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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05. 2015

#010. 살인의 추억

"봉테일"의 시작을 알렸던  작품.

타이틀 : 살인의 추억
감독 : 봉준호
출연 : 송강호, 김상경, 변희봉, 박노식
러닝타임 : 132분
등급 : 15세 관람가
개봉일 : 2003.04.25 (국내)




01.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오는 내내 긴 여운을 느끼게 해 주는 영화들은 대부분 수작(秀作)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수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라고 해서 끝까지 모두 같은 모습으로 마음에 남게 되는 건 아니다. 마음에 들었더라도 순간의 만족으로 그 여흥이 끝나 버리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작품들은 평생을 곁에 두고 떠 오를 때마다 꺼내 보고 싶을 정도의 각인을 남겨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02.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 <살인의 추억>은 전자에 속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은 전부 전자에 들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마다 약간의 전율이 일 정도로 모두 좋은 영화였지만 두 번 이상 다시 관람했던 작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이 작품 역시 거의 8-9년 만에야 처음으로 다시 꺼내 들었으니 그 기분이 참 미묘하다.(개봉 당시 고1이었던 나는 대학생이 되고서야 이 작품을 처음 접했었다.) 어쩌면 그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무겁고 어두운 부분들이 영화 속에서 다양한 감정들과 희석되어 표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 자체가 대단하다고 느끼게 되는 감정과 별개로 딱히 곁에 두면서 오랫동안 되뇌이고 싶은 종류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03.

이 작품의 타이틀 자체부터가 내겐 굉장히 불편하다. <살인의 추억>이라니. 사실, '살인'이라는 단어와 '추억'이라는 단어는 그리 잘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추억'이라는 단어를 통해 '살인'이라는 행위가 미화되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질 않나. 영화를 만드는 시점에서 본다면 모티브가 되었던 실제 사건을 향한 직관적인 타이틀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이 타이틀은 영화 속 엔딩과 결부되어 아주 섬뜩한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타이틀이 "봉준호" 감독의 대표작에 명명(命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섬뜩한 타이틀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고 말이다.


04.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며 감탄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는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압도적이었다는 것. 사실 1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그렇게 찬사를 받을만큼의 연기력까지는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송강호"라는 배우의 경험과 무게감이 그때와 비교하여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죽을때까지 향숙이만 외치던 "박노식" 씨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05.

두 번째는 바로 내러티브 간의 치밀한 구성이다. 영화 속 커다란 내러티브들이 뒤섞이는 모습은 물론, 작게는 "백광호"라는 인물이 잠이 드는 장소에 대한 설정이나 여중생의 반창고와 같은 소재들까지도 어느 하나 버려지는 것 없이 굉장히 밀도 있게 이용되고 있다. 이미 이 때부터 "봉테일"이라는 닉네임이 퇴색되지 않을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언젠가 한 번 지면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의도하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영화 상영 후 관객들이 찾아내는 부분들은 나조차 섬뜩할 정도다.' 글쎄 이 말인 즉슨, 그가 의도하지 않는 부분들까지도 모두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니 그의 작품에 대한 몰입이 얼마나 밀도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까.


06.

나 역시 위에서 언급한 두 매력이 이 영화에 오롯이 담겨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가 아닌 다른 지점들에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르게 반응하는 두 집단(이성과 비이성)의 대립과 그 과정 속에서 "이성"이 "비이성"을 쫓아가게 되는 모습. 영화 홍보물에서도 "두만(송강호 역)"과 "서태윤(김상경 역)" 두 인물을 스타일이 다른 대표적인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두 인물은 이성(서류, 증거, 논리)과 비이성(정, 직감)을 대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두 인물 혹은 두 개념의 대립은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매력있게 설명된다.


07.

