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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05. 2015

#011. 이민자

낯선 장소에서 이방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Title : The Immigrant

Director : James Gray

Main Cast : Marion Cotillard, Joaquin Phoenix, Jeremy Renner

Running Time : 120 min

Release Date : 2015.09.03. (국내)




01.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언제나 한 조각이 모자란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가 재능이 있는 감독이라는 것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음이 분명했다. 그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모두 응축된 이야기가 터지기 직전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지루함을 남긴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역시 항상 터지기 직전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는 것. 조금만 더 가면 카타르시스가 터질 것만 같은데 언제나 그 곳에 한 걸음이 모자란 느낌이었다. 1920년 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갱스터 장르를 표방하고 <투 러버스>(2008) 이전의 작품들. 예를 들면 <비열한 거리, Little Odessa>(1994), <위 오운 더 나잇>(2008)과 같은 영화들이 그랬다.(그의 또 다른 작품 <더 야드>(2001)의 경우  그동안 작품을 구할 수 없어 보지 못했다. "구스 반 산트" 감독과 단짝이었던 "해리스 사비데즈" 촬영감독의 작품이라 더욱 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물론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투 러버스>(2008)를 통해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향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자유롭게 풀어나가는 듯 보였지만 어쩐지 역시 충분한 느낌은 들지가 않았다.


02.

비록 이 작품이 2013년 칸 국제영화제에 노미네이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부분들에 있어 다소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작품 <이민자>에 끌리는 마음이 들었던 건 온전히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 두 배우 때문이지 결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작품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마리옹 꼬띠아르"의 존재감은 영화의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시종일관 빛을 발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기욤 까네" 감독의 영화 <블러드 타이즈>(2013)를 기획하면서  함께하게 된 식사 자리에서 "기욤 까네" 감독의 아내인 "마리옹 꼬띠아르"를 만나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녀를 이 작품 <이민자>의 여주인공으로 낙점했다고 한다. 그 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줄곧 그녀의 얼굴만을 떠올렸다고 하니 어쩌면 이 작품에서 그녀의 연기가 돋보이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03.

사실 개인적으로는 "마리옹 꼬띠아르"가 헐리우드로 넘어가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 <러스트 앤 본>(2012)이나 <내일을 위한 시간>(2014)과 같은 비 헐리우드 작품들에 전념하는 배우가 되어주길 바랬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두 영화 모두 그녀가 헐리우드 작품들을 시작한 뒤 최근에 촬영한 작품들이고, 헐리우드 작품들의 비중이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본격적으로 헐리우드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레아 세이두"나 "에바 그린"과는 또 다른 노선을 걷는 프랑스 여배우가 되었으면 했던 것이다. 전면에 나선 작품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크리스토퍼 놀런"의 눈에 띄어 <인셉션>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덜컥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이대로 놀런 사단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이다.(다행히 그는 "앤 헤서웨이"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04.

"마리옹 꼬띠아르"를 향한 팬심 때문에 이야기가 갓길로 조금 샜던 것 같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 눈을 뗄 수가 없다. 감독 "제임스 그레이"는 이 작품 <이민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오롯이 드러내었고, "마리옹 꼬띠아르"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자막을 향하는 순간적인 시선의 움직임들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1920년대의 무거우면서도 거친 분위기를 스크린에 완벽히 옮겨다 놓은 스크린의 질감까지도 어느 한 부분 놓치고 싶지 않았다.


05.

영화는 1920년의 뉴욕을 배경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조국을 버리고 미국을 향했던 이민자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에바"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대서양을 건너 온 이민자 중 하나다. 하지만 입국장인 엘리스 섬에서 폐결핵에 걸린 여동생은  억류당하고, 자신은 입국을 거부당하면서 "브루노"의 도움을 받아 뉴욕에 정착하게 된다. 간단해 보이는 시놉시스(Synopsis)지만, 이 영화에서 "에바"가 이민자라는 사실과 "브루노"라는 인물과의 만남은 이 작품이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데 가장 큰 동력이 된다.


06.

어떤 사회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되돌아 갈 곳이 없거나 그 사회가 이방인인 자신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 그 대상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Hierarchy of Needs Theory)만 보더라도 "생리적, 안전 욕구"가 충족되기 전에는 "사회적 욕구"를 추구할 수 없다고 한다. 영화 속 "에바"의 모습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브루노"라는 인물을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따라 뉴욕으로 간다. 그녀는 그 당시의 현실을 그만큼 절망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후에 드러나는 내용이지만 미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그녀는 겁탈을 당했고, 친동생과  격리되었으며, 철석같이 믿고 있던 단 하나의 연고(이모)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입국조차 할 수 없는 상황.


