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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Jun 07. 2022

[1] 세종실록

뜨거운 감동, 소박한 보답

1. 난국에 탄생한 보물단지


1450년 2월 17일 임금이 승하하니 3월 10일 의정부에서 육조의 참판과 집현전 제학, 동지춘추관사 이상이 토론을 거쳐서 시호(諡號)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종 (世宗)으로 정하여 새 임금(문종)의 인준을 받았다.  


시호로 정한 영문예무인성명효(英文睿武仁聖明孝)는, 재주가 뛰어나고 (英), 빛이 나면서 아름답고(文), 슬기롭고 총명하면서 사리에 밝고(睿), 굳세면서 용맹스럽고(武), 마음이 어질고(仁),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뛰어나 고(明), 부모를 극진히 섬겼다(孝)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6월 12일(갑신)에 대왕을 영릉에 장사 지내고 두 달쯤 지난 8월 18일에  명나라 황제가 장헌(莊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보내왔다. 그 의미는, 씩씩하고 왕성하면서(莊) 단정하고 바르고 엄격하였다(憲)’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452년(문종 2) 2월 22일 163권(연대기 127권+부록 36권) 154 책 분량의  <세종장 현대 왕실 록>이 완성되었다. 사관들이 실록 찬술을 마치면서 대왕의 품성(성품)과 통치 행적을 사망일인 1450년 2월 17일(음력)의 기사로 넣어놓았는데, 그 골자를 요약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세종의 천성과 통치 행적(세종실록 1450년 2월 17일 기사 요지)

처음에 황보인·김종서·정인지 등이 왕명을 받아 총재관으로서 감수를 맡았다. 허후·김조·박중림·이계전·정창손·신석조 등이 6방(房)을 담당하고, 재위 기간을 여섯으로 나누어 수찬하여 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 1년쯤 뒤인 단종 원년 정월에 일이 거의 마무리되었으나, 이후로 감수과정이 이어졌다. 


<세종장헌대왕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인물 중에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황보인·김종서 등이 피살되어 정인지 혼자서 감수를 맡았다. 또, 6방의 책임 수찬관 가운데, 박중림이 1452년(문종 2) 6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최항이 그의 역학을 대신하였다.


그밖에도 편수관으로 박팽년·어효첨·하위지·성삼문 등 4인, 기주관으로 신숙주·조어·김맹헌·이석형·김예몽·신전·양성지 등 23인, 그리고 기사관으로 김명중·서강·성희·김필·이익·이효장 등 25인이 참여하였다. 


2. 세계기록유산 지정 유공자      


세종은 뛰어난 통치력으로 경이로운 치적을 남겼다. 태생적으로 불리한 나라의 지정학적 악조건을 지혜롭게 극복하여 5천 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임금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많은 국민이 대왕을 성군으로 여기는 배경에는 확실한 물적 증거가 존재한다. 바로 재위 기간의 통치 행적이 고스란히 담긴 <세종실록>이다.  

     

세종실록을 펼쳐보면 스물두 살에 임금이 되어 쉰네 살로 죽을 때까지 32년 동안 힘써 나라를 다스린 궤적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적혀있다. 모든 선과 악이 가공되지 않은 민낯으로 담겨 있어, 1997년 8월 30일 다른 조선왕들의 실록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민족을 넘어서 온 인류의 보물창고로 공인을 받은 것이다.  

    

세종장헌대왕실록 원본(연대기)

지극정성으로 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의 노고는 말할 것도 없고, 실록을 지켜낸 분들과 국어로 번역한 분들의 헌신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실록이 전해지지 않아서 그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다거나, 아직도 한자로 쓰인 그대로여서 쉽게 읽을 수가 없다면 그 안타까운 마음을 무엇으로 삭이고 떨칠 것인가.   

