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김장을 도우려고 고향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내가 쉬는 날로 김장하는 날짜를 정했다.
아무래도 동네에서 할머니가 연장자라 김장하는 날짜는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나 보다.
아침 6시부터 밥을 먹었다. 둘러보니 마당의 수도가에는 살얼음이 얼었다.
캠핑 화로를 이용해서 불을 지폈다.
이미 배추를 뽑고, 절였고, 오늘은 배추와 속을 합치기만 하면 되는 날이다.
오랜 세월 보와 왔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왔다. 아니 이제 할머니들이지.
반가웠다. 할머니들은 6개월 만에 봐도 어제 본 것처럼 대하신다.
할머니들은 카톡으로 공지를 한 것도 아닐 텐데.. 다들 오신다.
사실 김장이 아니면 동네 주민들이 우리 집에 올 일이 많지 않다.
아주머니들은 본인들의 전용 깔개를 가지고 오셨다. 전투 장비나 비슷하다.
왁자지껄하니 좋다.
드디어 배추에 속을 넣기 시작한다. 속을 넣는 것은 그래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가장 잘한다.
특히 앞집 아주머니는 매년 속을 깔끔하고 야무지게 넣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빨의 달인으로 본인은 웃지 않으면서 웃기는 능력이 출중하시다.
전투적인 아랫집 아주머니도 와서 두 분이서 언어의 티키타카를 하면서 김장을 한다.
인사를 하면 잘 받아주시던 건넛집 아주머니는 왠지 말씀이 없으시다. 알고 보니 치매가 생겼다고 한다.
나중에는 배추의 양에 비해서 속이 적은 사태가 발생했다. 조금 연하게 담기로 했다.
4집의 딤채 김장 통에는 각자 이름이 써져 있어서 구별이 가능한데, 끝나고 나면 항상 뚜껑 하나가 없어진다.
며칠 전부터 도와주시던 옆 동네 아주머니는 90이 넘으신 할머니에게 이제는 진두지휘하지 말고 가만히 계시라고 한다.
그 말 또한 정겹다.
우리 집 포함 4집 중에 작은 어머니 집은 싱겁게 먹는다. 그래서 거기는 속을 조금만 넣는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알아서 레시피를 조절해서 잘해준다. 어머니께 물었다. C 아주머니 왜 안 왔어? 손녀 보러 지금 OO에 가 있어서 지금 없어. 아쉽다. 매년 보던 친구 아주머니. 60이 넘으셨지만 아직도 새댁으로 불리는.
김장이 거의 끝나간다.
겉절이를 만들어서 비닐봉지에 넣었다. 바빠서 안 오신 분들, 최근 이사 와서 어색해서 안 오신 분들에게 겉절이를 가져다 드렸다. 이 강아지들은 평소에 잘 짖더구먼 뭐 가져가니까 안 짓네??
김장이 끝나고 아주머니들은 각자의 집으로 가셨다. 말발이 좋으신 아주머니는 핸드폰을 빠뜨렸다면서 하는 말이 아직도 선하다. 장가가려고 한 놈이 불알 놓고 갈뻔했네.
이런 언어의 연금술사.
아버지는 A아저씨와 선생님과 B아저씨를 모셔오라고 한다. 식사 한번 하자고.. A 아저씨는 한 시간 전에 밥 먹었다면서 거부하시다가, 결국에는 오신다고 한다. 나에게 핸드폰이 문제가 있다며 고쳐달라고 했는데 나 역시 고치지 못하겠다. 선생님은 오신다고 했다. 나의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화분을 엎질러서 퇴학시킨다고 겁주던 것이 생각난다. 선생님은 재작년에 혼자가 됐다.
남자들이 보였다. 선생님과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 식사를 처음 한 것 같았다. 남자들은 이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생님은 그래도 우리 동네가 장수마을이라고 하셨다. 90명 이상은 몇 명이고 80살 이상은 몇 명인데 누가 건강이 좋고 안 좋고를 다 알고 계신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나이를 잘 모른다고 한다. 선생님은 도시에 살다가 10년 전에 시골에 집을 지고 다시 귀농하셨다.
화제가 자식들로 넘어가서 내 자녀들에 대해서 여쭤보셨다. 딸이 두 명이라고 하니 동공이 흔들리셨다.. A 아저씨는 아들은 소용없어! 라면서 거들었고, B 아저씨는 그래도 여자는 출가외인이여라면서 반대 의견을 펼쳤지만 선생님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딸이 좋다고 한다. 선생님은 아들만 셋이었다.
김장이 아니면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이 김장을 핑계로 한번 모였다.
혼자 힘으로는 못하는 것이 김장이다. 예전에는 김장을 위해서만 보였지만 요즘에는 사실 얼굴 보려고 조금 더 이야기하려고 모이는 것 같다. 이런 문화 때문인지 시골에는 치매는 있을지언정 우울증은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