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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초이스 Mar 28. 2020

이 보고는 누구를 위한 보고인가

이 보고의 주인공은 나야, 나 

직장인의 하루는 보고로 시작해서 보고로 끝나는 게 일상입니다. 어떤 날엔 오전에 이 보고에 치이고, 오후에 저 보고에 치이다 보면 대체 오전에 한 보고는 언제 수정해서 가져오냐고 한 소리를 듣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엔 심지어 정신이 없어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잽싸게 오전에 한 보고를 수정하러 갑니다. 억울하지만 뭐 어쩌겠냐고 나를 달래면서 말이죠. 그런 날엔 정말 얼음잔에 담은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 하면서 일하면 좀 나으려 싶다가도, 그 순간마저 어떻게든 일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제가 또 안쓰럽기도 합니다.


정말 하루 종일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이 보고가 대체 누구를 위한 보고냐며 울부짖고 싶고,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 그냥 통과만 시켜달라고 소리 지르고 싶어 집니다. 이런 휘몰아치는 마음을 억누르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우린 이미 멘탈 甲인거겠죠? 그렇지만 여기서 조금만 신경 쓴다면 분명히 이 시간이 쌓여 큰 차이를 가져다줄 것입니다.(오늘도 그렇게 저를 어르고 달래며 사는 중입니다.) 


정말 이 보고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올해 제가 담당하고 있는 제품들 출시 라인업과 컨셉에 대한 컨펌을 받기 위해 장표를 ver1, ver2, ver3에서 나중에는 최종에 최최종까지 고쳤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파일명을 작성하진 않습니다ㅎㅎ) 나중엔 팀장님마저 혼잣말로 "우리가 이걸 왜 이렇게까지 고쳐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그때를 떠올려보면 처음 몇 번은 제 혼을 담아 짜갔고, 나중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초안의 내용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죠. 기껏 수정해갔더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다시, 몇 가지 이미지를 추가해야 해서 또다시, 그러다 앞선 버전이 나은 것 같다고 다시.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일주일 내내 들고 가서야 겨우 부회장님 보고용 최종 장표가 탄생했습니다.


이쯤 되면 답답한 마음에 '한 번에 통과하는 기획안'이나 각종 '보고의 스킬'을 찾아보게 됩니다. 남들은 어떻게 보고를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보고 스킬에 대한 책도 뒤적이게 되죠. 그러다 보면 몇 가지 공통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더군요.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하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듯 핵심을 먼저 두괄식으로, 간결하게 말하라고 합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나는 실무자니까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왜 할 수 없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어 너무 당연한 결과인데 팀장님 눈엔, 상무님 눈엔 그게 왜 안 보이는 걸까요? 게다가 팀장님이 궁금해하는 것과 상무님이 궁금해하는 게 다르고, 전무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일단 모두 다 때려 넣어야 할까요?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 보고 대상에 따라 다르게 장표를 수정해야 하는 걸까요?


하수는 자기 상사만 염두에 두고 보고를 하고, 고수는 상사가 보고를 드릴 그의 상사까지 염두에 두고 보고를 한다고 하죠. 그렇지만 저는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보고를 해야 진정한 고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보고는 청자를 염두에 두고 그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why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how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강조하여 전달할 부분이 달라지겠죠. 이런 스킬적인 부분도 일상에선 매우 중요합니다만 결국 보고의 목적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이끌기 위함입니다. 


가끔은 빨리 통과하기 위해서 상사가 원하는 결과, 상사가 좋아할 것 같은 방향부터 고민하기 시작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를 하고 장표를 만들다 보면 어찌어찌 통과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통과 자체가 목적은 아니잖아요! 통과란 곧 의사 결정을 해주었단 의미이고, 결국 action plan을 짜서 실행할 당사자는 나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보고를 했다가 숯한 까임에 지쳐 팀장이 하라는 대로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나중에 팀장이 이렇게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했는데 잘 안되었다던가, 애당초 까일 테니까 팀장님 스타일로, 상무님 스타일로 장표를 만들어 결정받았기 때문에 내 책임은 없다고 회피할 수 없습니다. 보고란 설득을 위한 논리적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고, 보고의 결과는 결국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저는 보고를 크게 2가지로 나눠서 생각합니다.