  

1431년(세종 13) 3월 17일 춘추관에서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해 올리니, 임금이 내용을 보고 싶어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집안의 골육상쟁과, 부왕에 의해 외가와 처가가 참혹하게 몰락한 비극을 속속들이 알았던 입장에서는 두렵고 걱정되는 마음이 컸을 법도 하다. 그런데 우의정 맹사성, 제학 윤회, 동지총제 신장 등이 네 가지 논리로 임금을 말렸다.      


아름다운 말과 훌륭하게 다스린 일만 실려 있어 고칠 곳이 없습니다.” 

“만약 보시게 되면 후세의 군왕들도 반드시 본받아서 고칠 것입니다.” 

“만약 보시면 사관이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해 사실대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군왕은 고치고 사관은 빠뜨리면 어찌 후세에 진실한 역사가 전해지겠습니까.”     

 

임금이 "그럴 것이다." 하고 예문관 검열 김문기를 보내 《태조실록》·《정종실록》·《태종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런데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7년쯤 뒤에 다시, 옛날의 임금들은 선왕들의 실록을 거울로 삼았다며, 먼저《태조실록》을 보고《태종실록》까지 보려고 하자, 황희와 신개가 가로막고 나섰다.

     

 “설령 역대 임금들은 선왕의 실록을 보았더라도 본받으실 일은 아니옵니다.”


임금은 이번에도 그대로 따랐고, 이후로 연산군이 선왕(성종)의 실록을 보고서 갑자사화(1504)를 일으킨 것을 제외하고 어느 임금도 실록을 열람하지 않았다, 꼭 알고 싶은 대목이 있으면 사관에게 요점만 베껴오게 하였다. 덕분에 조선왕조실록 전체가 세계기록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니, 군신 간의 대화에서 향기가 나는 듯하다. 


선왕의 실록을 꼭 보고 싶어 하는 임금을 직언으로 말린 신하들의 충심에서 하늘만큼 높은 기상과 격조가 느껴지고, 신하들의 간언을 존중하고 그대로 따라준 임금의 아량에서 성군의 풍모와 자질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세종실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게 한 공로는 임금과 신하들이 공평하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3. 사수와 국역 다음의 관문         


우리가 오늘날 세종의 훌륭한 면모를 배우고 감동할 수 있는 것은 세종실록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실록을 비롯한 조선왕조실록 전제는 순탄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서 온몸으로 지켜낸 영웅들이 아니었으면 세종실록도 없고 세종의 빛나는 행적도 단군신화처럼 극히 일부만 간략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1592년에 왜적이 쳐들어와 춘추관, 충주, 성주의 실록을 모두 불태운 것을 알고 전주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실록을 혼신을 다해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서 안전하게 지켜낸 안의와 손홍록의 헌신은 영원히 받들고 본받아야 할 위대한 정신유산이다.    


내장산에서 다시 해주와 강화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또다시 강화로 옮겨서 끝까지 실록을 지켜낸 수많은 민초들의 노고도 영구히 기려야 할 것이다. 기필코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그 많은 분량을 무려 10년 동안 장장 2천 리에 이르는 장거리를 줄곧 등짐으로 옮기느라 피땀을 흘렸을 조상들에게 모두 함께 진심 어린 경의와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실록 국역에 동참한 각계 학자들도 엄청나게 큰일을 한 것이다. 한자를 모르면 내용을 알 수 없는 사료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바꾸기 위해 불철주야 진땀을 쏟았을 것을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수북이 쌓인다. 북한에서 실록을 국역한 동포들도 매우 훌륭하고 장한 일을 한 것이다.        


