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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ug 02. 2016

#087. 이레셔널 맨

이성적인 삶이란 무엇에 근거할 수 있는가?




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불안한 상태였다


01.


이 영화의 이야기에 앞서 "우디 앨런" 감독의 전작인 <매치 포인트>(2005)의 한 장면이 떠 오른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개인의 도덕성과 죄의식'이라는 부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끌어 냈다. 코트 위의 네트를 넘나들던 테니스 공 하나와 함께 시작된 영화의 처음, 그리고 대사. '시합에서 공이 네트를 건드리는 찰나 공은 넘어갈 수도 그냥 떨어질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공은 넘어가고 당신이 이기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패배한다. '는 이 지점에 대해 그가 갖고 있는 가치관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디 앨런" 감독 역시 아직까지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과 이번 작품 <이레셔널 맨>(2016)을 통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사실이다.


02.


일반적으로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들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다루었던 주제들과 그 궤적을 함께 한다는 평을 받는다.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과 죄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총체적으로는 인간의 개인적인 내면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면의 상극을 작품 속 인물을 통해 체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 <이레셔널 맨>의 말미에 "질"(엠마 스톤 역)이 몰래 들어간 "에이브"(호아킨 피닉스 역)의 서재 책상 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발견하게 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우디 앨런"의 작품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과 동일한 주제를 나누고 있다고 해서 그 방식까지도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디 앨런"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이 결여되어 있거나 회피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속 인물들에 비해 조금 더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그려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의 강의 장면은 영화를 지지하는 다양한 철학들로 이루어져 있다.


03.


영화와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칸트"의 세계관을 포함한 그의 '정언 명령'은 이 작품을 이끌고 나가는 데 있어 하나의 커다란 뼈대가 된다. 먼저 "질"과 "에이브"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조우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에이브"는 이와 같은 철학들이 단순히 언어의 자위행위일 뿐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의 의견을 서술한 레포트를 쓴 "질"은 "에이브"의 눈에 띄게 되고 이를 통해 서로 알아가게 된다. 그녀의 레포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명확히 서술되지 않고 있지만, 영화의 후반부를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행동은 그녀의 가치관이 - "에이브"의 도덕성과 관련된 - 분명히 "에이브"의 가치관과 반대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영화 전체에 걸쳐 "에이브"의 행동이 어떠한 맥락을 근거로 이루어지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레퍼런스가 되어 주는 것 역시 이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긍정과 부정'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 싶지만, 이미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의한 면죄부에 더욱 기대는 행동을 취한다. 이는 애초에 "칸트"가 이야기했던 지점과 "에이브"가 생각하는 현실의 문제가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칸트"는 0이 아니면 1인 완전성과 불완전성에 대해 생각하지만, "에이브"의 경우에는 직감의 영역, 1 혹은 100 그 사이의 수많은 수들의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


04.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을 나누기 전에 꼭 반드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의욕을 가지지 못하던 "에이브"가 레스토랑에서 엿듣게 된 뒷 테이블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반색을 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토마스 스팽글러'라는 부패한 판사를 자신이 정의롭게 처단하는 것에 그는 삶의 의욕을 다시 불태우게 되는데 이를 단순히 극의 흐름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기에는 이 영화의 구성이 너무도 치밀하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도무지 어느 한 구석도 버릴만한 컷이 없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체 러닝타임을 다시 되뇌어봐도 모든 장면이 서로의 의미를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한 편의 작품으로 모든 것이 스스로 해설이 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와서, 그는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 - 아내의 외도이든, 친한 친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 무엇이 사실인지도 잘 모르겠다. - 으로 인해 삶의 의욕을 잃기는 했지만 다른 모든 쾌락적 욕구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실패하기는 했으나 그는 분명히 "리타"(파커 포시 역)와의 사랑을 탐하면서 성적 욕구에 대한 의욕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이 정립한 개념들을 도서화 하고자 하는 성취에 대한 욕구를 보이기도 한다. 말 그대로 비이성적이지만 학생들 앞에서는 '러시안 룰렛'이라는 게임의 시도를 통해 확률이 주는 극단적인 욕구의 해소를 갈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의욕을 찾지 못하던 그가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삶의 모든 의지를 잃은 상태였다. 그 사건을 듣기 전까지..


05.


단히 말하자면, 이 "토마스 스팽글러"라는 작자를 살해하는 일이 자신이 생각하는 논리 - "칸트"의 말과는 달리 거짓을 이야기하면서도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 - 와 가장 부합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영화 속 그의 말과 같이, "에이브"는 자신이 "토마스 스팽글러" 판사의 죽음으로부터 전혀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존재이며, 그의 죽음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와 그가 이 대학의 철학 교수로 부임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뒷 이야기 혹은 실제의 삶에 대해 험담을 나누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의 실제 과거가 어땠는지의 여부와는 달리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감추고 자신의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이 일이 "에이브"에게 얼마나 큰 동기 부여가 되는 지를 생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가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개인의 '직감'이라는 부분. 레스토랑에서 우연한 기회에 엿듣게 된 이 상황을 자신이 삶을 다시 정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는 자신의 '직감'이 정확히 적중했을 때 그가 느끼게 되었을 만족감은 다른 어떤 경험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 이후, "리타"와의 잠자리가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언제나 직감을 믿으라고 했지.


06.


