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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Nov 05. 2016

로빈과 이안

인연인지 악연인지 - 런던의 유학생


석사과정의 커리큘럼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제나 소재를 던져주면 ‘알아서’ 결과물을 만들어 오는 것이다. 진행 과정에서 두세 명의 교수 혹은 강사들에게 꾸준히 조언을 듣는다. 조언이 필요한 만큼의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발표를 할 때마다 메인 교수 로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잠깐, 그건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닌데?’였다. 처음 입학허가를 받던 시점부터 우려했던 부분들이 슬슬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작업의 흐름은 그 형태적으로는 점점 더 추상에 가까워져 갔고, 불행히도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단어는 ‘예시를 들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가 재구성하고 표현하려는 대상 자체가 대개는 형태를 가지지 않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라 내가 설명한다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결과물은 상대가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곤 했다. 물론 로빈이 내가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가 일관적으로 제시하는 방향은 내가 가진 색과 자료들로 엮었을 경우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프로젝트가 거듭되면서 이러한 실랑이 또한 지속되었고, 외부적인 문제가 겹치면서 피로감은 극대화되었다. 그만두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 고민 끝에 디자인 대학을 총괄하는 이안 노블 교수와의 면담을 신청했다.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지만 첫 전공을 회화에서 출발하여 영상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를 다뤄온 사람이었다. 면담은 1층 로비 근처에 있는 긴 작업 테이블에서 이뤄졌다. 그는 내가 왜 힘들게 시작한 것을 포기하려 하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소상히 듣고 싶어 했다. 한 시간 남짓 되었을까,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매체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 될 게 없어. 내가 이제부터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에 직접 관여하도록 할 테니 그만두지 말고 계속해보도록 해.” 


어안이 벙벙하다.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학업을 중단할 경우의 학비 처리 문제를 비롯한 이런저런 행정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게 될 줄 알았는데, 생각지 않게 더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려 준 것이다. 그다음 수업부터는 이안이 직접 들어와 코멘트를 해주기 시작했고, 덕분에 나는 이전보다 형식적인 제약을 받지 않고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그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내게 호응해 주는 이는 없었지만,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졸업 전시 당일, 그는 조용히 전시장을 둘러보더니 내게 한마디를 건넸다.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에서, 네 작업은 올해 우리 모두에게 의미가 있었어. 넌 용감한 시도를 한 거야. 축하한다.”


이안이 아니었다면 분명 나는 석사과정을 마치지 못했을 텐데, 숙소 문제로 급히 독일로 이동하느라 그만큼의 감사를 다 표현하지도 못하고 영국을 떠났다. 언젠가 내가 조금 더 자리를 잡게 되면, 그때 멋지게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띄우리라, 그런 미련한 핑계로 위안을 삼고 있었던 것 같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먼 곳에서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느꼈던 것은, 후회를 넘어선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나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념일이나 생일 따위의 숫자와는 상관없이 할 말을 하고 주고 싶은 것들을 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선물, 감사. 그런 것은 묵히지 않고 지금 주겠다. 


내 눈 앞에 당신이 있을 때. 

바로 지금. 


그리고 다시금 감사를 건네고 싶다. 작업적인 고민을 던져주었던, 그리고 그것을 해체시키도록 도와주었던 로빈과 이안 두 분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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