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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28. 2017

#107. 여배우는 오늘도

매력이라는 단어로 점철된 젊음과 아름다움으로 소비되어 온 여배우의 오늘.


**넘버링 무비의 모든 글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영화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01.


문소리라는 배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무엇일까? 많은 작품들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최근의 배역들보다는 필모그래피의 초창기에 위치해 있는 작품들이 먼저 생각난다. 장편 데뷔작이었던 <박하사탕>(1999)은 물론, <오아시스>(2002)나 <바람난 가족>(2003)과 같은 것들이다. 관객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도 그랬지만, 당시 여배우들이 걷던 길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 있었기에 더 인상이 깊게 남는 것 같기도 하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영화 시장이 가장 관심을 많이 보였던 장르가 여성의 가녀림을 앞세운 멜로/드라마 장르였기 때문이다. <후아유>(2002), <시월애>(2000), <연애소설>(2002),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클래식>(2003)과 같은 작품들이 모두 그랬다. 물론 처음부터 강한 인상을 심어준 그녀의 특별한 연기력은 초창기 이미지를 고착화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문소리는 달랐다. 그렇다고 그녀가 최근에 연기 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배역은 조금씩 달라졌을 지 모르지만, <하녀>(2010), <관능의 법칙>(2013), <자유의 언덕>(2014) 등의 작품에서 꾸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히 배역의 차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02.


물론 그런 차이도 있겠지만, 한국 영화 산업이 몰입하고 있는 장르의 편중과도 떼어놓을 수 없다. 남성 캐릭터에 국한된 범죄, 액션 장르. 각각의 작품이 어떠하다는 것을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경향은 분명히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여배우들의 위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영화 속에도 이러한 상황과 궤를 같이하는 부분들이 언뜻 등장한다. 이 작품을 연출한 문소리 감독의 말을 들어보면 영화 속 모든 장면은 연출된 장면이며 실제로 겪었던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비슷한 지점을 느끼긴 했을 거라는 그녀의 표현이 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물론 그녀의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2006년 장준환 감독과 결혼을 하고, 2011년에는 출산까지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졌던 것. 특히 여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영화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을 함께 했던 임순례 감독의 조언으로 연출 공부를 하게 된다.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과 문제들 속에 탄생하게 되었다. 배우 문소리가 아니라 감독 문소리로 변신한 그녀가 그 동안 연출해왔던 단편들을 하나의 영상으로 묶어낸 작품.


삶의 어느 순간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여배우.


03.


영화는 총 3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적으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나 내용까지 완전히 독립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같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1막의 내용은 한 때 연기력으로 인정받던 여배우가 세월이 흘러 냉대를 받기 시작한 뒤의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가장 불편하면서도 안쓰러운 장면들이 그려진다. 그런 여배우가 배우가 아닌 다른 사회적 역할에 위치해 있을 때 겪게 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는 2막에 있다. 밖에서는 여배우로 대우받지만,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엄마로, 또 누군가의 아내로 미디어가 만들어 낸 삶이 아니라 실제 한 사람의 몫을 해야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마지막인 3막에서는 예술에 대한 순수함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는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이 감독의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그의 영상들을 통해 말이다.


04.


이 작품 <여배우는 오늘도>는 두 가지로 인해 현실감을 갖게 된다. 영화 밖 현실 속에서 실재하는 여배우 문소리가 직접 주인공 역할로 등장해 – 배역의 이름조차 바꾸지 않는다. –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는 것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언젠가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는 진짜 문제들이라는 것. 그녀는 자신이 여배우라는 이유만으로 팬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폭언과 조롱, 무리한 부탁과 같은 상황들을 모면해야만 하고, 남들에겐 평범한 일상 생활의 어떤 지점을 지나더라도 흰 종이와 검정 펜을 건네 받아 내 이름 석 자를 써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오죽하면 가방 속에 선글라스가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 했을까. 뿐만 아니다, 속사정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유명 여배우의 후광에 비벼보려는 심산으로 특별출연과 같은 부탁들을 해오기나 하고, 그 또한 진심을 꺼내어 어렵게 거절하려면 면전에서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이쯤 되니 이 작품의 타이틀이 왜 <여배우도 오늘도>가 될 수 밖에 없는 지 이해도 된다.


05.


다만, 문소리 감독은 이 모든 상황들을 여배우라는 직업을 보호하기 위한 변명거리로 만들지는 않는다. 정육점을 하고 대학생 아들이 딸린 정육점 아줌마 역할을 제안 받던 영화 속 문소리를 떠올려보자. 그녀는 처음에 이 배역을 제안 받고 상당히 기분 나쁜 모습을 보이지만, 나중에 매니저에게 이 작품의 감독이 스타 감독이라는 것을 듣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기뻐한다. 이 작품의 페이소스는 이런 지점에서 터져 나온다. 그녀의 행동이 단순히 인간의 세속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배우라는 존재가 이 시장에 버티기 위해서는, 또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치열한 경쟁과 제한된 기회 속에 놓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매력이라는 단어로 점철된 젊음과 아름다움으로만 소비되어 온 여배우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 영화가 더욱 마음에 드는 건 이 때문이다.


웃으며 넘기려던 그녀의 모습이 텁텁한 뒷맛을 남긴다.


06.


영화 속에 여배우라는 존재가 겪는 어려움들이 담겨 있음에도 관객들이 동조할 수 있는 건, 필시 그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삶에 대한 애환과 아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동력과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할인을 받기 위해 딸의 직업 덕을 보고자 하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의 직업 대신 누군가의 딸이 되기로 선택하는 그 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는 게 다 그런 것이라며 젊었을 적의 꿈과 열정과 같은 것들을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시절에 두고 온 자신만의 무언가에 대해 아쉬워하고 회한을 느끼는 마음 또한 이해할 수 있다. 투정을 부리는 자식들 앞에서 나도 힘들다고 서로 붙들고 울다가도 결국에는 자신이 먼저 털고 일어나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단 한 가지, 스크린 너머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고 소름이 돋던 산행 후 술자리의 그 장면만큼은 쉽게 잊혀지지가 않는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녀는 이 영화 속의 이야기들이 모두 연출된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삶에 전혀 없었던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된다. 영화도 세상도 모두 그렇게 쉬워서만 되는 것일까? 영화가 끝났는데 1막의 그 장면만이 계속 입 안을 맴돌다 쓴 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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