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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ul 27. 2016

#086. 부산행

좀비를 통해 하고 싶었던 사람 이야기.




01.


영화의 장르를 선정하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외로 중요한 작업이다. 각각의 장르에는 관객들이 기대하는 요소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신선한 소재나 화려한 연출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이라도 이 기대감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줄 수 있어야만 제공할 수 있는 만족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많은 포털 사이트에서 하나의 작품에 수많은 장르를 갖다 붙이거나, 특정 작품의 홍보 과정에서 '잔혹 액션 스릴러' 라던가, '감성 멜로 느와르' 라는 식의 합성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것들 역시 최대한 다양한 장르에 해당 작품을 노출시킴으로써 관객들이 가질 수 있는 기대감의 스펙트럼을 최대한으로 늘여 놓으려는 데 이유가 있다. 이와 정반대로, 어떤 작품이 특정 소재 및 장르로 국한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것 역시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 A는 B이다.'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순간 관객들의 시야는 맹목적으로 그 부분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그것을 제외한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을 받아들일 여지는 제거되고 말기 때문이다. 오늘 이야기할 이 영화 <부산행>이 개봉 전부터 '한국형 좀비 무비'라는 단어에 몰두되는 것이 우려스러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흥행과 무관하게 이 작품을 과연 '좀비 영화'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푸근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냉철한 시선을 유지할 줄 아는 감독이다.


02.


이 작품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일반 관객들에게 다소 생소한 인물일지 모르지만, 국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다져온 바 있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상상하게 되는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기존의 이야기들 반대쪽에서 현실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잔혹하고 서늘한 문제점, 그리고 추악한 인간의 심리에 대해 가감 없고 직선적인 태도로 문제의식을 제시할 줄 아는 감독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사회의 양극화에 대해 다루었던 <돼지의 왕>(2011), 부조리한 병영 내 위계문화에 대한 이야기 <창>(2012), 그리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단 종교와 이를 둘러싼 이들의 충돌을 그린 <사이비>(2013)은 그의 성향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연상호" 감독의 그런 시선은 그가 처음 시도한 실사 영화 <부산행>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전 국민이 좀비로 돌변하고, 이들을 피해 살아남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도 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잔혹한 이기주의'와 '무차별적인 공격성', 그리고 '쉽게 선동되는 인간의 나약함' 등에 대해 가감 없는 이야깃거리를 던진다.


저거.. 어린이 날에..


03.


이 영화 속의 주인공 "석우"(공유 역)는 잘 나가는 주식 펀드매니저다. 아내와 이혼해서 살면서 딸 "수안"(김수안 역)과 함께 살지만 도무지 자신의 일 밖에 모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수안"은 부산에서 홀로 떨어져 사는 엄마를 그리워 하고, 이번 생일 선물로 엄마를 만나고 싶어한다. 그 동안 딸과의 관계에 소원했던 아빠 "석우"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 난감했던 두 대의 Wii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 이번 기회에 딸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한다. 하지만 서울역으로 향하는 도중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게 되고, 아무런 의심없이 탑승한 부산행 KTX 열차 내에서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작성한다면 이 정도의 내용을 제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내용만 보면 그 동안 주기적으로 등장해 왔던 <해운대>(2009), <연가시>(2012), <타워>(2012), <감기>(2013) 등의 다른 재난 영화들과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한국형 좀비 영화'라고 알려지고 있는 것에는 이런 작품들과의 거리를 두고 싶은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04.


사실 나는 이 영화가 '한국형 좀비 영화'라고 소개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한국형 좀비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에 좀비가 등장할 것'과 '다른 국가의 좀비물과 다른 한국 좀비영화만의 특색을 가질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 <부산행>은 그 동안 있어왔던 수 많은 좀비 영화들의 전형적인 공식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재난 영화들과 동일한 느낌을 받는 까닭은 이 지점의 전형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국내에서 이전에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가장 최근에는 <이웃집 좀비>(2010), <신촌좀비만화>(2014)라는 작품에서도 좀비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동안 국내에서 제작된 좀비물들과는 비용적인 측면, 오락적 요소 등의 여러 측면에서 이 작품 <부산행>이 월등히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좀비들에게 '한국형'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연상호" 감독이 그 프레임 속에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다양한 갈등과 이기주의 등의 현실적 문제들을 투영시키고 있다는 점을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05.


좀비라는 존재의 역사적 개론은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을 예정이다. 다만 우리가 이들에 대해 어떤 두려움을 갖게 되는 이유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질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것에 있다. 또 다른 영화 <눈 먼 자들의 도시>(2008)를 생각해보자. 이 작품에는 좀비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먼 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한 여인(줄리안 무어 역)은 홀로 앞이 보이는 상태로 그 도시를 헤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영화 <부산행> 속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거의 동일하다. <눈 먼 자들의 도시> 속 "줄리안 무어"가 겪게되는 상황들이 좀비라는 이상 생명체가 가득 찬 기차 안에 표류하게 된 <부산행> 주인공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좀비'라는 존재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열차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이 사회의 모습을 빠른 시간 안에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자, 비이성적인 대상으로부터 발생한 두려움을 통해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들을 여과없이 드러내도록 만드는 장치가 바로 '좀비'인 것이다.


