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자기를 향한 눈길
6회 차 세계철학사 톺아보기
by 조이캄JoyCalm Mar 24. 2024
자기에 대한 물음은 언제 시작되었나?
'나 자신은 무엇인가', '나는 본래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가질 때면 머릿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순환하던 어떤 회로들이 일시에 멈추는 느낌이 든다. 브레이크가 걸린 자동차처럼 그냥 그 자리에서 멈추는 느낌이다. 생각에 진전이 없다. 막막하다. 그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러한 막막함을 주시하고 있는 의식상태뿐이다. 사고작용이 끊어진 자리에서 인식되는 존재적 상태에 나에 대한 물음을 놓아두곤 한다.
'나는 본래 무엇인가' 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눈길이 시작된 시기는 언제인가? '나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물음은 기원전 6~5 시기에 시작되었다. 기원전 6~5세기 경의 시기에 오늘날 '원류 사상'이라 불리는 지적인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는데,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에 실용적으로 대응해 가는 것을 넘어, 세계 그 자체의 근원을 탐구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원류 사상에는 세계의 근원을 묻는 것뿐만 아니라, 묻는 주체자, 그 자신에 대한 존재방식에 대한 탐구가 들어있다.
기원전 500년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대에,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철학, 자이나교와 불교가 태아 났고,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를 비롯한 제자백가 시대를 맞았다.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팔레스테인에서는 유대교의 예언자들이,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로부터 철학자와 과학자들까지 활약했다. 이 시기를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는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축의 시대'라고 명명하며, 인류역사에서 자신에 대한 탐구가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단다. 축의 시대를 생각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눈길을 돌리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의 시작'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탐구적 물음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잠언으로 넘어가 보자. '너 자신을 알라'는 밖으로 향한 눈길을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라는 소크라테스의 알림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자기 탐구적 질문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소크라테스(기원전 469년경~기원전 399)는 축의 시대 철학자로서 석공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친구들의 신세를 지면서도 상층 시민으로서 먹고살기에는 어렵지 않은 생활을 했단다. 보병으로 세 번의 국외 출정이 있었고, 평의회 의원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있는 공공 광장 '아고라'에서 오로지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화를 펼치며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를 실천했다.
아고라에서 한 사람 한 사람과의 평등한 대화는 그에게 '지자(知者 아는 자)'라는 평판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친구 카이레폰은 신 아폴론으로부터 '소크라테스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신탁을 받는다. 신탁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서 소크라테스는 최고의 지자知者가 되지만, 그는 자신이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자知者가 아님을 스스로 자각했기에 그가 신뢰하는 신으로부터 지자라고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자기의 정체성에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지자인가 지자가 아닌가?' 소크라테스가 던지는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유와 평등의 광장, 아고라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크라테스는 '좋음'이라는 생각이 낳은 행위에서 자기에 대한 탐구하기를 요청한다. '좋음, 아름다움, 정의'와 같은 것은 한 사람의 인생관과 윤리관을 포함하기에, '좋음, 아름다움, 정의'에 대한 물음을 받는 자는 자신의 인생과 자기의 '혼'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한다. 특히 '좋음'에 대한 생각은 한 사람의 행위와 그의 삶과 관련이 되기에, '좋은 행위'란 자신의 인생을 좋게 하는, 즉 행복하게 하는 행위와 관련이 된다. 따라서 각각의 개별적인 '좋다'는 생각은 '자신이 누구인가'와 같은 자기 이해와 '자신의 행복은 무엇인가'와 같은 행복관과도 결부된다. 자신의 행복과 연결되기에 우리는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숨 막혀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구나 불행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공리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알고 싶어 하고 행복관의 올바름을 판정하기 위해 참된 지혜를 추구한다. 따라서 행복해지고 싶으므로 알고 싶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소망이 된다. 행복하고 싶기에 나를 알고 싶고, 나 자신을 알고 싶기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이해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좋음 싫음이라는 마음의 반응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본래 무엇인가'라는 커다란 물음으로 들어가는 위대한 문이 된다.
