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애씀을 사랑하는 것

3번째, 세계철학사 1권, 6장. 고대 그리스의 시에서 철학으로

by 조이캄JoyCalm


철학, 애씀을 사랑하는 것.


지금까지 내게 '철학'이라는 말은 모호하고 무겁고 멀게만 느껴진 단어였다. 그런데 오늘 세계철학사 3번째 공부시간을 맞이하면서 모호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났다.

*

'철학'이라는 말은 서구의 말 '필로소피아'에서 온 것인데, 최초 번역은 일본 철학자 아마네가 '희철학希哲學'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희希'라 필로소피아의 '필로'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랑하다'를 의미한다. 우리말로 '희철학'을 번역하면 '밝음:진리를 사랑하는 배움'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그가 <백학연환>이라는 그의 책애서 '희希'자를 빼고 '철학'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철학이라는 말이 한자어 문화권에서 쓰이게 되었고, '희希'가 빠짐으로써 철학에서의 '사랑함'이라는 주요한 요소를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기원전 572년에 태어난 피타고라스(기원전 572년 ~ 494년)라고 한다. 피타고라스는 혼이 완성된 사람을 지자(知者)라고 표현하면서, 진정으로 지자知者인 것은 신뿐이며, 인간은 그 참된 지자가 될 수 없고, 다만 지혜를 동경하고 환영하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라도 가능하기에, 인간은 지자知者가 될 수 없지만, 지자를 지향하여 살아가는 인간은 '앎을 바라는 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앎을 바라는 자, 앎을 사랑하는 자'를 이름하여 '철학자, 필로소피아'라고 명명하였단다. 철학(필로소피아)은 신이 가지는 완전한 지혜의 모습과 인간이 지니는 불완전한 지혜의 존재 방식과의 대비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다.


이처럼 철학(필로소피아)이라는 말에는 신에 대한 선망과 완전한 앎을 향한 인간의 겸허함이 담겨있는 표현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완전한 지혜를 갖춘 존재는 아니지만, 그 완전함을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말이다. '철학, 필로소피아'라는 어원에서 불완전함과 무지함을 자각하되 그것에 머물지 않고 완전함과 앎의 상태로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 인간임을 생각하게 된다.


'철학'이라는 말에 '인간이 스스로 자신에 대한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완전함을 향한 갈구함'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인식하고 나자, 어떤 한계를 넘고자 하는 나 자신의 애씀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게 된다. '더 나음'을 향한 몸부림은 고통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열망이다. 현재의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그 너머룰 꿈꾸는 존재가 인간임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지금의 문제가 곧 기회가 되는 엣지 포인트(edge point)가 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가는 산의 능선자락(edge)을 걷는 행위인 듯 하다.


'철학' 이라는 말에서 변화와 성장을 갈구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이 가진 숭고한 모습의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명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이동을 꿈꾸는 열망이 있다. 오늘 철학(필로소피아)이라는 용어를 숙고하면서, 그 열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애씀은 고통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았다. '애씀'이 일어날 때 '애쓰지 말자'로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애씀조차도 사랑하자' 말하며 생명이 있는 나 자신의 열망을 받아들인다. '애씀을 사랑하자' 이것이야 말로 애쓰는 뻑뻑한 마음을 놓아버리는 지혜이겠다.


- 조이캄의 깨알드림-

*

*

다음은 원문 글이다. 세계철학사 1권, <6장 고대 그리스의 시에서 철학:마쓰우라 가즈야>으로 에서 길어 올린 오늘의 문장들이다.



철학(哲學)이라는 한자어는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일본인 니시 아마네(1829-1897)에 의해 '필로소피아'가 '희철학(希哲學)'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그의 <백학연환>(1870년)에서부터 앞의 '희希 바라다'가 사라져 '철학'이라는 말이 되고, 그 번역이 중국어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도 전해져 오늘날에 사용되고 있다. 170쪽.



'필로소피아'라는 말 : '철학'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 philosophia는 '사랑한다, 호의를 가진다'를 의미하는 동사 필레오'기예의 교묘함', 나아가 '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의 합성어이며, 현대의 우리말로 옮기게 되면 '앎을 사랑하기'나 '애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70쪽




철학(필로소피아)이라는 말에는 앎에 관해 완전한 상태우리 인간의 현 상태 사이의 거리를 자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전한 상태로 다가가고자 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겸허함과 선망이 담겨있다. 172쪽

애초에 철학(필로소피아)신이 가지는 완전한 지혜의 모습인간이 지니는 완전한 지혜의 존재 방식과의 대비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다. 187쪽


시는 확실히 그리스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기반이다. 그러나 이 시들은 <베다> 혹은 <성서>와는 달리 '성전'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시가 말하는 세계와 자신의 견해의 어긋남을 문제시한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것에 대한 근거로서 호메로스의 말을 사용하는 것은 있어도 호메로스의 말을 절대시 하려고 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의거하는 권위의 부재는 수학에서 공리나 정리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고찰의 출발점이 되는 공통의 토대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토대의 부재가 초기 그리스 철학의 다양성을 낳았을 것이다. 요컨대 고찰의 출발점이 되는 원리의 탐구가 이러한 조건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의 탐구 성과는 여전히 권위가 되지 못하고, 그 성과 자체가 더 나아간 검증의 대상이 되었다. 191쪽

파르메니데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추성적인 논의를 전개했다는 것보다는 시가 말하는 내용이나 선행하는 견해들을 무비판적으로 권위로서 다루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검증하고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하는, 그들의 사유에 대한 태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912쪽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진리를 말하는 권위로서 시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에 대한 유연하고 비판적인 태도가 이 시대에 철학을 낳기 위한 조건의 하나였던 것이다. 권위의 부재 속에서 수학적 사유를 하나의 발판으로 하는 가운데 기반이 되는 토대를 모색하는 활동으로서 앎을 희구하는 활동으로 묘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철학관에 기초하여 도출된 견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93쪽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이 진리를 말하는 권위로서 시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에 대한 유연하고 비판적인 태도이 시대에 철학을 낳기 위한 조건의 하나였던 것이다.


*

참여자의 한 말씀, 박의섭 시인 :질문은 비어있는 공간으로의 이동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세 칸 글쓰기' 실패와 마음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