문제는 방대한 분량이다. 자세하고 정확하게 적다가 보니 금쪽같은 사료들이 산처럼 쌓인 것이다. 국역본 기준 연대기만 깨알 같은 글자로 열아홉 권이 이고, 한 권의 분량이 오백 쪽 안팎이다. 모두 합하면 1만 8백 쪽에 이르러, 전체를 다 읽으려면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게다가 시간이 있다고 쉽게 읽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종장 현대 왕실 록(국역본)-연대기 전체 19권

전체를 보는 순간 분량에 압도되어 심지가 오그라지든지 주눅이 들기 십상이다. 굳게 결심을 하고 첫 표지를 넘겨도 끝까지 독파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갈피갈피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용어들이 수두룩해 빠른 속도로 매일 쉬지 않고 읽어도 진도가 더디다. 장거리 경기를 하듯이 천천히 달리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개인차가 크겠지만, 열아홉 권 전체를 꼼꼼하게 읽으려면 상당한 정도의 인내심과 지구력이 필요하다. 역사에 밝아서 어지간한 고어는 익숙한 사람도 다 읽으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역사를 전공한 학자라도 다 읽으려면 여러 날이 걸릴 것이다. 실록을 처음 대하는 경우는 넘기 어려운 장애물이 한둘이 아니다. 


첫째. 오래지 않아서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앞서 읽은 내용들이 희미해진다. 그래서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도, 시야가 넓은 사람도,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거나 본말을 혼동하기 쉽다. 장기계획을 세우고 틈틈이 조금씩 읽어나갈 경우는 역사의 맥락을 따라잡기가 힘들다.      


둘째. 무수히 많은 개별 기사들의 연결을 알기가 어렵다. 실록이 중요한 사건별로 전모가 편집되지(기전체) 않고 그날그날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으로 편집되었기(편년체) 때문이다. 따라서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 제도, 정책, 지명 등의 태생과 변천과정을 따로따로 파악하여 각기 연결을 지어야 줄기가 잡히는데, 끈질긴 노력 이상의 수고를 요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셋째. 개별 사건들의 발단, 전개, 결말 등을 알기가 어렵다. 사건의 흐름에 따라 관련기사들의 편집 간격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여러 사건이 하나의 기사에 뒤섞여서 편집된 경우도 많다. 하나의 회의록에 수십 가지 사건을 토의한 내용이 두서없이 적힌 경우도 한두 곳이 아니다. 하나의 상소문에 여러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경우도 허다하다.     


넷째. 중대한 누락과 치명적 오류를 인식하기 어렵다. 사소한 오탈자 정도는 고쳐서 읽으면 되지만, 동일한 기사의 중복 편집이나 터무니없는 오역은 중대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원문 실록의 오류가 국역본에 그대로 옮겨진 경우도 많고, 원문은 맞는데 국역이 틀린 경우도 꽤 있다. 이런 함정들을 모르면 중요한 맥락을 놓치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        


다섯째. 시중에 세종실록을 소개한 책자가 많으나, 위의 네 가지 문제를 신경 쓴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창의·창작·발명·승리·수호·포용 등과 같은 빛나는 행적을 찬양한 책들만 넘치도록 많고, 굴신·패배·착오·차질·실수·걱정·고생·고뇌·후회 등을 다룬 책은 희귀할 정도로 드물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성공은 실패의 자식’이라는 뜻이니 후자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옳을 터인데, 현실은 정반대다. 

   

4. 위인과 영웅들에 대한 도리     


앞에 열거한 다섯 난관을 사람들이 편하게 지날 수 있게 도와줘보려고, 평생을 형사학도로 살아온 경험을 활용할 생각을 가졌다. 실록의 구석구석을 솔개의 눈으로 샅샅이 뒤져서 광채가 특별히 찬란한 사료들을 주제별로 수납해보려고 한다. 부족하나마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세종실록을 공들여 편찬하고, 몸 바쳐 지키고, 땀 흘려 번역한 위인과 영웅들에 대한 도리일 것 같았다.      


다짐도 허술하고 간추려둔 사료들도 어설픈 구석이 많지만 마음은 설레고 들떠있다. 앞으로 소개될 글들을 계속 읽어주는 이가 몇 명이라도 있다면, 실록을 보자는 임금을 힘써 말리고, 외침을 당했을 때 사력을 다해 실록을 지키고, 그리고 한자로 된 원문을 국어로 바꿔준 위인과 영웅들에게 작으나마 보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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