'자신은 누구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행위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고 행위를 둘러싼 현 상황뿐 아니라 인생 전체를 응시하도록 한다. 이러한 자기 탐구적 물음은 어떠한 인생을 소망하고 어떠한 미래를 원하는지 전망하게 한다. 미래에 대한 내다봄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것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혼의 모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과거를 돌아보는 숙고로 이어지게 한다. 즉 자기 탐구에 대한 물음은 지금의 혼이 형성되기까지 자신의 내력을 반성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이 세계의 상식이나 통념에 물들어 있는지 알게 되고, 세계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혼을 조형해 온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모습이 지나온 삶의 시간에서 내가 속한 세계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서로에 대한 의견이나 대립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그때야말로 서로에 대한 보편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무지를 자각하고 참된 지혜를 지향할 수 있는 지점이 된다. 즉 의견 대립이나 충돌을 자신의 좁은 견해와 사고방식을 확장하는 계기로 삼아 대화 속에서 자기와 타자를 좀 더 좋은 모습으로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 기원전 500년 전에 시작된 나에 대한 물음, '나는 누구인가', '나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라는 자기 탐구는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조망하며 다시 현재의 삶에서 "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앎을 소망하며 나와 타자를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위대한 문을 여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본래 무엇인가?"
"나의 행복은 무엇인가?"
오늘의 배움을 정리하자면, 갈등과 대립, 충돌을 두려워하기 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 좋은가, 나의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숙고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나 대립, 충돌이 '완전한 앎으로 향하는 길'이 됨을 기억해야겠다. 이것이 '앎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길인 것을.
<JoyCalm조이캄 깨알드림>
<참고, 체계철학사 1, 고대 I, 지혜에서 사랑으로, 이토 구니타케 외, 이신철 역, 도서출판 b>
아래는 오늘의 참고 문헌에서 길어 올린 문장들이다. 오늘은 문장이 많다.
묻는 주체 자신의 지적인 존재 방식을 묻은 것 199쪽 공자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을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논어, 위정 편)라는 말은 대상에 대한 앎과 모름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변별할 수 있는 자기에 대한 앎을 주제화한다. 고대 인도, 고타마 싯타 트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무명) 까닭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 알지 못함을 알아차리고 연기의 법을 올바르게 앎으로써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설파했다. 세계에 관한 알지 못함을 극복하는 계기로서 자기에 대한 눈길을 중요시하는 가르침이다. 200쪽
지적 활동의 원류에서 인간이 세계화 혼,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가? 아테나이의 민주정과 대치하는 소크라테스에서 철학에 다가가 보자 201쪽. 소크라테스에게 세계는 지식의 객관적 대상으로서 마주하는 측에 놓여 관찰, 분석되는 자연이 아니라 거기서 타자와 함께 살며 자신들의 행복을 실현해 가는 생활 공동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연 세게에서 벗어나 철저히 폴리스라는 인간 세계와 함께 자신의 혼을 탐구했다고 할 수 있다. 202
그리스어에는 '의견, 생각, 평판'을 한 단어로 나타내는 말, 독사 doxa'가 있다. 영어의 오소독스나 패러독스 어원의 일부이다. 203
지자가 아니라고 자각하는 그가 신뢰하는 신으로부터 지자라고 인정된다. '나는 누구인가? 지자인가 지자가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경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결코 인간에게 갖추어진 나이, 국적, 경제 상태 등을 문제로 하지 않는다. 자유와 평등의 세계 아고라에서의 대화는 그런 한 속성을 모두 무효화한다. 오히려 여러 속성이 갖춰진 자기 자신, 즉 혼에서 '나란 본래 누구인가'가 지혜를 둘러싸고서 물어지고 있다. 혼의 동일성을 보장하고 '내가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지혜란 무엇인가? 209쪽 (보편적 인간성과 연결됨)
소크라테스는 좋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앎, 요컨대 참된 의미에서의 '지혜'를 신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하는 한편, 지자가 아니라는 자기 이해를 '인간적인 지혜'라고 부른다. 211쪽
'좋음'이라는 생각에 대한 음미
사람이 모든 행위를 자신에게 '좋다'라고 생각하는 한, 좋음의 생각은 확실히 행위들이 구성하는 인생 전체에 널리 침투한다. 실제로 '좋은' 행위란 다름 아닌 자신의 인생을 좋게 하는 , 즉 행복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각각의 개별적인 '좋다'는 생각은 '자신은 누구인가'와 같은 자기 이해나 '자기의 행복은 무엇인가'와 같은 행복관과 밀접하게 결부된다. 따라서 자기나 행복에 대해 오해하고 살아간다면, 많은 경우 개개의 행위를 선택하는 데서 잘못을 범하고 자신에게 '나쁜'행위를 행하여 불행해질 것이다. 215쪽 (본능적으로 작용하는 내적인 쾌/불쾌의 반응과 '좋음''나쁨;이라는 생각, 여기에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복은 무엇인가에 대한 숙고의 포인트가 숨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
극악한 사람들조차 자신의 행복을 바란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철학적 대화의 확고한 기반을 이룬다. 사람은 누구나 불행해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모습을 잘못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각각의 행위의 좋음과 자신의 행복관의 올바름을 판정하는 참된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할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으므로 알고 싶다'라는 것은 소망의 자연스러운 연쇄이다. 2015쪽 자기의 본연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영혼을 만들어내는 '좋다'는 생각의 네트워크, 요컨대 신념(독사 doxa) 체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지만, '좋음;을 둘러싼 그 해명을 위해서는 선이란 본래 무엇인가를 아는 참된 지혜를 참조할 것이 요구된다. 자기 탐구로서의 철학이 참된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활동인 까닭이다. 철학은 혼의 개별성과 참된 지혜의 보편성 사이를 오가는 왕복운동으로서 특징지어진다. 215-6쪽
철학은 개별과 보편의 왕복운동, 철학은 나를 창조해 가는 것 , 혼을 배려하라.
