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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Mar 18. 2019

[스물둘, 영국] #1 돌아보니 꿈을 이룬 날이었다.

영국교환학생 #1 출발하던 날 _ 한국 밖으로 첫 발을 내딛다

2019년 1월,

남동생과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오던 길, 공항 면세점에서 우연히 고디바 솔티드 캐러멜 초콜릿을 발견했다. 포장지 색깔 하나 변하지 않은 네모납작한 그 초콜렛을 보자니 그 날이 너무 생생히 떠올라 씰룩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며 나는 황급히 사진을 찍어 그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전송했다.


잘 지내? 이거 기억나?! 이거 보니까 네 생각이 나서!


드르륵- 몇 분 뒤 짧은 진동이 울렸다. 지구 반대편에서 보내온 답장이었다.


Hahaha 눈 똥그랗게 뜨고 앉아있던 쪼그만 여자애 당연히 기억하지! 아직 영국에서 공부 중이니?


아주 가끔 있는 일이지만, 문득 생각나 연락을 할 때면 그는 늘 나를 "아이고- 우쭈쭈- 쪼꼬미-" 뭐 그런 식으로 대한다. 그런 반응을 볼때면 나는 그의 눈에 진정 내 키가 그렇게 작았던가, 아니면 그게 아니라 어리바리했던 그날의 내 모습이 그의 기억 속에 나를 한참 어린 이미지로 각인시켰던 건 아닐까, 되묻곤 한다.  


안부를 묻는 그에게 나는 잉글랜드에서의 교환학생은 일찌감치 끝났으며, 1년 동안 파리에서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유럽을 여행 중이라고 근황을 전했다. 그는 부모님의 일을 물려받기 위해 양봉 공부를 하는 중이란다. 그렇게 반가운 오랜만의 대화가 오갔다.


우리가 만난 그 날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나에게 공항은 늘 그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에듀는 내가 한국 밖에서 만난 첫 번째 사람이었다.



22살, 영국으로 두 학기의 교환학생 파견을 위해 비행기에 오른 그 날, 처음으로 국제선을 타본 날. 처음으로 내 몸이 한반도 밖의 공간에 놓인 날.


돌아보니 그 날은 꿈을 이룬 날이었다. 


문화도 인종도 비교적 단일한 대한민국, 산책을 나가도 어슬렁어슬렁- 해야 이 삼십 분이면 구경이 끝나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나에게, 내 경험 반경의 밖에 있는 새로운 것들이 주는 낯섦이란 늘 설렘과 동경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가령 초등학생 때에는, <요리보고 세계보고> 라던가 <세계는 넓다>와 같이 세계 문화, 해외여행을 콘텐츠로 하는  방송을 보기 위해 친구들과 놀다가도 시간에 맞춰 집으로 후다닥 들어오곤 했다. TV 앞에 앉아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 장면들을 담아내는 카메라가 곧 내 눈이 된 마냥 몰입하여 간접 여행을 즐겼고, 관심을 끄는 나라들은 여행 버킷 리스트에 적어 넣었다.


방학 때는 동네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여행 에세이들을 펼치고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가 흘렀다. 고지식한 번역투(를 탓했지만 사실은),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어린 나에겐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 소설들을 파고들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여전히 낯선 것들을 갈망했고, 동시에 문학이라는 것의 가치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하면서 영어영문학과로의 진학을 결정했다.(당시에 그나마 아는 외국어란 영어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구는 늘 마음 속에 남아 있었기에 나는 대학생이 되면 어디선가 들어본 "교환학생"이라는 걸 꼭 해보리, 다짐을 했다.


그렇게 수능이 끝나고 곧장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과외, 방과 후 수업, 단기행사 알바, 식당 알바. 열심히 아끼고 모았다. 이왕이면 내가 가고 싶은 나라로 파견을 가자는 생각에 성적 관리에도 최선을 다했다. 3학년이 되자 거의 준비가 되었고 2015년-2016년에 걸쳐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으아, 

이렇게 뒤돌아보니 꽤나 숨이 찬다. 


그러니 정말이지 꽤 오래 지속되었던 큰 꿈을 한 가지 이룬 셈이다.


