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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 Park Mar 24. 2019

파워는 모두 공간화된다

영화 더 페이버릿

파워에는 늘 '공간화'하는 힘이 있다. 이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난 고딕 건축이라 생각한다. 하늘을 닿으려고 올라가는 첨탑들이 인상적이나 그 첨탑들을 올리기위해 그 하중을 견디는 지지구조가 얼마나 치밀해야 하는지 그런 생각을 한다.

영화 <더 페이버릿>은 여왕과 여왕의 총애를 통해 권력을 누리려는 여성들이 벌이는 권력 게임이고, 남자 감독이 만들었다. 물론 화려한 미장센이나 아래에서 위로 카메라를 올려찍어서 궁전 내 공간감을 극대화는 '공간성'을 통한 권력을 보여주기 기제도 훌륭하다만, 각 주인공들의 동선을 설정하는 방법 역시 권력의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애비게일은 그래서 주로 수직으로 움직인다. 마차에서 내리며 진흙탕으로 수직 낙하를 하고, 하녀들의 주방에서 궁전 위층으로 자주 올라가고, 서재에서도 올라가 있거나 내려오는 행동들을 한다. 바닥에 패대기쳐졌던 삶을 통해 모든 삶의 프레임이 내려가고 올라가기로 점철되는 여자이다.  

사라는 주로 수평으로 움직인다. 여왕의 침실로 이어지는 비밀의 뒷통로를 통해 수평으로, 거실 복도를 수평으로, 욕조 속에 수평으로, 말에서 끌려서도 멀리 끌려가 이동한다. 심지어 퇴출될 때조차 외국으로 수평으로 다가와 수평으로 밀려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여왕 침실의 뒷문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이 수평적인 채널을 애비게일은 결코 얻지 못한다. 애비게일은 마지막에 여왕이 확인시켜주지만 수직 관계의 아래이다 - 여왕 발 아래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존쟁리다.


여왕은 열고 닫는 이이다. 토끼 우리에 잃어버린 자식들을 상징하는 자기 마음을 넣어두고 잠그어 놓거나 열어서 풀어놓거나 한다. 자기 침실로 들어오는 뒷문을 열거나 잠그고 열쇠를 주거나 뺏거나 한다. 사라는 침실 뒷문을 열어주어 만나고 그 열쇠를 뻇어 내쫓는다. 애비게일은 토끼우리의 문을 열어서 만나고 토끼를 압제해 구속하면 이에 반응하여 토끼가 뛰노는 마음의 써클 밖으로 상대를 내쫓는다. 공간의 주체자라서 열고 닫는 행위가 곧 권력이 된다.

마음이 공간화 된 이는 슬프다. 공간은 채울 수도 있으나 늘 텅 빌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마음은 이렇듯 공간화되기 때문에, 그 비어있음을 처절하게 대가로 치르는 것 같다. 공간을 마음껏 확장할 수 있다만, 그러면 뭐하나. 그 공간은 무엇을, 누구를 가져다둔들 다 채울 수가 없는걸. 가장 소중한 애정조차도 우리 속에 가두어둔 토끼로 전락해버린 걸. 그 확장된 으리으리한 공간 속에서 휠체어를 탄 불구에 부어오르는 발로 고통에 비명질러야 하는 걸. 내가 이 공간들을 비명으로 채우기 위해 이리 확장했던가...이런 질문으로 괴로울 때에, 가장 소중한 애정을 상징하는 토끼의 비명이 들려오면 그건 정말로 더 참을 수 없어질테니 말이다.


한편 공간화되는 것들은 슬프다. 관계가 공간화되는 게 가장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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