또 한 가지.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갈등 구조의 시작이 연쇄살인이라는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서태윤"이라는 인물의 등장이라는 것을 짚어낼 수만 있다면 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은 한 층 더 깊어진다. 간단히 말하면 '서태윤'이라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외부인의 간섭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보여지듯 "서태윤"이라는 인물의 등장은, 그 이전에 이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관습적인 범인 색출 방식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강우석" 감독의 작품이었던 <이끼>(2010)에 등장하는 마을에서의 고립성에서 보이는 갈등 구조와도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08.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갖고 있는, 혹은 이 과정을 통해 갖게 되는 열등감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 해 볼 수 있다. "서태윤"이 마을에 오기 전까지 이 작은 마을에서 "두만"과 "용구(김뢰하 역)"는 형사의 위치에서 늘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해 왔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서울(두 인물, 특히 "두만"에게는 동경이었던)에서 온 인물로부터 자신들의 방식을 모두 무시받고 기존의 영향력에 침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두만"이라는 인물은 지역적 격차 혹은 서울 경찰들의 방식에 대해 갖고 있던 열등감을 드러내게 된다.(이 말은 반대로, "두만"이라는 인물 역시 자신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용구" 역시 자신이 갖고 살아왔던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형사라는 직업을 통해 가려진 채로 살아오다가 "태윤"에 의해 다시 드러나게 되고, 바로 이런 부분들이 술집에서 터지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09.

그렇다고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엘리트로 보여지는 "태윤"에게도 열등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위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열등감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촉발되는 열등감이라면, "태윤"의 열등감은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향(증거에 근거한 철두철미한 형사)과 "두만"의 방식(직감에 근거한 형사) 사이의 비교에서부터 출발하는 종류의 것일 것이다. 사건과 관련된 범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무시했던 비이성적 방식의 "두만"이 변태를 찾아내 검거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고, 결국 그 흔들림은 엔딩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10.

영화에서 잠깐씩 등장하는 데모 장면들은 표면적으로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실제 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들이 기호적 상징성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영화 속에서 파상풍으로 인해 다리를 잃게 되는 "용구"와도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수술대에 오르기 전까지 "용구"의 다리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범죄가 확실하지 않은 용의자들을 압살하는 상징적 도구였다. 그런 그의 다리가 절단된다는 것은 그 시대 민중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던 탄압이 결국 무너지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를 만들었던 90년대의 시점에서 영화 속 시점인 80년대 중반에 보내는 어떤 메세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11.

9번에서 잠깐 이야기 했던 "태윤"이라는 인물의 내적 변화도 이 영화에서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물론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송강호" 역의 "두만"이라는 인물이었지만,  인물의 입체성 정도에 기반해서 본다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오히려 "태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또한 서서히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잔혹함의 탈을 쓴 교묘함 앞에서 우리는 비이성과 이성 사이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된다.


12.

영화 속에서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여중생과 "설영(전미선 역)"이 범인의 눈 앞에서 교차해서 지나가고,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평화로운 미래를 살아가고 있는 "설영"의 모습을 통해서는 '이 영화가 정말 비관적인 시선에서 만들어졌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다. "설영"이라는 인물이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만약에 그 중학생도 살아 있었더라면 "설영"이라는 인물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달까. 그래도 영화 속에 이 장면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살해를 당한 인물들의 삶이 의미없이 소멸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되새겨지게 되는 것 같다. "설영"의 삶처럼 우리들 역시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에서 결코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시대를 통과해 왔기에 그들 대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13.

3번에서 잠시 언급했던 <살인의 추억>이란 타이틀의 섬뜩함을 다시 한 번 꺼내볼까? 엔딩 신에서 "두만"은 자신이 처음으로 사건을 발견했던 수로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한 아이를 통해 바로 얼마 전, 자신이 결코 잡을 수 없었던 범인도 그 자리를 찾아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범인은 옛날에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와 봤다는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두만"과 그 범인. 두 사람에게 <살인의 추억>이란 과연 어떤 의미로 남아 있었던 걸까.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단 하나의 범죄가 다른 두 추억이 되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이 글은 2013년부터 작성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동일 연재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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