로에게, 소극적 자세로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취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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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해리슨의 서재를 리모델링하다 좇겨난 라즐로와 고든이 다리를 건설하는 일에 노동자로서 참여하는 것은 해리슨의 입장에서 그들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공사가 미국인의 체계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미국을 성장시키는 산업의 부품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에 순응한 것처럼 보이는 라즐로를 해리슨은 다시 찾아오는데, 직접적으로는 잡지에 자신의 리모델링된 서재가 훌륭한 건축의 사례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미국인의 명예는 종종 이런 식으로 세워진다. 해리슨은 애초에 서재의 건축 양식은 배제한 채 그것이 자신의 허락 없이 리모델링되었음에 분노했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 사회에 의해 칭송받는 명예를 부여받자 비로소 그것은 자신의 명예가 된다. 아버지 미국인 해리슨은 근대화 과정에 존재하는 인물로, 근대와 전근대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전근대의, 타자에 의해 형성되는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화가 끝나고, '당신과 함께 대화하는 것은 지적이고 심오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는 해리슨의 발언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나르시시즘적인 성격을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라즐로를 위험한 이민자에서 위대한 건축가로 탈바꿈하는 것은 사업가 해리슨이 아니라, 그에게 명예를 부여해준 사회인 것이다. 해리슨을 아버지로 두는 미국 사회는 이제 라즐로에게 성원권을 부여하며, 그는 해리슨의 집에 초대된다. 연회에서 라즐로는 주인공으로 소개하며 그의 가족을 데려와주겠다고 말한다. 해리슨은 라즐로를 따로 불러 다시 한 번 그와의 지적이고 심오한 대화를 나누며, 오직 자신의 명예를 목적으로 하는 이 시간에 타자가 개입하는 것을 저지한다. 이 씬에서 감독은 라즐로의 입을 빌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는데, 왜 건축을 하게 되었냐는 해리슨의 물음에 대한 답이 그것이다. 아마도 근대화의 격동 속에 태어나 살아왔을 라즐로는 정육면체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대답하며 혼란스러운 세상을 인식하고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식을 기록하기 위해 건축이 기능한다고 말한다. 영화가 건축을 택한 이유, 라즐로가 건축가로 설정된 이유, 극중 라즐로가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 발화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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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데 충분했을 라즐로의 발언에 해리슨은 큰 감동을 얻는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집 안의 큰 부지에 어머니의 이름을 딴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 거대한 문화센터를 라즐로를 통해 건설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그의 어머니 마가렛 리는 앞선 대화에서 언급이 되었다. 해리슨은 사생아였던 자신의 어머니를 박대한 조부모에게 모욕을 준 일화를 일러주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증명했다. 어머니에 대한 집착이 해리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해리슨에게서 유전된 것이며, 미국 건국에서도 작동했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동경하지만 아내에게는 그렇지 못하는 모습 또한 아버지 미국인의 모습이다.


이제 라즐로는 개인으로서의 삶을 온전히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재건해야 할 것은 남아있다. 문화센터의 재건이 상징하는 가족의 재건이 그것이다. 본격적으로 2부에서 다뤄질 이 큰 규모의 재건은, 1부의 끝자락에 건축 방향을 두고 대립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징후를 남긴다. 비용 문제로 건축물의 크기가 계획보다 작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발하는 라즐로의 태도는 자신이 온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조금의 상실도 허용할 수 없다는, 온전한 재건을 지향하는 태도기도 하다. 이는 헝가리 제국이 근대화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계속해서 상실했던 영토를 상기시킨다. 다만 패전국 헝가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와 이 글에서 라즐로는 헝가리인이 아니라 유럽인으로 규정한다. <브루탈리스트>가 유럽 사회를 승전국과 패전국의 이분법으로 나누기보다는, 제국주의자 파시스트와 그로 인한 희생자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 라즐로는 힘차게 일을 시작하지만 해리슨의 성격부터 이 동업은 불안하며 위태롭다. 라즐로가 활기차게 정오가 되면 천장의 지붕을 통해 건물 내부의 제단에 십자가 모양의 햇빛이 들어온다는 말을 설명할 때, 종을 치는 소리와 함께 해리슨의 복잡한 얼굴이 크게 보여진다. 해리슨은 잊고 있었던 천장에 대한 유대인의 위협을 상기하며 라즐로에 대한 적대심을 회복한다. 관객들은 찝찝한 불안감을 안은 채로, 1막의 끝을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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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의 엔딩은 영화의 오프닝과 수미상관의 구조를 지닌다. 에르제벳이 조피아와 자신의 가족관계를 증명해야 한다는 라즐로에 대한 답장의 내레이션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았으며 그 사진을 동봉해준다는 말이 담겨있다.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라즐로의 상황 위에 씌워지는 에르제벳의 내레이션은, 인물과 인물, 관객에게까지도 강한 인력을 작용시키며 재회와 재건에 대한 강한 노스탤지어를 형성한다.



