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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 '옳음'에 대한 확신과 반쯤 열린 문

by joyakd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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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감금된 상태에서의 추기경들의 투표를 콘클라베라 칭하고 영화는 이 명칭을 제목으로 사용한다. <콘클라베>는 일종의 정치물로 교황이 되기 위한 추기경 파벌들의 다툼을 그려낸다. 아마도 이 소재가 흥미롭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무제한적으로 투표를 진행하는, 콘클라베의 단절성 때문일 것이다. <콘클라베>의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영화를 통해 충족하고자 하는 관객의 가장 큰 욕망, 관음증에 매우 적합한 것이다. 관객들은 그 안에서도 은밀히 진행되는 정치적 작업을 엿보게 된다.


영화의 주인공 토마스 로렌스는 추기경단장으로서, 콘클라베가 시작하기 전 추기경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된다. 전날밤 여럿 추기경들의 야심을 목격한 그는 '나는 관리직일 뿐'이라는 주문을 되뇌이며 설교를 준비한다. 당일 그의 설교는 정석적이며 뻔한 말들을 늘어놓게 되는데, 이때 카메라는 그를 멀리서 찍거나 느린 트래킹 샷으로 촬영하면서 그가 내뱉는 말들의 가벼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다 뻔한 말들이죠?'라며 설교를 끊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카메라는 이제 그를 프레임 중앙에 크게 두고 있고, 토마스는 이 시대에서 다름을 추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교황이 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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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토마스가 자신을 '관리직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의심하고 정화하고자 하는 것에는, 정말로 그가 교황이라는 자리에 욕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로 '관리직'으로서의 자신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그러나 관리직으로서의 역할을 배제했을 때 그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가 될, 다른 역할이 중요하다. 탐정으로서의 역할이 그것인데, 토마스는 콘클라베가 시작하기 전 다른 추기경들과 지금의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부정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 이러한 모습은 토마스가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질문은 스스로에게조차 파격적인 형태가 되기도 하는데, 신앙과 기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고백하는 초반의 모습 또한 그러한 질문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가, 시스티나 성당 안에서는 처음부터 토마스를 비롯한 기존 교황의 측근들의 입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물론 그들의 입에 의해) 정의롭고 훌륭한 인물이었던 전임 교황의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사명 아래 벨리니 추기경을 교황으로 추대하고자 한다. 벨리니는 처음에는 얼핏 보았을 때 무결한 인물로서, 토마스 역시 벨리니가 교황이 되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가 교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벨리니도 누누이 자신은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보수적인 추기경 테데스코를 저지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벨리니는 선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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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에서 영화는 주요한 질문을 남김과 동시에 토마스의 흔들리는 눈빛을 담아냄으로써 그 문제의 어려움을 강조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교황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문자 그대로는 매우 단순하며 평면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벨리니를 지지하는 영미권 추기경들의 답이 곧 질문이 된다. '너희보다는 우리가 더 가까운 것'.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옳음'으로 규정하며 '옳음'의 외부에 있는 이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이는 곧 토마스가 설교에서 이야기한, '다름'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대치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결국 토마스의 설교가 벨리니 파벌에는 내심 불편하게 들렸을 것임이 자명해진다. 벨리니의 입장에서 '다름'은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이 아닌 '다른' 추기경이 이야기하면 안 되는 역설적 모순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토마스가 벨리니를 지지하기 위한 이상적 가치를 언급함으로써 오히려 벨리니의 표가 토마스에게 가게 된 것도 불편한 대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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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벨리니는 토마스와 마찰을 빚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벨리니는 토마스가 교황이 되고 싶은 욕심에 의해 행동한다면서, '모든 추기경은 교황이 되고 싶어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는 곧 벨리니 자신이 교황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대화는 영화에서 두 가지 기능을 하게 된다. 먼저 벨리니의 후보로서의 자격을 박탈한다. 교황이 될 생각이 없기 때문에 교황의 자격을 가지고 있던 그는, 노골적으로 교황이 되고 싶다고 발화함으로써 이 이후부터 유력한 후보에서 내려오게 된다. 또한 토마스에게는, 그가 계속해서 찾고자 하는 '옳음'에 스스로를 올려두게 함으로써 자신이 교황이 될 수 있는지, 교황이 되고 싶은지 의문하게 한다. 이 질문은 관객이 그와 함께 가지고 가는 질문이다.


