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버킷리스트
"생각건대 우리는 우리를 물어뜯거나 찌르는 책만 읽어야 한다.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여만 한다 "
-프란츠 카프카-
“ 생각건대 죽음과 질병만이 우리 삶을 강렬하게 흔들어 깨운다.
죽음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삶을 깨트리는 도끼이다."
영화 ‘버킷리스트’를 봤다.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는 내용의 영화이다.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잭과 역사학 교수가 되고 싶었던 카터는 같은 병실에 입원하게 된다. 정비사로 살아온 45년 세월이 잠깐이었다고 말하는 카터에게 잭은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하러 떠나자고 한다. 여행을 만류하는 아내에게 성실한 가장이었던 카터는 ‘나도 내 시간을 누릴 자유’가 있다고 소리친다. 잭의 돈 덕분에 카터는 마음에 품어 두었던 거의 모든 일을 하게 된다. 스카이 다이빙을 하고 모형으로 간직하던 꿈의 자동차를 타고 경주를 하며 그 어느 때보다 짜릿한 삶의 경험들을 한다. 그리고 카터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 앞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다.
이 영화는 어느 날 갑자기 암을 선고받은 두 남자가 버킷리스트를 함께하는 이야기지만 내게는 가난한 정비사 카터의 인생 이야기로 보였다. 내 인생이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잭보다 가난하고 성실한 정비사 카터의 삶에 더 닮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3년 전 가을, 나는 갑자기 심한 하혈로 정신을 잃어 119에 실려 갔다. 검사 결과 자궁내막암이었다. 그날 밤 “나는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고 침대에 쓰러져 울부짖었다. 이 상황이 꿈이거나 나쁜 장난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울었다. 그 와중에 내 우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고? 무슨 소리야? 너는 이미 50년을 넘게 살았다고! 아무리 아프다 해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올해 102세가 되신 김형석 교수님은 인생을 3단계로 나누어주셨다. 30세까지는 배우는 시기이고 60세까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시기이고 60세가 넘으면 내가 나를 관리하고 키워야 하는 시기라고 한다. 1단계 배우고 성장하는 시기는 행복하고 2단계 일하는 동안은 보람을 느끼고 60세 이후 마지막 3단계는 과거에 못했던 취미활동을 하는데 이 취미활동을 함으로써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역시 백 년을 살아보니 인생을 한 번에 꿰어서 나누실 수 있는 혜안을 가지신 것 같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해야 할 일 다 하고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1단계는 지나갔고 2단계를 버티고 살면서 은퇴 후 3단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리라 생각하며 나를 돌보는 삶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나는 2단계인데, 제일 행복한 3단계는 시작도 안 했는데 슬슬 인생 끝내겠다고 삶의 끝을 재촉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1단계가 행복하지도 2단계가 보람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 계획 따위는 인생은 고려해 주지 않았다. 그러니 울 수밖에.
아끼면 똥 된다더니, 옛날 어른들 말씀이 맞았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가면, 카트에게는 백만장자 잭이 있었다.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던 카터는 잭 덕분에 히말라야를 코 앞에서 보고, 인도의 타지마할에서 차를 마시고 중국의 만리장성을 걷는다. 자신의 오래된 로망을 실현하고 삶의 기쁨을 찾는데 잭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에게는 백만장자 잭이 없다. 그러나 영화 속 카터보다 내가 더 가진 것이 하나 있긴 하다.
영화에서 카터를 수술하고 나온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실제로 나를 수술하고 나온 의사는 암이 아닐 확률이 90프로라고 말해주었다. 실제로 최종적으로 암이 아니었다.
그렇다. 삶이 다시 내게로 온 것이다! 이럴 수가!
죽었다 살아났으니 이제부터의 삶은 확 달라져야 했다. 내가 꿈꾸던 지중해로 여행을 떠나고 매일 아침 10시의 여유를 즐기며 살아있음을 감사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슬그머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아침마다 무거운 눈을 뜨고 출근하고 피곤에 절어 퇴근했다. 여전히 사소한 일에 신경 쓰고 작은 일에 불끈했다.
진짜 이럴 수가!!
간절했던 삶을 다시 받았는데,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맞닥뜨리고 ‘삶은 지금 여기가 전부’ 임을 깨달았는데, 내 깨달음과는 상관없이 일상은 그대로 돌아갔고 나도 거기에 편승해야 했다.
왜 우리는 죽기 전에 되어서야 여행을 떠날 수 있는지 묻지 말아야 한다. 일상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일상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삶을 벗어던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이대로 살 수도 없었던 나는 내 안에서 백만장자 잭을 찾아내기로 했다. 내가 나의 버킷리스트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어떻게? 그냥 지금 행동함으로써.
죽음을 코 앞에 두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풍경을 보는 대신 지금 내가 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풍경을 보는 것이다. 죽을 날을 받아놓고 평생 해 보고 싶었던 일을 몰아서 하는 대신, 죽음이 등 떠밀기 전에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을 가능한 한 많이 해보는 것이다.
젊은 시절, 시댁에 말 안 하고 가족여행을 다녀오면 핸드폰에 사진 한 장 마음대로 못 올리고, 여기저기 눈치 보며 내가 다 잘해야 하는 줄 알고 살았다. 직장 다니고 애 키우는 것은 힘들어도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고 스스로 몰아붙였다. 공부하는 아이에게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온 에너지를 아이에게 쏟아부었다. 그러다 수술대에 누워봤고 아픈 곳 많은 50대가 되었다. 꿈꾸던 근사한 모습으로 나이 들지는 않았지만 두발로 힘껏 버티고 살아온 날들이다. 중년 이후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삶의 그늘로 남는다고 한다.
더이상 미룰수가 없다. 지금 바로 나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
소중한 일상을 팽개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나의 버킷리스트들을 적어보았다.
당장 실천할 수 없는 것도 적어두면 하게 된다는 기록의 힘을 믿는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왔기 때문이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기본적으로 나의 결핍에서 비롯되었고 나의 로망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이다. 늘 하고 싶어 하면서도 지금은 할 수 없다고 미루어왔던 일, 내 것이 아니라고 느끼며 막연히 부러워했던 일,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내 모습과 앞으로 누리고 싶은 삶의 방식들을 버킷리스트로 만들었다. 뭐 그리 대단한 일들은 아니다. 매일 걷기, 최고급 호텔 숙박하기, 수영하기, 매주 마사지받기, 마음 편하게 롯데 야구 보기, 체질 음식 먹기, 혼자만의 기념일 축하하기, 낮술 마시기, 모욕을 참아보기, 아버지와 데이트하기 등, 망고 맛을 모르면 망고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모르는 것은 아예 염원하지도 않았다.
인생에 큰 결단을 내리고 지금의 삶을 내려놓고 홀연히 길 떠나는 대신 일상을 끌어 안고서 행복을 찾는 여정을 지금 시작한다. 나의 결핍과 로망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세상은 구원 못해도 내 인생 하나는 구원해보자고 나서는 것이다.
미루지 않고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금, 비로소 내 인생을 사는 것 같다. 이제 소설이 끝나듯이 어느 날 인생이 뚝 끝난다 해도 더 이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다’고 울지 않겠다. 대신 매 순간 이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 생각은 그만하고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