07.

하지만 그녀는 뉴욕에 도착해 "브루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떤 두려움을 느낀다. 사실 이 두려움은 입국장에서 "브루노"의 제안을 받았을 때 벌써 느꼈어야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브루노"의 집이 "에바"에게는 처음 보는 낯선 장소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더욱 절박했던 입국장을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약간의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낯설고 불편해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엘리스 섬의 입국장을 벗어나 뉴욕에 입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감정, 같은 이방인이지만 국가 사이의 경계에서 완전한 낙인이 찍혀 있는 "이방인"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찰나의 안도감을 비집고 그제서야 "브루노"라는 존재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기어올라오기 시작한다. 6번에서부터 설명하고 있는 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은 짧은 시퀀스 사이에서 매우 잘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 속에서 그녀가 고해성사를 하던 장면과 더불어 "마리옹 꼬띠아르"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08.

"브루노"라는 인물과의 만남이 이 작품에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에바"라는 인물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겪게 되는 일들의 시작이 되는 것과 별개로 이민자들을 대변하는 "에바"의 "아메리칸 드림"의 목적이 변질되게 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에는 폐결핵으로 병원에 격리된 동생을 구하기 위한 돈이 필요하다는 배경이 깔려 있지만, "브루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녀가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모을 생각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브루노"는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팔 것인지 말 것인지는 "에바" 그녀 스스로의 선택이라 말하고는 있지만, 보는 앞에서 목이 달아난 부모 이후 유일하게 남은 혈육(동생)을 위해 돈이 반드시 필요한 그녀에게 "브루노"의 제안은 이미 거절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물음일 뿐이다. 결국 이로써 그녀가 처음 갖고 미국 땅을 밟았던 "아메리칸 드림"은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물론 그 기점이 대서양을 건너는 배 안에서의 겁탈이었을 지, "브루노"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이었을 지, 엘리스 섬의 입국장을 통과하는 순간이었을 지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09.

감독에 따라, 또한 작품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내러티브 이면에 감추어 놓은 주제와 이야기들을 극의 종반부에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다. "제임스 그레이" 역시 이제껏 다양한 작품들에서 누아르라는 분위기 뒤에 가려둔 요소들이 많은 감독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다르다. "에바"의 고해성사 시퀀스와 엔딩의 "브루노"와 "에바" 두 사람의 대화 시퀀스를 통해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모든 것들, 특히 "용서와 속죄"에 대한 주제들을 마치 영화를 스스로 해설이라도 하듯이 설명하고 있다. 특히 고해성사 장면에서 그녀가 읊조리듯 내뱉는 이민선 내에서의 사건들은 그녀가 입국장에서 "브루노"에게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임과 동시에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몸을 팔 것을 권했던 그를 신뢰할 수 없었던 단초가 된다.


10.

잠시 시선을 돌려 "브루노"라는 인물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 보면 엔딩에서의 마지막 대화에서 드러나듯 그는 기본적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그가 "에바"라는 대상을 두고 시작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녀의 외모에서 시작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의미를 가진다. 다만 그가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버텨온 세상은 사랑이라는 단순한 감정만으로 버텨낼 수 있는 종류의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입국장에서 그녀를 만나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이런  계산뿐이었을 것이다. '그녀를 데리고 가봤자 최선의 경우 무대 위에서 성 상품이 될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몸을 팔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놓치면 그녀를 가질 수 없다.' 그의 주변에 있는 수 많은 여성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어쩌면 그에게 다른 종류의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여성들 중에는 "에바"와 같은 마음으로 그를 따라 뉴욕으로 들어오게 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론적으로 "브루노"에게는 애초에 "에바"를 지킬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은 모두 "올란도"가 돌아오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11.