의문과 함께, 우선은 '옳지 않음'을 무력화하는 작업이 반복된다. 유력 후보로 올라서고 있던 아프리카 추기경 아데예미와, 전임 교황에 대립하며 부패를 일삼은 추기경 트랑블레가 차례대로 낙마한다. 다만 이들이 '다름'의 영역이 아니라 '옳지 않음'의 문제에 있는 것은 사실이라는 점은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의 부정이 밝혀지는 과정에 대한 언급 또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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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예미는 30살이던 신부 시절 19살의 소녀와 관계를 맺어 혼외자를 낳은 사실이 있다. 이는 당시의 소녀, 지금은 자라서 수녀가 된 여성이 시스티나 성당에 오게 되어 아데예미와 갈등을 빚게 되면서 밝혀진다. 그리고 그 수녀를 로마로 오게 한 것이, 아데예미를 제치고 교황이 되고자 했던 트랑블레의 음모였다는 사실이 곧이어 드러난다. 두 번의사건에서 콘클라베를 이끄는 토마스는 다르게 행동한다. 먼저 아데예미의 경우, 토마스는 수녀의 고해성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폭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데예미가 수녀와 갈등하는 과정이 대외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는 표를 잃게 된다. 반면 트랑블레의 부정은 토마스에 의해 폭로된다. 트랑블레는 아데예미의 건과 별개로 성직을 매매하는 등의 부정을 일삼고, 이 사실을 지적하며 추기경 지위를 해임한 교황과 대립했다. (흥미로운 것은 교황이 트랑블레와의 면담 이후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영화는 극적 서사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의심의 서스펜스를 강화한다.) 토마스, 그리고 폭로에 일조한 아녜스 수녀는 전임 교황의 측근으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그들은 트랑블레의 '옳지 않음'을 폭로하는 데 있어 '옳음'이 무엇인지, 자신들의 폭로를 통해 그것은 실현될 수 있는지, (토마스에게는) 다시 말해 이 폭로를 통해 자신이 교황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의심은 트랑블레의 건을 폭로한 이후에 더욱 강해진다. 이후 재개되는 투표에서, 토마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낸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을 것이다. 실제로 토마스 자신이 가장 교황의 지위에 적절한 사람일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토마스가 투표함 앞에 가서 하느님께 맹세를 하자마자, 외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성당은 테러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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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는 극중에서 이슬람 강경파 세력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언급된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 성당, 그것도 교황을 선출하는 중인 성당에 대한 공격을 마치 토마스를 심판하기 위한 하늘의 뜻으로 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일 것이다. 이후 영화의 태도를 보았을 때, 이 장면은 하늘보다는 땅의 뜻이다. (뜻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다만 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이렇게 적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즉 콘클라베가 벌어지는 시스티나 성당 외부의 열린 세계는 '옳음'을 향해 확신을 가지고 달려가는 추기경들과 토마스에게 세계의 존재를 알린다. 극중의 테러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반인륜적이며 폭력적인 행위임은 당연하다. 그러니 그 테러가, 콘클라베에서 벗어나 귀를 기울여야 할 또다른 '옳음'이 되지는 못한다. 이는 곧 세계에 존재하는, 다름에 대한 폭력이다. 절대적으로 '옳음'을 추구하는 것은 또다른 '옳음'을 공유하는 세계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후 강당에서 진행된 추기경 회의에서 이야기된다. 보수적인 테데스코 추기경은 새로운 종교전쟁을 이야기하며, 이슬람의 테러에 자신들도 폭력으로 응수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베니테스가 등장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추기경으로, 교황이 비밀리에 임명했기 때문에 이번 콘클라베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토마스의 설교 이후 계속해서 그를 지지했던 베니테스는 전쟁이 무엇인지 아냐고 질문하며 다름과 평화에 대해 설교한다. 이 순간 카메라는 강당 측면에서 추기경들을 풀샷으로 촬영하는데 프레임 왼쪽에 강당 앞의 낮은 곳에 토마스가 있고, 프레임 오른쪽 계단식 객석 가장 높은 곳에 베니테스가 있다. 인물 블로킹을 통해 베니테스의 지도자로서의 지위 획득이 강조된다. 토마스는 무엇보다 올바른 가치를 지향했지만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되며 베니테스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이상적인 인물이 된다. 다음 샷에서 카메라는 조금 더 대담하게 토마스의 뒤로 가서 토마스의 뒷모습을 걸고 그 위에 베니테스가 보이게끔 위치한다. 이는 베니테스가 이야기하는 지향점이 곧 토마스가 섬기는 하느님과 예수의 가치라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영화가 종교가 아닌,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 역시 여기서 강조된다. (극중 전임교황은 하느님이 아닌, 교회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의심했다고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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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가 수습되고 투표는 재개된다. 추기경들은 일제히 투표지에 이름을 적다 말고 폭발로 인해 뚫리게 된, 높은 곳의 유리창이 있던 곳을 바라본다. 외부의 세계, 실재하는 세계를 인식하고 베니테스의 이야기에 동화되어 그를 교황으로 추대하는 추기경들에게서는 교회의 희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베니테스가 교황이 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나지 않는다. 이 서사에는 관문이 하나 더 남아있다. 극중 토마스에게 계속해서 외부의 정보들을 전달하던 만도르프 대주교는 베니테스의 과거를 의심하며, 흰 연기를 굴뚝으로 내보내 새로운 교황 선출을 알리는 것을 미룬다. 만도르프는 베니테스의 병원 방문에서 발견한 이상한 점을 토마스에게 알리고, 토마스는 베니테스를 찾아가 묻는다.