영화 <눈 먼 자들의 도시>.


06.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이유는 이 영화 <부산행>에 등장하는 좀비들에게는 "조지 로메로" 감독 이후 전통적으로 그려지는 좀비의 기본적인 세 가지 특질 중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고, 이 부분은 "연상호" 감독이 이 작품에서 하고자 하는 주된 메세지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먼저 좀비의 기본적인 세 가지 특질은 다음과 같다. '그 과정은 다르지만 한 번 죽었다 깨어난 존재들이라는 것', '같은 좀비 및 인간을 먹는 행위를 한다는 것', 그리고 '강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는 것'. 하지만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죽었다가 깨어나지도 않고 - 물리는 순간 바로 좀비가 된다 - 인간을 먹는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강한 전염성만 갖고 있을 뿐이다. 감독이 이 영화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전염성'이라는 부분인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 좀비는 순식간에 여론을 형성하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에 호도되는, 그리고 다른 쪽을 공격하기에 급급한 사회의 아픈 부분들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들이 좀비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이 작품을 '좀비 영화'라고 부르지만, 좀비가 되고 난 이후에도 '인간의 선한 눈망울'을 갖고 있던 할머니의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내고자 하는 진짜 메세지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결국 "연상호" 감독이 좀비라는 소재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좀비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07.


이 작품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위해 그려졌다고 본다면, 역시 각각의 인물들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전체적으로는 "석우"와 "수안"의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내러티브가 완전히 삭제된 채 기차 내에서의 이야기만 보여주다 보니 서로 분절되는 부분들이 발생하고 만다. 이 영화 <부산행>의 프리퀄 격인 애니메이션 <서울역>까지 준비했다는 것은 전체 그림의 연결 고리를 기획 단계에서부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일 텐데, 이 부분을 놓치고 만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 가지 더, 개봉 이후 상당히 많은 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상화"(마동석 역)의 완급 조절과 "영국"(최우식 역)과 "진희"(안소희 역) 커플의 연기력 논란은 실사 영화를 처음 연출하는 "연상호" 감독의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하나의 작품 속에서 완급 조절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 완급 조절을 통해 전체 그림은 클라이막스를 향해 고조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 부분이 굉장히 약한 편이다. 또한 "상화"와 "영국" 커플의 이야기는 설정 자체가 너무나 작위적 - 좀비가 된 친구들을 때리지 못할 정도로 유약한 인물이 여자를 구하기 위해 화장실 칸으로 향한다는 설정 - 이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들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낼 심산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에 대비되는 어른들의 추악한(?) 사랑이 있었다고 보기에도 힘들기 때문에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연기력 논란 이전에 그의 이야기는 다소 빈약하다.


08.


영화의 시작과 함께 가장 먼저 눈에 두드러지는 인물은 의외로 딸인 "수안"이다. 어른들의 일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아빠에게 혼이 날까봐 이불 속에 숨어 엄마와 통화를 하는 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안"이 자신의 부모님에게 일어난 일을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른인 "석우"의 눈이 아닌 아이인 "수안"의 눈에 먼저 보이게 되는 것들 - 서울역으로 향하는 자동차에서 손바닥 위로 내려 앉은 잿가루. 그리고 서울역에서 열차에 뛰어오르던 좀비 - 는 아이들의 시선을 대변하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캐치하는 아이들의 시선과 마음. 그리고 이 시선은 어른들이 쉬쉬했던 부모의 이혼 문제와도 결부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좀비가 되어 가는 "석우"를 향해 가지 말라고 소리치던 "수안"의 모습을 돌이켜보면, 결국 아이가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가고 싶어했던 이유 역시 아빠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빠가 아닌 엄마만이 해 줄 수 있는 사랑이 그리웠기 때문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수안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장면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09.


앞서 이야기 한 인간의 이기주의적인 측면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장면은 대전역에서 좀비들과 조우한 뒤, 생존자들을 위해 끝까지 유리문을 사수했던 인물들과 그들을 버리고 열차를 출발시키는 이들의 모습이다. "석우"와 "상화", "영국"이 좀비가 득실거리는 객실을 통과한 이후에 등장하는 두 집단의 갈등 역시 바로 이 장면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우리 사회가 겪어왔던 많은 사건 사고들과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희생하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를 지켜내고자 보상 없는 노력들을 기울이는 소수와, 그들을 함꼐 도우지는 못할 망정 나의 안전을 확보한 뒤로는 그들의 목줄마저 쥐고 흔들어대는 이들의 모습. 열차에 처음 나타난 좀비 떼를 피한 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수안"에게 "석우"가 했던 말. "신경 쓰지 마. 각자가 다 알아서 하는거야" 라는 이야기가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10.