철학은 혼의 현 상태를 음미하고 부정할 뿐만 아니라 혼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도 도전한다. 철학은 인간임을 자각시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개인, 요컨대, '이 나'를 창조하는 것이다. 자기 탐구는 혼으로서의 '이 나'가 보편과 서로 접하는 배움 속에서 잘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216쪽
지자가 아니라고 의식하는 사람은 사려 깊게 지금 여기에서의 행위를 자신은 누구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선택한다. 그런 까닭에 사려 있는 사람은 행위를 둘러싼 현 상황뿐 아니라 인생 전체를 응시하며, 자신이 어떠한 인생을 소망하고 있는지 미래를 전망하면서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현재의 혼의 모습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과거를 돌아보며 숙고한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공과 사의 두 세계를 지배하는 파이데이아(문화, 교육)가 어떻게 자신의 혼을 형성했는지 자신의 내력을 반성하는 작업이 된다. 그때 사려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세계의 독사(상식, 통념)에 물들어 있는지 깨닫고, 문화의 담지자를 필두로 한 온 세계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혼을 조형해 온 현실에 어지러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219쪽.
사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독사 doxa를 분석하는 철학의 도움을 받는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파이데이아(교육, 교양, 문화)는 개인을 개인으로서 마음 쓰고, 혼의 실질인 신념 체계 내의 모순과 대립을 지적한다. 어떤 장면에서 독사(doxa, 의견, 생각, 판단, 상식, 통념)를 배웠는지 상기하고 그 한계를 확실히 의식하여 왜 다른 장면에 적용할 수 없는지, 적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좋음을 둘러싼 참된 지혜를 참조하면서 신중하게 고려한다면, 새로운 배움이 생겨나고 적용 범위도 확대될 것이다. 219쪽
사려는 개인에게서 머물지 않고 타인에게로 나아간다. 사려는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타자와의 의견 대립이나 충돌이야말로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를 제대로 자신의 말로써 서로를 설명하기만 한다면 개별 상황과 보편적 기준을 넘나는 철학적 사려가 발동하여 상호 간의 좀 더 깊은 현상 파악과 보편의 이해에 이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20쪽 (타자에 대한 호기심, 개별과 보편의 확장)
이견 대립이나 충돌의 기회를 사회에서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의견에 동조 내지 순응하지 않고서 자신의 좁은 견해와 사고방식을 확장하는 계기로 삼아 대화 속에서 자기와 타자를 좀 더 좋은 모습으로 창조해 나가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메시지에 대한 응답이 될 것이다. 인간적인 지혜를 지니고서 사려 깊게 문답법을 구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덕을 발휘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거는 '덕은 앎이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지덕합일의 이상이다. 221쪽
철학 카페에서는 참가 자격을 묻지 않고, 인생이나 세계의 중요한 것을 둘러싸고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 즐기는 것을 규칙으로 하여 대화를 나눈다. 서로 다른 의견의 존중, 다양성의 존중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철학의 가능성을 믿는 한에서 결코 상대주의에 빠질 일은 없다. 왜냐하면 참가자에게 의견의 대립이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야말로 보편을 배울 기회이고 각자는 무지를 자각하고서 참된 지혜를 지향하는 동시에 참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222쪽
<숙고 주제>
-존재방식의 시작, 너 자신을 알라,
-좋음에 대한 알아차림,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있음
-타인과의 충돌/갈등은 좁은 견해와 사고방식을 확장하는 계기
-나는 본래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타자와의 상호 배움으로 이어져
-진리에 대한 배려와 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