인터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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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 인터미션, 관객이 편하게 나가서 화장실도 다녀오고 담배도 태우고 새 음료도 사올 수 있는 이 시간에 스크린에는 에르제벳이 말했던, 결혼식에서 조피아가 함께 찍힌 사진이 띄워진다. 15분 동안 가만히 떠 있는 이 사진은 영화가 재건해야 할 이상향이 된다. 사진에서 인물들이 서 있는 배경의 건물에는 금이 가 있는데, 곧 무너지게 될 이 배경은 영화의 '재건' 키워드와 직결된다. 관객은 화면을 보는 순간 1부에서 라즐로가 안간힘을 써서 되찾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목격하며 그에게 동화된다. 동시에 2부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에 대한, 프롤로그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나아가 사진은 '우리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하는 듯하며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다시 말해 자신을 감금한 소련군에게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동시에 영화와 관객에게 증명한다. 앞서 삶을 재현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기억하는 건축의 기능을 라즐로가 이야기했음을 돌이켜볼 때, 이 사진을 15분 동안 화면 위에 띄우며 그 존재를 호소하는 이미지는 꽤나 처절하게 느껴진다.



제 2막: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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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은 사진 속의 가족, 에르제벳과 조피아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서막 이후 내레이션으로만 등장했던 에르제벳은, 영양부족으로 인한 골다공증이 와서 휠체어를 탄 채 등장한다. 이는 라즐로의 코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상실 과정에 있었던 에르제벳이 신처적 상실을 통해 영혼의 무언가 또한 상실한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조피아는 말을 하지 않으며 목소리를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에르제벳과 조피아를 집으로 데려오며 1막이 라즐로 개인으로서의 재건이었다면, 2막은 가족으로서의, 그들이 온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을 다룰 것임이 공고해진다.


1막에서 관객은 이민자 가족의 시선으로 미국인 가족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 미국인은 명예를 통해 조건부 환대를 제공했으며, 아들 미국인은 그에게서 명예와 폭력을 물려받았다. 반대로 해리슨의 딸인 매기는 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대척점일 여성 캐릭터 매기는 라즐로에게 사람으로서의 환대를 행하며 우호적 태도를 유지한다. 에르제벳과 조피아를 맞이하는 날 역시 기차역까지 함께 마중을 나간다. 여성을 통해 영화는 미국인을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앞서 등장한 고든 또한 그렇다. 고든은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차별받는 흑인으로서 라즐로와 같은 편에 서 있다.)


그리고 에르제벳과 조피아가 합류하면서 2막에서는 유대인 가족의 모습이 투영된다. 중요한 점은 조피아가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친딸이 아니라 조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피아는 부모를 잃었고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자녀가 없으므로, 그들은 친가족의 형식으로 비춰진다. 그리고 그들 부부의 자식의 부재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앞서 라즐로는 삽입성교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건축가로서 재건해야 할 것이 남아있는 라즐로에게 성교를 통한 번식은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나 거부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전쟁 중 라즐로는 성기능을 상실한다. 미국인은 친아들을 가지지만 이민 온 유대인은 그렇지 못한다.