물론 이 영화 속 대부분의 갈등과 이기심은 "용석"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잔혹한 인간의 이기심을 밑바닥부터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 캐릭터는 적대적 무리를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행위도 무섭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타인(개인)을 아무런 고민없이 사지로 몰아넣어버린다는 - 기관사, 승무원, "진희" 등 - 점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집단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는 군중 심리에 좌우되던 다른 시민들과 바로 다른 점 역시 이 부분에 있는 것이다. 그런 그조차 마지막에 좀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집에 가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하니, 인간의 나약함 역시 이 캐릭터 속에는 함께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권위(천리마 고속 사장)와 인간의 나약함과 그리고 잔혹한 이기심.


이보다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더 만나 볼 수 있을까?


11.


반대로 "노숙자"(최귀화 역)은 그런 "용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대전역에 내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용석"과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좀비에 맞서 싸우고,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가면서 - 캔을 밟으면서 식겁하기도 했다. - 다른 존재와 함께하고, 누군가를 지키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노숙자'라는 캐릭터는 이 인물의 설정과 아주 잘 매칭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 역시 그런 과정 속에서 - 어쩌면 "상화"의 모습에서 배운 - 습득한 가치일 것이며, 이는 단절된 우리 사회의 관계성 회복을 상징하는 모습으로도 비춰진다.


이렇게 갈거면 뭣하러 다 퍼주고 살았어..


12.


두 할머니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인길"(예수정 역) 할머니가 좀비가 된 모습을 목격한 "종길"(박명신 역) 할머니는 결국 이기적인 생존자들의 열차칸을 열어버리고 만다. 그 전까지는 "석우"를 비롯한 다른 생존자들을 향해 적대심을 보이던 무리 속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 "인길" 할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는 덜하지만, 가까이 지내던 이의 죽음 앞에서는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이 사람. 소중한 사람을 그렇게 잃은 뒤에야 자신의 모습이 오롯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선택은 자신의 죽음으로 행동의 죄를 씻으려고 하는 공멸로 귀결된다. "용석"이 군중이라는 덩어리를 보여주었다면, 할머니의 모습에서는 군중 속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본인에게 큰 피해가 돌아오지 않으면 쉽게 눈을 감고 마는 군중 속 개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13.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수안"과 함께 서울역으로 향하던 "석우"는 딸의 노래 이야기를 꺼내면서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이 대사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담기게 된다. 가지 말라며 붙잡는 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좀비로 변한 자신이 딸을 해치게 될까봐 기관실의 문을 닫고 철로로 몸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결국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하겠다 - 딸을 지키겠다 - 는 아버지의 의지가 담겨 있다. 딸 앞에서 모든 것을 이야기 해 줄 수는 없었지만 엄마를 찾는 자식의 모습을 보며 아빠의 마음이라고 괜찮을 수만 있었을까? 부모로서 결혼 생활을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끝까지 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담겨 있는 듯 보였다. 아내 "성경"(정유미 역)과 뱃속의 아이를 위해 좀비들에게 몸을 내던진 "상화"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마지막까지 딸을 포기할 수 없는 아빠..


14.


그리고 엔딩. 영화의 메세지에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터널을 향해 걸어 나오는 두 인물은 사살되었을 때 가장 의미 있는 메세지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러닝 타임 내내 줄곧 표현하고자 했던 문제 의식은 바로 그런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감독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이 아닌 상당히 보편적이고 완충적 태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이 장면을 신파적인 연출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연상호" 감독은 그런 극단적인 결말을 이용하지 않아도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공개될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통해 남은 이야기를 조금 더 직설적으로 표현했을 지도 모르고. 열차 내에서는 그럴 수 없었지만, 결국 우리 사람을 보듬을 수 있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해 낸 것이다.


15.


다소 빈약한 캐릭터 설정, <설국열차>(2013)의 그것과 비교해 너무나 체계적이지 못한 열차 액션 등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일각에서 폄하되고 있듯이 쉽게 무시할만한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헐리우드 좀비물의 전형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모방은 또 다른 창조를 낳는다는 측면에서는 국내에서 이런 작품이 시도 되었다는 사실과 그 만듦새를 평가절하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 작품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성적은 이미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지붕을 뚫고 나가는 모습이다. New의 선택이 또 한 번 대중의 호기심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다만, 일전에 언급했듯이 마케팅 방향에 있어서 근시안적인 태도를 취했던 부분은 이 작품을 둘러싼 수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먼저 고민해봐야 한다. 전에 없던 '유료 시사회'라는 꼼수로 정식 개봉일보다 일주일이나 먼저 개봉을 하고, 실제로 정식 개봉일에 개봉했던 <데몰리션>, <환상의 빛>, <에브리바디 원츠 썸> 세 작품을 합친 것보다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면서 58만 명이나 미리 끌어다 삼키던 모습. 굉장히 안타까운 모습들이다. 바닥을 지탱하는 꼭지점 부분, 그 곳의 최소한의 균형마저 무너져버리면 역삼각형 구조의 피라미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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