누군가를 살인하는 행위의 문제를 떠나서 "에이브"라는 사람이 정립된 이론과 추론의 영역의 반대편에서 직감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놓지 않는 것 역시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그런 그를 철학과 교수로 등장시키는 감독의 계산은 언제나 그랬듯 상당히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에이브"와 "질"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지 알려주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직감과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찾은 놀이공원에서 "에이브"는 룰렛판의 17번을 정말 말 그대로 직감에 의해 선택해 내지만, 시간이 흘러 "에이브"가 살인자라는 것에 대해 직감했다는 "질"의 말은 앞서 "에이브"가 보여줬던 본능적 직감과는 조금 다르다. 이미 뉴스와 다양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실존적 선택'이 "질"의 직감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질"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직감이란 "에이브"라는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휘둘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감정적 부산물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언급했던 두 사람의 다른 가치관은 극의 외부적 요소 - 두 사람의 1인칭 시점이 대사를 통해 번갈아 등장한다. - 에도 큰 영향을 받아 결국 "에이브"가 마지막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를 암시하는 장치가 된다.


이들의 감정과 별개로 두 사람은 온전히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


07.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은 "에이브"가 살인자로 밝혀지고 난 뒤, "질"과 "리타"의 대화에서 두 사람이 취하는 전혀 다른 두 스탠스로 그 모습을 이양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에이브"가 누군가를 죽였든 말든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과 함께 이 현실을 떠나 주었으면 좋겠다는 "리타"와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질"의 태도. 물론 한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유부녀, 또 한 사람은 미래가 창창한 대학생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두 사람의 다른 변수들이 같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과연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것이 개인의 어떤 지점에 의해 좌우되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것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플라토닉적 접근, 에로스적 접근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 역시도 개인의 '본능적 의지'와 '도덕적 의지'의 영역에서 해석될 여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08.


결국 "에이브"에 의해 살해를 당하게 되는 "토마스 스팽글러" 판사에 대한 "질"의 이야기는 - 밖에서는 부패한 판사일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그의 가정에서는 또 하나의 다정한 아버지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 또한 우리를 언제나 고민에 빠뜨리게 만드는 '정의와 도덕적 자격'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한다. 어쩌면 "마이클 샌델"이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야기했던 '공리주의의 딜레마'와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다수의 희생자들을 위해 그를 죽이는 것이 과연 마땅한 일인지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 "에이브"는 자신의 논리를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라던 그의 대사를 떠올려보자. "토마스 스팽글러" 판사를 살해해야겠다는 그의 의지는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내고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정의한다는 이유로 개인적 타당성을 만들어 냈다. 그는 현재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상태이며 목적이 확실하기에, 그 현기증으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을 느낄 수 없는 상태에 와 있는 것이다.


09.


연인이자 제자였던 "질"에 의해 자신이 살인자라는 것을 들키고 난 이후 "에이브"는 그 어느 때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결국 자신의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적 의지"와 그녀의 말에 따라 자신의 죄를 자수하고자 하는 "도덕적 의지"에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에이브"가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그것과 다른 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내면적 성찰이 개인의 양심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하면, "우디 앨런" 감독의 인물들은 외부적 상황들로부터 그 근거를 찾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질"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녀가 "에이브"에게 먼저 자수를 종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다른 사람이 그 대신 체포가 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이라는 뉴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녀 역시 그의 죄를 눈 감았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만약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10.


그는 결국 자신의 "본능적 의지"와 "도덕적 의지"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한 사람, "질"을 제거하고 세상에서 자신의 비밀을 영원히 묻어버리기로 한다.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본능적 의지"에 더 충실한 모습들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자신의 삶을 유지할 동력을 이 사건에서 끊임없이 만들어내 왔다. 그를 살해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살인자로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칸트"의 이야기와는 달리 그의 거짓은 세상을 정의롭게 만드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에 죽는 것은 "에이브' 자신이다.


11.


나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이레셔널 맨"이라는 것이 그가 "질"을 죽이기로 결심한 이후부터 죽기 이전까지의 시간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전까지의 영화 속에서도 그는 일반적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충분히 비이성적(Irrational)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때의 비이성적인 모습은 외부에서 그를 바라봤을 때 투영되는 모습일 뿐이다. "에이브" 한 사람만 놓고 본다면 그가 과거의 어떤 모습과 비교해서 비이성적인지 판단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다. 대신 "질을" 죽이기로 한 시점의 비이성적인 모습은 그가 "토마스 스팽글러" 판사를 죽일 때의 모습 - 상당히 치밀하고 계획적이다. - 을 생각해 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했던 이의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결국 감독의 이야기는 다시 <매치 포인트>의 그것으로 되돌아 온다.


12.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 방문했을 당시 "질"이 상품으로 고른 손전등을 밟고 미끄러져 "에이브"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결국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매치 포인트>의 그것과 동일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추론, 계획적이고 준비된 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에이브"가 돌림판 앞에서 17번을 골라 "질"이 그 대가로 둥근 형태의 손전등을 고른 일이 결국엔 "에이브"의 계획된 지점을 무너뜨리는 즉흥적인 직감의 시발점이었다는 것 말이다.


언젠가부터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냉소적이다'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왠지 모르게 씁쓸한 뒷 맛이 입 안에 텁텁한 채로 남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번 작품 <이레셔널 맨> 역시 그 부분만큼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텁텁한 씁쓸함이 "에이브"가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의 갈등에서 시작되는 것 같지는 않다. 말 그대로 '이레셔널 맨'의 모습을 통해 결국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이성적인 판단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아니 조금 더 나아가 과연 이성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나 역시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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