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나는 참 아무것도 이룬 게 없구나.. 하고 술잔을 탁, 내려놓는다. 자화상을 그린다면 거의 여백일 거야.. 넋두리 하는 나에게.
그래도 지금 하나하나 이루고 있잖아요. 이룰 것들이 많아서 설레요. 하며 손을 잡아주는 너.
두 손이 다 빈 손이라 네 손을 꼬옥 잡을 수 있구나.
미신
필명을 갖고 싶던 시절에
두 글자의 이름 도장도 갖고 싶어 도장 가게에 가서
성과 이름을 합쳐도 두 글자밖에 안 되는 도장을 파려고 하는데
돈을 적게 받을 수 있느냐 물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여백을 파내야 하는 수고가 있으니
오히려 더 받아야겠다는 도장 파는 이의 대답을 들었다
다 늦은 그날 밤
술 마시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잔만 마시면 죽을 수도 있고
그 한 잔으로
어쩌면 잘 살 수도 있겠다 싶어 들어간 어느 포장마차에서
딱 한 잔만 달라고 하였다
한 잔을 비우고 난 뒤 한 병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주인이 술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당신이 취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한 잔이 아니었냐며
주인은 헐거워진 마개로 술병을 닫았다
바지 주머니엔 도장이 불룩하고
천막 안 전구 주변에선 날파리들이 빗소리를 냈다
도장을 갖고도 거대하고도 육중한 한 시절의 어디에다
도장을 찍어야 할지 모르는 나는
온통 여백뿐인 청춘이었다
여백이 무겁더라도 휘청거리지 말고
그 여백이라도 붙들고 믿고 수고할 것을
그 여백에라도 도장을 찍어놓을 것을
_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
숨이 턱 막히는 시였다. 여백이라고 하는 부분이 너무 좋아 끄적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