성교의 메타포를 줄곧 사용해온 영화에 의하면 부부가 지향하는 재건은 그들 간의 성교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라즐로는 에르제벳과의 육체적 관계를 거부한다. 골다공증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에르제벳에게서 자기사회의 상실을 애도하며 그는 재건을 이뤄내기까지 쾌락을 추구하는 일, 또는 종족을 번식하는 일을 미룬다. 애도와 쾌락의 지연은 에르제벳이 진통제를 사용하고, 라즐로가 진통성 마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라즐로의 경우는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약물을 복용함으로써 조금 더 환각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성격을 연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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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에서 주연으로서 애써온 라즐로를 벗어나 새로 등장한 에르제벳과 조피아의 성격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에르제벳은 영국 옥스퍼드에서 유학 생활을 했기에, 영어에 능통한 인물로 보인다. 해리슨 가족에게 환대받는 와중에 에르제벳은 자신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해리슨에게, '엘리자벳'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불러도 좋다고 이야기해준다. 그러나 조피아의 이름 이야기가 나오자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서둘러 '소피아'가 아닌, '조피아'라고 이야기한다. 이름은 정체성 문제와 연관된다. 이방인은 주인의 장소에서 성원권을 얻기 위해 이름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때 호명되는 이름은 성원권을 부여하는 주인의 관점에서 발음된다. 에르제벳은 성원권을 부여받기 위해 자신의 이름이, 정체성이 해리슨에 의해 변형되는 것을 감수한다. 그러나 미래 세대, 언젠가는 재건되고 회복될 정체성의 조피아는 소피아가 아닌 조피아여야만 한다.


한편, 조피아의 목소리 상실은 곧 부모 상실이다. 조피아의 어머니는 라즐로의 누나이지만 전쟁중에 죽음으로써 라즐로의 이전 세대로 상징된다. 즉 그녀는 화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해리슨의 미국인 어머니 마가렛 리에 대응하는 인물, 유대인 아버지의 어머니, 근대화 과정에서 상실된 유대인으로 기능한다. 조피아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고든의 아들에 의해 설명된다. 라즐로 가족과 고든 부자는 함께 식사를 하는데 여기서 에르제벳은 다소 섣부르게 고든 부자의 어머니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든은 애써 아내 이야기를 하며 그녀가 오래전에 죽어 아들이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아들은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슬퍼할까봐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고든의 아들과 조피아는 어머니에 대한 상실을 침묵이라는 동일한 방식으로 애도하려고 노력한다. 당연하게도 이 방식으로는 어머니의 부재가 온전히 해소될 수 없다. 난민에게는 멜랑콜리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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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세대의 미국인과 유대인 또한 만남을 갖는다. 내내 라즐로를 괴롭혀온 해리는 조피아에게 추근댄다. 라즐로에게 '조피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식의 농담을 던진 후 해리는 조피아에게 접근하고, 영화는 이후의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에르제벳에게 조피아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해리와 함께 오는 것으로 넘어가며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묘사는 생략된다. 영화는 아들 미국인의 딸 유대인에 대한 강간 위협을 이렇게 서술한다. 목격되지 않았으며 실현되었을지 모르는 강간, 침범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는 난민들에게 그렇게 기억된다. 미국에서의 올바르지 못한 방식의 사회적 결합은 그들에게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야기한다. 정체성은 훼손되었는가, 아니면 지켜졌는가 하는 물음에 그들은 답을 하지 못한다.