이모의 집을 찾았다가 다시 추방되기 직전의 상황을 맞이한 "에바"는 다시 수감된 엘리스 섬에서 "올란도"를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올란도"는 "에바"를 사랑하게 되고, 우연의 장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처음 뉴욕으로 데리고 온 "브루노"는 "올란도"의 사촌 형이다. 그런데 문제는 "올란도"가 그 이전에도 "브루노"의 상대를 빼앗았던 전력이 있었다는 것. 위에서  이야기했듯 "올란도"라는 인물의 등장은 "브루노"로 하여금 전에 없었던 행동들을 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쇼 비즈니스를 하고 있던 클럽에서  뛰쳐나오고, 그녀가 캘리포니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모든 일들이 분명히 그녀를 위한 일이기는 하나 오히려 "올란도"와의 경쟁 심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것을 두 번 다시 빼앗기지는 않겠다는 마음 혹은 누군가("올란도")의 강압에 의한 자유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의지를 통한 자유를 주고자 하는 마음.


12.

9번에서 10번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브루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9번의 고해성사 장면을 작품의 중후반부에서 보여주고, "브루노"의 진심이 전해지는 시퀀스를 엔딩에 배치함으로써 비로소 이 작품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 "용서와 속죄"가 진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실 "에바"의 고해성사 장면은 자신의 죄를 신 앞에서 속죄하는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운명 혹은 삶의 굴레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브루노"에 대한 용서가 담겨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녀는 하수구를 따라 도망치는 장면에서 "브루노"가 경관들에게 맞으면서도 자신을 숨겨주고 끝까지 보호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일종의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13.

앞서 8번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브루노"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한 "에바"의 "아메리칸 드림"의 종착역은 결국 돈이 된다. 이것은 분명히 "브루노"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에바"가 그를 대하는 방식들(그녀는 이전에 비해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올란도"를 집에 들이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그녀가 돈에 집착하는 목적이 자신의 여동생을 빼내 오기 위한 것에 있기는 하나, 처음 입국장에서 너무나 절박한 나머지 "브루노"에 맹목적으로 의지했던 그 모습을 "올란도" 앞에서 보이고 만다. 앞선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처음의 "입국장에서 느낀 절박함"이 "올란도(의 돈)에 대한 절박함"으로, "브루노의 집에서 느낀 안도감"이 "브루노의 존재에 대한 안도감"으로 치환(置換)되었을 뿐이다.


14.

엔딩에 이르러 "브루노"와 "에바" 두 사람이 나누는 장면에 이르러서야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다. 특히 이 장면에서 "에바"가 "브루노"에 대한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비단 그가 그녀의 동생을 찾게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의적이었든 타의적이었든 뉴욕에 머무는 동안 "브루노"가  그동안 살아온 세계를 직접 경험한 그녀다. 어쩌면 그녀는 평생을 그 세계에서 버텨 온, 자신이 떠나고 난 다음에도 그런 세계에 홀로 남아야만 하는 그의 인생을 안타까워한 것은 아니었을까? "브루노"에 대한 연민 같은 것들이 "에바"의 눈 속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15.

그리고 "자유의 여신상". 이 영화 속에서 "자유의 여신상"은 그야말로 이민자들이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자 영화의 복선과 결과를 암시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자유의 여신상"은 복선의 역할을 한다. 짙은 스모그가 낀 듯한 배경에 홀로 서 있는 그 건축물은 자신을 향해 꿈을 꾸며 다가오는 이민자들을 자애로운 듯 내려다보고 있지만 그 음침함 때문에라도 결코 그들의 미래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한다. 실제로 "에바"가 "브루노"의 쇼에서 "자유의 여신상"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은 그녀가 꿈꾸던 것들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이 되었는지를 오프닝과 연결시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엔딩에서 뉴욕을 떠나는 "에바"와 그녀의 동생을 똑같이 한 번 더 지켜보는 "자유의 여신상"은 그들을 향해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만 같다. 이렇게 추악하게 더럽혀진 "자유의 여신상"을 일전에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16.

역사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영국으로부터 건너온 "이민자"들에 의해 토착 인디언들이 서부로 밀려나고 완성된 국가다.(프랑스와 영국의 7년 전쟁, 조지 워싱턴의 등장 등 그 이후에 많은 사건들로 인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지만 자세한 역사는 생략하겠다.) 물론 이 작품은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러시아 이민자였던 자신의 조부모가 실제 엘리스 섬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각색한 픽션(Fiction) 일뿐이다. 하지만 현실과 맞닿아 있는 부분들을 연결시켜보면 결국 처음에 "에바"가 입국장에서 겪어야 했던 그 일들은 먼저 도착해 있었던 "이민자"들이 조금 늦게 도착한 "이민자"들에게 행한 꼰대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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