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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ul 12. 2016

#084. 환상의 빛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작점을 들여다보다.


01.


얼마 전 보게 된 티저 영상 하나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정말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구성이었지만, 그 영화가 갖고 있는 장점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심지어 이 티저 영상은 국내에서 제작된 것인지, 현지의 영상에 번역만 입힌 것인지 알 수 조차 없었지만, 그냥 그대로 영화 속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만큼이나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의 티저 영상이다.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뒤로 감독의 가장 최근 작품부터 역순으로 필모그래피가 거슬러 올라가던 그 방식은 마치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의 '플래시 백' 장면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이 작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것을 알리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평소 감독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인 탓도 있지만, 이 티저를 보는 순간 나는 그냥 빠져버리고 만 것 같았다. 누군가의 처음을 함께한다는 것의 두근거림.


이 영화 티저 첫 부분에는 이렇게 감독의 작품들이 하나하나 새겨진다.


02.


감독에게 있어 데뷔 작품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진다. 첫 작품에서 보여지는 잠재력과 스타일, 영상미 등의 다양한 요소들은 관객들에게 다음 작품에 대한 준거점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고, 감독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선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경우는 데뷔작에 대한 그런 준거점이 형성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자신의 색깔이 언제나 동일했기 때문에 이 작품 <환상의 빛>이 상대적으로 적은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도 있지만, 현재 어느 때보다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 이 시점에서 그의 첫 시작점을 만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의 첫 시작인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스토리가 절제되어 있는 영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주인공인 "유미코"(에스미 마키코 역)를 중심으로 어떤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들이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단순히 스토리에 의존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 이 메시지는 스토리 외에도 카메라 시점, 행동, 풍경 등을 통해 전달되기도 한다. - 움직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 <환상의 빛>이 갖고 있는 무게감이 결코 가볍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03.


언제나 그랬듯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이 갖고 있는 분위기와 톤의 느낌은 분명히 이 작품에도 녹아 있다. 작품을 더해가면서 변화해 온 감독이라는 느낌보다는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던 자신만의 색깔을 조금씩 더 진하게 그려온 감독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이후 그가 내 놓은 다양한 작품들의 이미지가 이 영화 <환상의 빛> 속에 담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확인되지 않은 개인적 느낌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이 장면에서 그의 수 많은 작품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원더풀 라이프>에서 비춰졌던 건물 외벽에서 들여다보는 카메라 워킹이 그랬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란히 걷던 장면이 그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대청 마루 신이 또 그랬다. 버스 정류장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유미코"의 모습을 보면서 <걸어도 걸어도>의 할머니를 떠 올린 것 역시 우연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렇다. 그는 이미 벌써 자신의 첫 작품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만들어 나갈 '히로카즈 월드'의 구상을 끝마친 것 같다. 첫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평가의 준거점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나는 앞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해 나갈 것이다. 라고 먼저 이야기 하는 듯 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떠오르고 말았다.


04.


영화의 첫 시작에서 다리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할머니를 적극적으로 붙잡지 못하고 뒤돌아 섰던 어린 "유미코"는 그녀의 할머니가 돌아오지 못한 일을 두고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로 돌렸을 것이다. - 정확히 언급되지는 않고 있지만 정황 상 그녀의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 누군가가 집을 떠나고, 자신의 곁에서 멀어지는 모든 장면에서 언제나 문 밖까지 마중을 나오던 그녀의 모습 역시 자신의 잘못으로 누군가를 잃어버렸다는 자책 가득한 심리에서 기인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그녀였기에 갑작스런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 역)의 부고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죽음은 아무런 전조 현상도 없이 발생한 자살이 아니었던가. 늦은 밤 집을 방문해 남편의 부고를 알리던 경찰을 따라간 곳에서 그의 유품을 보고 "이쿠오"는 어디에 있느냐고 되묻던 "유미코"의 모습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또 한 번 잃어야만 했던 존재의 잔잔하지만 커다란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언제나 문 밖까지 뛰쳐나와 배웅한다.

05.