한편 라즐로의 공사는 미국인들의 이상과 충돌해 난항을 겪는다. 앞서 1부의 끝자락에서 건설 컨설턴트 레슬리를 포함한 '합리적 미국인'들에 의해 추구된 효율적 공사를, 온전한 재건을 이뤄내고자 하는 라즐로는 거부한다. 자신의 보수를 깎아서라도 계획대로 건물을 짓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무리한 공사는 사고를 일으킨다. 열차가 건설 자재를 수송하던 중 탈선하며 인부가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열차는 역시나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무지성한 근대 문명의 발전을 비판하기 위해 채택된다. 사고가 나기 직전 카메라는 그라운드 앵글에 가깝게 선로와 붙어 기차가 가는 방향에 따라 땅바닥이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을 광각으로 촬영한다. 엄청난 속도감이 느껴지는 이 씬에서는 <열차의 도착>을 처음 봤을 때 관객이 체험했던 것과 비슷한 공포가 재현된다. 그 불안의 공포는 현실이 되어, 곧이어 헬리캠의 넓은 부감 샷으로 화면은 전환되며 기차가 탈선해 폭발 사고가 일어나는 장면이 촬영된다. 이 사고 앞에 아버지 미국인 해리슨은 다시 한 번 무책임하며, 라즐로를 비롯한 건설팀은 해고되고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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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간이 지나고 난 후,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공사를 다시 시작하자고 연락을 보내는 것으로 다시 시작된다. 자본의 논리에서 해리슨이 공사 재개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건설팀을 해고했던 것처럼 에르제벳의 말마따나 간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라즐로 가족의 대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즐로는 당연히도 재건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공사장으로 향하게 된다. 이는 미국 안에서의 삶의 재건을 위해 자본을 이용하고자 하는 라즐로의 성격을 보여준다. 반면 아내 에르제벳은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녀는 기자로 활동하는데, 소비를 촉진하는 여성 칼럼이 아닌 진정한 기사를 쓰고 싶은 마음에 라즐로를 좇는 삶을 거부한다. 한편 조피아는 파트너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유대인들은 돌아갈 곳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피아가 예루살렘으로 떠날 것을 이야기할 때 어느새 그녀는 당연하게 말을 하고 있는데, 이 시점부터 그녀의 발화를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영화가 조피아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을 다루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이스라엘 건국은 제1차 중동 전쟁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또한 이 시점에서 조피아는 임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가 구체적인 시간 경과를 명시하지 않기에 아이의 친부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불확실한 훼손의 문제가 그녀를 비롯한 유대인을 따라다니기도 한다.


아무튼 라즐로는 건설자재를 직접 보기 위해 이탈리아를 찾은 해리슨을 만나러 간다. 그곳에서 라즐로와 해리슨은 무솔리니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하며 살아온 기술자를 만난다. 패전국의 두 기술자의 만남에서 느껴지는 휴머니즘은 유럽에서의 상실된 가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해리슨에게는 그 가치가 달갑지 않다. 미국에서 해리슨은 존경받는 아버지로서, 부러울 게 없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로 넘어와 목격한 대리석의 거대한 아름다움, 그들의 삶이 추구하는 가치는 자신이 획득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역시 동경하는 어머니와 아메리칸 드림의 대륙을 자랑할 수 있지만, 유럽(특히 이탈리아를 보여주는 것은 로마)을 비롯해 미국 밖에서 형성된 거대한 역사와 문화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럽에 오게 됨으로써 주인에서 이방인이 된 해리슨은 라즐로와 그의 세계를 질투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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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안에서 열리는 파티 도중 라즐로는 소개받은 여인과 함께 춤을 추다가 키스를 한다. 회복될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라즐로는 쾌락을 즐기는 데 근접했다가, 이내 그녀를 떨쳐내고 마약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해리슨은 이 장면을 먼 곳에서 목격하며, 자신이 구원해주어야만 하는 유대인이 쾌락을 즐기려는 모습을 증오한다. 그는 라즐로를 쫓아 나갔다가 마약을 하다 쓰러져있는 그를 목격하고, 자신의 우월감을 강조하며 라즐로를 동성강간한다.


회복과 재건을 거의 다 이뤘다고 생각했을 때, 라즐로는 아버지 미국인에 의해 강간당함으로써 정체성을 거의 상실하는 위치로 추락한다. 그는 유대교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으며 오로지 센터를 건립하는 일에 몰두한다. 폐쇄적이며 파괴적인 태도로 공사에 매진하는 자세, 장난을 치는 인부에게 욕을 해가며 안전을 강조하는 모습은 그가 아버지 미국인의 모습을 답습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모욕받고 강간당하지 않을 형식적 재건을 향하는 목표, 정체성을 상실하더라도 외면은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로 일으키겠다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해리슨에게 강간을 당한 다음날 라즐로는 그곳을 떠나면서 암벽 가운데 대리석을 캐낸 자리에 구멍이 남아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것은 파시스트 또는 아버지 미국인에게 유린당한, 박대받는 사람들의 구멍이기도 하다. 라즐로는 그 구멍을 기억하며 거대한 대리석에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물을 만들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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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다 지어졌을 무렵, 에르제벳에게는 더 이상 고통을 견디어낼 진통제가 남아있지 않다. 이는 망각의 애도로 상실을 견디어낼 기력이 다했다는 것이므로, 라즐로는 그녀에게 마약을 투약한다.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정체성, 회복과 재건이 불확실한 사회에 라즐로와 에르제벳은 약물의 환각을 통해 도달한다. 그들은 영화에서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렇게 맺어지는 관계, 꿈속에서의 쾌락과 번식은 그 꿈에서 깨어나면서 끝이 난다. 곧이어 에르제벳은 약물의 부작용으로 병원에 실려가며, 현실을 망각하는 것은 애석하게도 어떠한 실제적인 효과도 얻을 수 없음을 영화는 이야기한다.


