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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07. 2015

#013. 한여름의 판타지아

가장 현실적인 영화에서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나다.




01.

3~4년  전부터였던 것 같다. 소위 '독립영화' 혹은 '다양성영화'라고 불리고 또 분류되는 작품들 중에 기억 속에 아주 선명하게 남는 타이틀이 생기기 시작한 게 말이다. 특히  지난해는 <한공주>, <족구왕>, <도희야> 등 많은 작품들이 존재감을 남겼던 것 같기에 그 잔상이 더하다. 그리고 이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어쩌면 올해 가장 주목을 받을 수 있을만한 작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작품이다.


02.

이 영화를 연출한 "장건재" 감독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영화판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가 직접 연출을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2000년도부터 많은 작품의 뒤편에서 촬영 및 메이킹 필름을 담당하고 때론 단역 배우로까지 참여하면서 자신의 꿈을 키워왔다. 사실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2012년도에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잠 못 드는 밤>을 본 게 처음. 그 작품을 통해 "장건재"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읊조리듯 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지루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약간의 비틀림으로 변주를 장치해 놓은 부분들까지도 말이다. 그의 그런 모습들은 이번 작품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03.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크게  "첫사랑, 요시코"와 "벚꽃우물"로 불리는 1부와 2부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를 장르적으로 옴니버스식 구조라고 부르지만 관객들이 굳이 용어적인 부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작품에서 두 이야기가 분절되어 있는 이유를 영화를 보고 있는 극장 안, 바로 그 시점에서는 제대로 알아 차리기가 어렵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여러 가지 이유가 발생할 수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영화 속 1부가 하는 역할은 관객들이 2부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영화 속 2부의 드라마에 더욱 쉽게 빠져들고 그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1부 파트에서 이미  익숙해진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그려짐에 따라 익숙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1부 파트와 2부 파트의 적절한 배치는 서로의 이야기를 상호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이 작품의 이야기들이 현실성을 갖게끔 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04.

사실 관객에 따라 개별적인 1부의 스토리는 그리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1부 파트의 내용이 흑백 영화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다양한 영화들을 접해본 적이 없는 관객들이라면 다소 이질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체적인 분위기마저 정적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실 1부의 내용이 표면적으로는 영화 속 인물인 "태훈"의 시점을 따라 도시를 비추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장건재" 감독이 "고조 시"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물들이 걸리지 않고 촬영이 된 부분들은 "장건재" 감독이 실제로 촬영을 한 부분들이라고 하고. 즉 이 영화 1부의 내용은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Documentary)"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픽션과 논픽션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야기이며, 그 때문에 우리가 아주 현실감 있게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05.

1부의 내용은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영화 전체적으로 다양한 해석들도 가능하게 한다. 1부의 내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작품 전체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3개의 시점(時點)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 파트가 결코 덧없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증거다. 뿐만 아니라 1부에서 "요시코"라 불리는 여인의 존재와 2부에서 "혜정"이라는 인물의 교차(그 가운데에는 "유스케"와 "유스케 아버지"가 각각 위치하게 된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이고 말이다.


06.

물론 1부의  "첫사랑 요시코" 내용 역시 개별적인 의미와 그 매력을 분명히 갖고 있다. 각각의 장면 속에서 "태훈"이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면 그 모습들이 결코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들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현실 속 일본인들의 예의 바른 모습들을 스크린 속에서 만나보는 현실성과 함께 소소한 재미를 찾아내는 것도 즐겁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할머님의 손을 꼭 잡아드리는 "태훈"의 모습에서 지금 병원에 계시는 외할머니가 떠올라 울컥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영화의 1부 내용이 현실감 있게 잘 그려져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07.

"장건재" 감독의 전작에서 느꼈던 담담하면서도 현실적인 감정의 공유는 이 작품에서 2부 "벚꽃우물"의 스토리를 통해 다시 한 번 큰 힘을 발휘한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이 영화의 멜로 라인은 그리 입체적이지는 않은 편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다른 멜로 작품들의 내러티브와 비교해서 별로 특징적인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오묘한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은 멜로 작품들에서 차용되었던 부분이고, 외로움을 느끼는 여인과 그에 접근하는 남성의 모습 또한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두 인물이 내뱉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08.

관객들이 극장에서 멜로 드라마를 찾는 이유는 현실에서 벌어지지 못하는 상황의 대리만족을 느끼기 위해서라는 것은 이미 오래 된 정설 중 하나다. 그래서 다양한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극적인 상황마다 탄식을 내뱉게 할 만큼 적절한 타이밍에 신의 도움(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조력자의 도움, 혹은 우연적 상황)을 받게 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다. "유스케"의 적극적인 모습에  당황해하는 "혜정"의 모습도. 특정 순간마다 속마음을 들키게 될까 주저하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도. 처음 만난 두 남녀답게  말없이 정적이 흐르는 순간도. 모든 장면들이 말이다. 심지어 불꽃 놀이를 보러 간 "유스케"는 정말 홀로 앉아 타코야키를 먹는다. 그래 이런 현실적인 모습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어떤 연애사를, 그 연애사 속의 헤어짐의 순간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09.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숨을 죽이고 스크린에 빠져든 건 두 사람이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조심스레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유스케"의 모습이. 그 사람의 마음이 나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선을 긋는 "혜정"의 모습이. 두 사람이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직감이라도 하는  듯했던 "유스케"의 행동. 이 모든 것들이 그야말로 진심 그 자체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조금도 과하지 않았고 모자라지 않았던 이야기. 혼자 불꽃놀이를 보고 있던 "유스케"의 마지막 모습에서 끝까지 "혜정"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마저 여운으로 남았던 것 역시 이 작품의 드라마가 얼마나 현실적인 감정들을 헤짚어 놓았는 지 깨닫게 만든다.


10.

이 영화의 백미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O.S.T에 있다. 영화와 동일선상에 있는 엔딩 크레딧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러닝타임 속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감과 동시에 가장 몰입했던 순간이 스크린에 다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영화의 타이틀이 <한여름의 판타지아>로 불리지만 이 순간만큼은 "한 여름 밤의 꿈"을 꾸는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 속에서 사랑을 하면서 행복해하고, 실연을 당하며 아픔을 느낀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의 현실적인 모습들이 또, 그 속에 담겨있는 진실된 이야기들이 더욱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11.

이번 글을 남기면서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실제로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현실"이라는 단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이 영화는 스크린 위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너무나 가까운 곳들을 들여다보고 있고, 그런 부분들 때문에 잔잔함 속에서 커다란 울림을 얻게 되는 것 같다. 가장 "현실"적인 영화에서 가장 "동화"같은 이야기를 볼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P.S.] 조금 눈썰미가 있는 관객들이라면 아마도  눈치챘을 것이다. 2부에 등장하는 두 남녀 주인공, "혜정"과 "유스케"는 각각 어떤 손을 주로 사용하는 인물들일까? 오른손잡이일까? 왼손잡이일까? 재미 삼아 한 번 기억을 더듬어 보길 바란다.




**이 글은 2013년부터 작성된 인스타그램 계정의 동일 연재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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