1> 팩트를 기반으로 현 상황 공유

→ 상사에게 현 상황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함으로써 업무에 대한 이해도를 같이 쌓아나가기 위해 이뤄집니다. 거창한 포맷을 갖추지 않더라도 그때 그때 상황을 공유해 적어도 나중에 뒷북치는 일은 없게 하는 거죠.

부수적으로 일의 진척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여 상사의 불안감을 미연에 방지하고, 일하는 티도 덤으로 낼 수 있습니다.


2> 의사결정을 받아야 하는 보고

→ 신규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비용을 받아야 할 때 주로 윗분들을 설득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여기서 일잘러들이 빛을 발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1번은 하면 더 좋지만 안 해도 크게 문제없는, 답답하면 상사가 먼저 물어봐 그 때라도 대답만 잘하면 평타는 치는 보고입니다. 다만 2번은 윗분들의 의사결정을 받는 보고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고 나의 성과와 직결되는 보고입니다. 이 첫 단추를 잘못 꿰면 헬게이트 오픈이죠. 그런데 이게 또 의사결정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나는 플랜 A, 플랜 B 등 여러 액션 플랜을 짜가긴 하겠지만 결정은 니(상사)가 한 거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열심히 플랜 A, B, C를 짜갔는데 상사로부터 "그래서 뭐, 어쩌라고?"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요. 이럴 때면, '아니, 내가 이만큼 떠먹여 줬음 니가 선택 정돈해야 하는 거 아냐?'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옵니다.


넘치는 보고 때문에 종종 잊기 쉬운 건, "보고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은밀한 설득"란 점입니다. 결국 내 머릿속에 누구보다 선명하게 내가 원하는 결과가 그려져 있어야 합니다. 설령 중간에 수정을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상기하면서 그에 맞는 정보를 수집하고 설득해나가야 합니다.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다 보면 이 지긋지긋한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어 그냥 일단 하라는 대로 하고 보자의 길로 빠지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설령 기획안이 통과되더라도 일의 시작부터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버려요. 마음에는 안 들지만 시키니까 할 뿐이고 그러다 보니 의욕은 안 나고 결국 결과가 안 좋으면 내 탓은 아닌데 욕은 또 내가 다 먹습니다. 어휴, 이것 때문에 직장인들 뱃살이 늘어나나 봅니다. 


그렇다고 또 대놓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처음부터 드러내면 강한 비판과 반대와 맞서 싸워야 할지도 몰라요. 그러니 은밀하게 설득을 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내가 원하는 답을 정해두되 상사로 하여금 본인이 선택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거죠. 저도 이 부분은 열심히 연마하는 중입니다만, 다행히도 저는 현재 툭 까놓고 솔직히 말해도 제 의견에 따라주는 팀장님을 만났습니다.


결과에 대한 선명한 그림을 그리고 상사를 설득하겠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내가 이 보고의 리더가 됩니다. 결과를 정확히 그리려면, 누구보다 현황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여러 방법들의 장/단점도 찾아내야 하고, 내가 달성하고 싶은 목표치도 스스로 설정하게 되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저절로 궁금해집니다. 무엇보다 결과가 나빠서 욕먹더라도 억울하진 않죠. 이래도 저래도 욕먹는다면 내가 해보고 싶은 대로 해 봐야죠!


모든 보고는 다 나를 위한 보고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면 보고의 굴레를 빠져나오는 키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을 수 있어요. 물론 내일도 될 대로 돼라 싶은 마음이 우릴 유혹하겠지만요. 

자, 내일도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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