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한낮에 대학가를 지나다 수시 면접을 마치고 내려오는 수험생들을 본 적 있다.
경사진 대학가의 비탈길은 내려오는 검은색의 물결, 한 무리의 펭귄 떼 같았다.
검정 롱 패딩으로 감싼 그들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있으면 아까 본 사람과 같은 사람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다. 헐렁한 통바지에 숏 재킷을 입은 사람이 내 뒤에 앉아 있는데 옆 데이블에 다시 와서 앉는다.
대학생만 그런 것은 아니다. 볼일이 있어 평일 낮에 퇴직한 중년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 마트에 갔다가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나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여유롭게 쇼핑을 하는 여성들이 대부분 베이지를 기본으로 한 톤 온 톤 배색에 몸에 붙지 않는 여유 있는 디자인을 입고 있었다. 우아한 옷 입기 공식을 따르는 중년 펭귄들이다.
많은 멋쟁이 언니들이 유튜브에서 옷 입기 노하우를 안내한다. 나이에 맞는 옷차림은 물론 시크해 보이도록 소매 접는 세세한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디자이너들을 해마다 조금씩 다른 유행을 선도해내고 보여준다. 그것을 제일 먼저 받아들이고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우리는 ‘패피’라 부르며 따라 한다. 인터넷에는 패피가 되는 법칙뿐만 아니라 ‘행운을 불러오는 5가지 습관’, ‘피부가 좋아지는 방법’ 등 정보들이 넘쳐난다. 알아두면 좋을 것 같은 정보를 클릭하면 알고리즘을 타고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정보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흥미 있는 일들도 너무 많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집에 무슨 물건을 가지고 사는지, 무엇을 먹는지, 어디에 놀러 다니는지 알게 된다.
그러는 사이 스스로 생각할 시간도 없이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방식을 습득하게 된다. 어느 대학을 가고 몇 살에 취직을 하고 연봉은 얼마이고 몇 살에 결혼을 하고 언제쯤 애를 낳으면 좋은지 알게 된다. 나는 그렇게 못하지만 사회에서 정해놓은 방식대로 잘 따라 사는 사람을 우리는 ‘엄친아’라 부르며 부러워한다.
바람직한 옷 입기의 공식처럼 바람직한 삶의 공식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패션 공식이 서로 어긋날 때가 있다. 헐렁한 하의를 입으면 상의는 타이트하게 입어야 균형감이 있다고 말하지만 상, 하의 모두 헐렁하게 입으면 오히려 힙해 보인다. 한때는 유효했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새로운 공식이 생겨나기도 한다. 남자가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는 시대에 더 이상 옷 입기의 공식은 없다. 사회적인 TPO에 맞게, 나이에 맞게 입으라는 말은 낡은 틀일 뿐이다.
TPO의 기준은 사회가 아닌 내가 정한다. ‘나이에 맞게’가 아닌 ‘나에게 맞게’ 입는다. 알고 싶다는 의식을 가지기도 전에 알고리즘을 타고 나타난 동영상을 클릭하는 대신 내가 키워드를 검색해서 정보를 찾아낸다. 타인의 공식을 내 인생에 가져오는 대신 나의 상황에 맞고 내가 겪어서 체득한 내 방식으로 산다. 타인의 정답은 내 정답이 아니다. 배우고 싶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라도 학생이 될 수 있고, 결혼은 내가 하고 싶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출산은 선택사항이다.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은 내 선택이어야 한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욕망이 다르고 그것은 처한 상황과 상태에 따라 변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가졌다 해도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따라가야 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나 유행이 아니고 내 안에서 출발한 욕망의 지도이다.
세계적인 패션 스타일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에게 옷입기에 대한 조언을 구하면 곧바로 “멍청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2021년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스파브랜드 H&M과 글로벌 콜라보네이션을 기획하는 그녀는 케네디, 레이건, 클리턴 등 미국 대통령을 위해 백악관 인테리어 작업을 했던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당신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써서는 안되며,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알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옷입기에 대해 물었더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대답해 준다.
이래서 내가 옷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