비행기를 타러 인천공항으로 가던 날, 부모님과 남동생까지 온 가족이 대동했다. 엄마가 훌쩍였다. 아빠는 괜찮은 척. 동생은 시크한 척을 했다. 빨간 대형 캐리어 수화물을 부치고, 가족들과 식사를 한 뒤 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액체류 반입이 안 되는 걸 깜빡한 나의 어수룩함 때문에 백팩에 넣어놓았던 작은 고추장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짐 검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눈 앞에 말로만 듣던 면세점이 있었다. 우와-하며 마음은 한껏 들떴지만 익숙한 척을 하며, 물건을 들었다 놨다, 가게들을 이리저리 구경했다.


아직 시간이 많겠지 하고 어슬렁어슬렁 게이트로 가는데, 세상에나, 방송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얼른 탑승을 하시라고...! 심장이 떨려서 그 길로 냅다 뛰었다. 10킬로짜리 대왕 백팩을 메고... 아니... 인천공항은 왜 이리 넓고, 게이트는 왜 이렇게 많은지... 헥헥대며 그래도 게이트에 도착해 항공사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무사히 비행기에 올라탔다.


숨을 고르며 자리를 찾아가는데, 비교적 넓은 비즈니스석을 지나자 촘촘히 앉아있는 이코노미석의 많은 시선들이 홀로 복도를 걸어 들어가는 나에게 와서 꽂혔다. 어떤 눈들은 은근하게, 어떤 눈들은 뚫어지게. 사람들과 부딪힐까 어깨를 좁히고 한참을 들어가다보니 드디어 자리를 찾았다. 내 좌석 바로 옆자리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 있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아시아계 남자였다.


가방을 올려놓아야 하는데 모든 칸들이 꽉 차 있어 쩔쩔매는 나를 보더니 그는 벌떡 일어나 다른 짐들을 이쪽저쪽으로 쿡쿡 밀어 공간을 만들어 내 가방을 턱 하고 올려주었다. 내가 Thank you라고 했던가 고맙습니다라고 했던가, 아니면 그냥 고개를 숙였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나는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잠시 후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두 시간을 날았던 것 같다. 스크린에 켜놓았던 샘 스미스의 콘서트 동영상이 갑자기 뚝 끊기더니, 기내식을 나누어 주겠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방송 멘트가 끝난 후 다시 샘 스미스가 화면에 등장했다. 노래에 집중을 하려던 찰나 내 옆자리의 그 남자가 나를 툭툭 쳤다. 난생 첫 출국에 가방에 300파운드 현금까지 들고 있던 나는 초긴장을 하고 있던터라 움찔-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뒷사람도 밥을 먹어야 하니 네 의자를 세워야 한단다. 비행기 안에서의 예절에 미숙한 나는 머쓱해하며 살짝 눕혀놓았던 의자를 세웠다.


기내식이 나오고 어쩌다 보니 우리는 몇 마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냐는 둥, 어디서 왔냐는 둥. 기본적인 이야기들. 나는 잉글랜드로 교환학생을 가는 길이고,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타 본다고 했다. 에듀는 브라질에 사는 한국 교포였다. 한국에 친척들을 만나러 왔다가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한국어가 서툰 그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해외로 나가는게 처음이라는 나에게 어쨌든 한국 밖으로 나오면 모든 곳이 한국보다 훠얼씬 위험하고 소매치기도 많다며 (특히 자신이 사는 브라질은 거의 무법지대라며 순진한 관광객들을 상대로 일어났다는 무시무시한 일화들을 펼치기도 했다. 굳이 오지 않아도 돼... 고향을 디스 하며)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핑크색 자물쇠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남대문 시장에서 여러 개를 샀는데, 이 핑크색은 자기가 못 쓸 것 같아서 줄테니 가방에 꼭 달고 다니라고 말했다. 경계심에 가득 차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미 자물쇠는 내 손에 들려있었고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렇게 밥을 다 먹고 주변도 조용해지니 서로에 대한 호기심 어린 대화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나는 창밖으로 비친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그 사람의 시선이 다른 곳에 가있을 때 눈치를 보며 셀카도 찰칵. 그런데 잠시 후, 그런 나를 보았는지 에듀는 '카메라 줘봐, 내가 너 찍어줄게' 했다. 당황한 나는 '아니야, 아니야. 싫어. 지금 화장 안 해서 못생겨서 싫어. 안 찍을래.'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그는 흠- 하며 잠깐 말이 없더니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절대 잊지 못할 말투였다.


