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도 나처럼 흔들리는 불완전한 인간임을 받아들일 것

by now nina

몇 년 전에 올라온 인터넷 기사를 읽었다.

글쓴이는 걷는 모습이 특이할 뿐 일상생활에 별로 지장 없는 뇌성마비 여성 장애인이다.

여름이 오면 하늘하늘한 원피스나 치마를 입고 싶지만 망설이게 되는 이유에 대해 적고 있었다.

쇼핑을 하다 치마를 고르면 같이 간 지인으로부터 ‘그걸 입고 다니다가 넘어져서 속옷이라도 보이면 무슨 망신이냐?’는 말을 들어야 했고, 어쩌다 조금 화사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면 평소보다 두배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장애 여성에 대한 편견과 남들과 달라서 받아야 하는 시선의 폭력을 견디다 보니 이제 자유롭게 치마 한 벌 입기도 어려운 자신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내 마음을 자극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땐 치마를 많이 입었는데 사춘기가 되자 옷장에서 치마가 하나둘 사라지더니 이제는 여름 치마 하나 사는 것도 엄마의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엄마는 몸이 불편한 딸이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몸을 흔들며 걷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다. 움직이기 편해야 한다는 이유로 치마를 못입게 하신다고 했다.


기사와 오버랩되어 선명하게 기억되는 내 기억의 한 조각이 떠올랐다.

초봄의 햇살이 아른거리던 어느 날, 한창 멋 부리기에 열중하던 20대의 언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고 준비하더니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 좁은 거실에 앉아 TV를 보시던 아버지가 언니를 향해 말씀하셨다.

“너는 치마 입지 마라, 다리가 굵어서 개그우먼 같다.”

당시 유행하던 미니 청치마를 입고 있던 언니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말씀에 놀래서 다리를 움츠렸다.

언니는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을 한 후 몇 년이 지나 그때 이야기를 꺼내 놓았지만 아버지는 기억도 못하고 있었다.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사업에 실패하고 팍팍해지는 살림에 장녀의 결혼을 서두르기 위해 콧대 센 딸의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가 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이후 언니는 짧은 치마를 입지 않았다.

사실 언니 다리는 날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치마를 못 입을 정도로 굵지도 않았다.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하던 따르던 언니는 그렇게 자신의 다리를 아버지의 말씀대로 굵다고 단정해버렸다. 지금도 66 사이즈 자신의 몸을 뚱뚱하다고 말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어떤 존재일까?

영문도 모르고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는 세계이자 전부이다.

숙명이라는 말은 부모 자식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나의 생명이 비롯된 곳이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절대적 존재이다.

부모의 가치관에 나를 맞추고 동일화하며 나의 부모는 훌륭하다고 믿고 사랑하는 것은 세포에 각인된 생존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성인이 되면 부모 자식 관계는 달라져야 한다. 주고받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리가 필요하다. 부모 자식 간은 일촌이라고 한다.

1만큼의 떨어진 거리에서 보면 부모이기 이전에 불완전하고 고통받는 한 인간이 보인다.


장애 여성의 엄마는 세상의 시선들로부터 딸을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글에는 딸의 여성성을 억압하며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엄마의 욕망이 읽힌다.

딸보다 더 거리의 시선을 버거워하는 마음이 보인다.

부모이기 이전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만져진다.


우리의 아버지도 장애여성의 어머니도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항상 옳고 훌륭한 것은 아니다.

잘못된 판단을 하고 실수하고 때로는 흔들린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야 만다.

부모로부터 온 상처는 깊다.

우리는 그 상처를 오래 들여다보며 산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으며 그들도 우리처럼 나약하고 상처받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내가 받은 상처에 조금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연민할 수 있으면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있으면 부모의 영향을 벗어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가 원하는 옷을 입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옷 입기의 공식에서 벗어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