라즐로는 약물에 취해 관계를 맺으며 에르제벳에게 자신이 해리슨에게 강간당했음을 고백한다. 유대인 아버지에 대한 강간을 에르제벳은 용서치 않는다. 이때 에르제벳은 약물 부작용으로 고통받음에도 불구하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직접 보행기를 끌며 해리슨의 자택을 방문한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군인의 지시에 의해 제한적인 공간에 자리하게 되고 이후 이동 능력을 상실하며 시대와 세계의 흐름에 의해 떠밀려온 에르제벳은 이제는 자신의 권리와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얻는다.


다시 미국인 가족의 집, 에르제벳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해리슨이 라즐로를 강간했음을 폭로한다. 이때 아버지 해리슨은 모욕을 불쾌해한다. 명예에 집착하는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아버지에게는 밀폐된 공간에서 강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개방된 공간에서 그 강간이 폭로당하는 것은 당연치 않기 때문이다. 그 모욕은 아들에게 대물림된다. 아버지가 강간범이라는 것은 아버지보다 아들에게 더 큰 모욕일 수 있다. 모욕에 대한 복수, 폭력성을 물려받은 아들은 에르제벳의 머리채를 끌고 그녀를 가족의 장소 바깥으로 밀쳐낸다. 그러나 이 개방된 공간에서의 폭력은, 오히려 '해리슨이 강간범'이라는 사실에 대한 입증이 된다. 아들의 폭력을 통해 저녁식사는 완전히 파해지게 되며, 아버지를 명예롭게 만들어주는 주위 사람들(타자)은 아버지의 장소를 떠난다. 아버지는 부끄러움을 뒤집어쓰고 사라진다. 에르제벳 옆에는 딸 미국인 매기만이 남아 그녀를 위로하고 사과를 건넬 뿐이다.


해리슨은 그렇게 사라진다. 그를 찾기 위해 가족과 직원들은 거의 완성이 된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로 들어가지만, 그는 그 자리에도 부재하다. 마치 거대한 대리석에 남아있는 구멍들처럼. 수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부재하지만 동시에 구멍이 되어, 바깥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처럼. 미국인의 아버지도 그렇게 구멍이 된다. 라즐로의 계획대로 가장 맨 꼭대기에서는 십자가 모양의 구멍을 통해 제단에 십자가 모양의 햇빛이 들어온다.



에필로그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종, 브루탈리즘 양식의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가 완성됨으로써 모던은 종결되며 포스트모던이 시작된다. 20년이 지난 후 1980년 제1회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에서 라즐로는 자신의 작품을 모아놓은 회고전에 등장한다. 그는 이제 휠체어를 탄 채로, 말을 잃은 듯하다. 근대에서 상실된 것은 완전히 애도되지 못했다. 그러나 조피아가 등장해 라즐로 대신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장면은, 조피아가 능동적으로 등장해 건축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앞서 라즐로와 해리슨의 대화 씬에서 언급되었듯이 영화가 건축을 소재로 채택한 것에 대해 정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라즐로가 아닌 조피아에 의해 발화된다. 라즐로에게도 목적지가 더 중요했던 것인가? 현대에서 목적지로 도착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조피아에게, 라즐로가 겪어온 과정은 중요치 않은 것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 목적지는 라즐로가 회복하고 재건하고자 했던 것이 맞는가?


근대에서 상실된 수많은 질문들이 영화의 끝자락에 따라 붙는다. 그러나 라즐로는 직접 마이크 앞에 올라가 서지도, 입을 열지도 못한다. 다만 그는 그 자리에 직접 참석함으로써, 애써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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