너 몸에 뭐가 없는 게 있어? 눈이나 코나, 문제 있어?


서툰 한국어로 그는 이렇게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네 몸 멀쩡하니?'라는 낯선 이의 질문에 엄청난 공포를 느껴서 순간 땀도 삐질 흘렸다. 뭐야, 인신매매야 뭐야, 몸에 지병 없고 장기 멀쩡하냐는 거야 뭐야. 당황한 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 문제없잖아. 얼굴에 없는 거 없잖아. 근데 왜 그렇게 말해? 왜 네가 싫다고 해? 화장 없어도 괜찮아. 예뻐.


순간 정말 울컥했다면 오버인가. 사춘기 때부터 늘 옷, 화장, 다이어트. 어떤 외부적 기준에 맞추어 무언가 인위적으로 가꾸어 놓은 내 모습만 인정하며,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진짜 내 자신은 부정해왔던 스스로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의 말이 참 고마웠다.


그렇게 한참 날아서 경유지인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맨체스터 행을 타는 나는 4시간 경유, 그는 1시간 반 경유 후에 리우 데 자네이루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같이 면세점을 구경하겠냐고.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많으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가게들을 둘러보는데 예쁘고 맛있어 보이는 게 왜 그리 많은지... 하지만 늘 그렇듯 결정장애에 짠순이인 내 손에 들리는 관심 대상의 물건들은 꼼꼼한 나에게 신상만 열심히 털리고 계산대까지 가는 일은 없이 도로 제자리에 놓아졌다. 그 와중에 에듀는 물건을 몇 개 구입했다.


잠시 후, 그가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되어 이제 헤어질 때였다. 인사를 하려고 하자 갑자기 그는 면세점 쇼핑백을 열더니 나에게 큼지막한 고디바 초콜릿을 건넸다. 나는 예상치 못한 선물에 진짜 받아도 되냐며 난감하기도 기쁘기도 한 마음에 여러 번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너 아까 초콜릿 계속 사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먹고 싶으면 사! 하고 말했다. 그래도 난 해준 것도 없는데 이걸 받기가 미안하다니까 에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도 나중에 너보다 어린 동생들 만나면 이렇게 해주면 되는 거야!


씩 웃으며 그는 게이트로 향했고 나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아, 첫 여행에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행운이다! 남은 경유 시간 소파에 앉아 열심히 에듀와의 만남을 일기장에 남겼다.


이후로 일이나 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탈 일이 생각보다 잦아졌고, 경험이 쌓이면서 점차 비행기도 나에게 그저 하나의 교통수단, 그 이상이 아닌 것이 되었다. 에듀에게 사소한 비행기 예절을 배우던 그 날 느꼈던 생소함과 두려움, 어리바리함은 사라진 지 아주 오래다.


익숙하기에 스트레스가 덜하고 몰라서 하는 실수들도 줄어든다. 그렇지만 낯섦이라는 차가우면서도 상쾌한 감정이 사라지니 어째 미적지근한 것이 한 구석이 아쉽다.


Toutes les grandes personnes ont d' abord été des enfants, mais peu d' entre elles s'en souviennent. / Le Petit Prince


얼마 전 우연히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 구절을 다시 보았다.


<모든 어른들은 앞서 아이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기억하는 어른은 드물다.>


물론 아직 알아갈 것들이 정말 많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내가 꿈꿔왔던 낯선 유럽을 배경으로 벌써 2년을 살아냈다. 그래도 경험 덕분인지 이제는 심지어 익숙하기 까지도 하다.


반면, 이 익숙함 때문에 나는 내가 지금까지 해낸 유럽에서의 삶이 내 마음을 뛰게 하고, 노력하고 일하게 했던 꿈이었다는 것을 잊고 지냈다.


사실 그런 마음에서 이 일기를 3년 반전으로 되돌아가 다시 쓰기로 한 것이다. 나 역시 '원래는 눈 똥그랗게 뜨고 있던 아이였다.'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기 위해.


그리고 삶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이 흔들리는 요즘의 나에게 그래도 나는 꿈을 이루고 살고 있어, 기특해, 스스로 응원해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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