그녀는 그렇게 또 한 번의 커다란 슬픔 이후 - 아마도 시대적 이유에 의한 어머니의 채근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 "타미오"(나이토 타카시 역)라는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된다. 세상을 떠난 전 남편 "이쿠오"와 평생을 함께 자라온 '오사카'를 떠나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게 된 "유미코"에게 "타미오"가 살고 있던 어촌 마을의 모든 것은 생소하고 낯설다. 자신을 소개하러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는 남편의 모습도, 그의 집에서 열린 환영 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해야 하는 일도, 이른 아침 부엌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웃 할머니들의 모습도 - 그녀는 오사카에서 그런 장면을 본 일이 없다. - 모두 말이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장면들 다음에 바로 그녀의 아들과 남편의 딸이 들판을 뛰어다니며 보여주는 천진난만함을 제시한다. 어딘가에 쉽게 적응하고 마음을 내어줄 줄 아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어른들의 속성을 이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토리 상으로는 마음의 상처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유미코"의 처지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06.


물론 "유미코"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겪어낸다. 가슴으로 안은 딸의 머리를 직접 잘라주며 정을 붙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관계도 만들어 가고, "이쿠오"의 빈자리를 대신해 주는 남편 "타미오"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새로운 사랑을 싹 틔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오사카'로 돌아 온 그녀가 전 남편과 관련된 사건들을, 함께 나눈 추억들을 되짚어 가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것과 별개로, 결국 그 일들을 지우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한 번 밖에 쓰지 않은 물건과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이 같을 수 없듯이, 누군가 한 번이라도 새겨졌던 그 마음이 시간이 지난다고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녀 역시.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덤덤히 살아낸 것과 별개로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까지 그에 대한 원망과 미련, 사랑과 같은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미코"의 노력들이 무색할만큼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새로운 환경들을 받아들인다.


07.


어렵게 다잡은 마음이 '오사카' 방문을 통해 다시 한 번 뒤 흔들리고, "유미코"는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낯선 마을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새 남편 "타미오" 역시 갈수록 그녀에게 처음과는 다른 -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굉장히 젠틀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 모습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물론 "타미오"의 입장에서도 아무런 설명없이 힘들어 하는 그녀를 보며 많은 생각들을 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은 남편 앞에서, 아니 밤이 늦도록 연락이 없는 그의 - 먼저 세상을 떠난 "이쿠오"의 그 날처럼 - 모습 앞에 그녀는 결국 자신의 감정을 터뜨리고 만다. 물론 아직까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다음 날, 마을을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서 버스정류장까지 서성이지만 그녀의 선택은 이번에도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인내하는 것.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라져 버린 존재에 대한 남겨진 이들의 감정을 그녀는 어쩌면 헤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 버스정류장 신은 훗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죽음'과 관련된 의미들, 주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게 되는 이들에 대한 상징을 내포하는 대상이 된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08.


마을을 방황하다 마주친 마을의 장례 행렬을 따라 도착한 바닷가. 그녀를 찾아 온 남편에게 "유미코"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며 전 남편이 왜 죽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돌아온 "타미오"의 한 마디.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유미코"와의 결혼이 재혼임을 고려했을 때, 영화 속에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그 역시 어떤 사건을 겪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자꾸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날 것 같다는, 이 곳의 생활이 벌써 지루해졌냐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첫 결혼 상대였던 전 부인이 어떤 모습으로 그의 곁을 떠났는 지 조금 알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 점에서 그가 그녀에게 던진 저 한 마디 대사는 의외로 텁텁한 끝맛을 남기며, 정말 저 말 그대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삶의 무거운 지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가 그랬던 것만큼 그에게도 어떤 아픔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이 두 사람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런 것 하나 쯤은 있을 수 있음을. 누구나 그런 것 하나 쯤은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 아픔이라는 것이 과연 "유미코"에게만 새겨져 있었을까?


09.


영화의 중후반부쯤에 이르러, 아들의 손을 잡고 시장을 찾은 "유미코"가 아들이 자전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들은 지금 자신의 아버지를 "타미오"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진짜 아버지는 자전거를 좋아했던 "이쿠오"였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 것. 결코 모르고 있었던 사실은 아니지만, 잊고 지냈던 사실이 눈 앞에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의 아주 짧은 이 한 부분을 이 당시부터 오랫동안 고민을 해 왔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들이 '하나의 아들과 두 아버지'라는 소스로 인해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10.


누군가의 처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의외로 긴장이 된다. 그 동안 지켜봐 온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이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은 조금도 이질감이 없었다. 글쎄 이 작품 <환상의 빛>을 시작으로 필모그래피를 순서대로 따라왔다면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또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의 다른 모습들을 보고 시작점으로 되돌아 온 이 방향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들은 바로 이 작품 <환상의 빛>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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