영화의 결말 앞에서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일 반전, 베니테스가 인터섹스임이 밝혀진다. 또한 베니테스는 하느님이 준 것을 훼손시킬 수 없다는 뜻으로 수술을 받지 않았다. 토마스는 마지막 관문에서 헤매인다. 베니테스가 교황이 되어도 되는가? 자신이 지금껏 믿어온 '옳음'을 포기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옳음'은 존재하긴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아마도 현실적인 문제들이 따라붙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베니테스를 지지하더라도 그가 인터섹스임이 밝혀지면 따라오게 될 세계의 목소리들. 교회에 대한 비판 따위 등등. 전임 교황이 베니테스의 비밀을 알고 있던 것도 그에게 혼란을 부여한다. 자신이 따랐던 전임 교황의 명예가 훼손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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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자신의 결정을 유보한다. 그는 이 문제를 세계로 내보낸다. 흰 연기를 내보냄으로써 교황 선출을 알리는 것은 그를 교황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배출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답을 내리지 못한 문제를 세계로 내보내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는 이후 성당 내에서 전임 교황이 키우던 거북이를 발견하고, 거북이가 원래 살던 물가에 돌려둔다. 이는 작품이 탐정물과 정치물의 장르를 내세움과 동시에 진행한, 일종의 철학적 실험 연구의 결론을 쓰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역을 벗어난 거북이를 원래 그가 살던 곳으로 돌려놓는 것은 '옳음'에 해당하는 일인가? 토마스가 거북이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면, 카메라는 철장 형태의 문 밖에서 그를 촬영한다. 양문으로 된 이 문은, 한쪽은 적당히 열려있고 한쪽은 닫혀 있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토마스와 교회의 '다름'을 향한 태도를 시각화한다. 열려 있지만 동시에 닫혀있는, 반쯤 열린 문 안의 추기경을 촬영하는 이 쇼트를 통해 감독은 지금 우리 사회가 위치해 있는 현실을 놀랍도록 탁월하게 묘사한다.


영화의 마지막 씬, 토마스는 방에서 폐쇄되었던 창문이 열리는 순간을 맞이한다. 외부로부터 단절되었던 그가 세계로 고개를 돌리자 처음 마주하는 것은 웃으며 성당으로 나가는 세 명의 수녀다. 영화는 이러한 결말을 통해 결국에는 카톨릭 이데올로기 안에 갇히어 그 안에서의 옳음을 찾고자 노력한 일련의 과정을 비웃으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개방된 세계로 나가며 해방을 얻는 여성들을 보여주며 토마스가 얻게 될 '다름'에 대한 시각을 보여준다. 100명을 넘는 추기경들이 처음 성당에 모일 때 느껴졌던,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여기에서 모습을 밝힌다. 카톨릭의 지도자는 남성이어야만 하는, 여성에게는 수녀의 역할만이 부여되는 시스템 안에서 종교적 자유주의나 다름에 대한 이야기 따위는 모두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가벼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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