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준 Nov 04. 2018


#137. 미쓰백

오랜만에 만나는 힘있는 여성 캐릭터.


**넘버링 무비의 모든 글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영화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00.


 “이런 나라도, 같이 갈래?”


스스로를 지키려다 어린 나이에 전과자가 되어 외롭게 살아가는 백상아(한지민 역)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누구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에게 지은(김시아 역)이 찾아온다. 나이에 비해 작고 깡마른 몸, 홑겹 옷을 입은 채 가혹한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아이. 자신의 과거와 닮은 듯한 지은을 외면할 수 없는 상아는 세상으로부터 그 작고 여린 존재를 구하기 위해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01.


이렇게 힘이 있는 여성 캐릭터를 그려낸 작품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다. 아픔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타인에게 의존적이지 않으며, 상처를 지울 수는 없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친다. 작품 속 미쓰백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남이나 <소공녀>의 미소와 견주어질 법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그녀에게는 망가진 자신의 삶을 제대로 세워나갈 힘은 물론, 타인의 삶까지 보듬을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세상은 그녀의 삶을 도와주기는커녕, 망가뜨리기로 작정이나 한 듯 덮쳐왔으니까.


어린 시절에도 지금도, 삶의 바깥 경계에 있는 것들은 이런 저런 이유들로 계속해서 그 선을 침범해온다.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것이 제 아무리 선의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 그녀에게는 불편한 관심일 뿐이다. 정작 자신이 필요할 때는 조금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던 세상의 선의 따위 받고 싶은 생각도, 도움을 청할 생각도 없다. 그녀의 곁에서 돕고자 하는 장섭(이희준 역)을 포함한 바깥 세상의 것들을 계속해서 밀어내는 까닭이다.


그런 그녀 앞에 지은이 나타난다. 삶의 바깥으로부터의 침범을 원하지 않는 만큼, 미쓰백 자신 또한 경계의 바깥으로 나서고자 하지 않았던 삶이었다. 문제는 지은이라는 아이가 바깥에 있지만 바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가 않다는 것. 처음 보는 순간부터 지은은 미쓰백 본인의 삶과 세상의 경계, 그 위에 존재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방비 상태로 놓여있던 자신의 경계를 뚫고 들어온 지은의 그 작고 아픈 손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02.


아동이 학대 받는 모습이 담긴 작품을 적게 봐온 것은 아니다. 가장 최근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가버나움>의 주인공이 그랬다. 아이들이 고통 받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힘든 일이지만, 이 영화가 아동 학대를 표현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감독은 직접적인 폭력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일상의 폭력에 길들여진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려는 모습을 그려내며 그 원인이 될 폭력의 현장을 유추하게 만든다. – 최소화했다는 것이지 전혀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 영화 속 지은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존재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세면대 아래로 몸을 짓이겨 밀어 넣고,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육성으로 뱉을 수 있는 말 또한 ‘잘못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도에 그칠 뿐이니 그 모습을 러닝타임 내내 지켜보는 심정은 가슴 속 깊이 사무치기만 한다.


그런 지은이 보여주는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미쓰백을 따라 월미도에 갔을 때다. 그리 좋은 시설을 가진 놀이공원도 아니지만, 지은은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그 곳의 활기에 처음으로 진짜 아이 같은 미소를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곧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건 휘황찬란한 놀이기구가 아니라 붉은 석양이 물들기 시작하고 갈매기가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인천 앞바다의 모습. 아이가 석양이 지는 바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을 사랑하게 되려면 그 짧은 생애, 얼마나 많은 사연을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만 하는 것일까. 미쓰백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장면보다, 지은이 바다를 들여다보던 그 눈이 더욱 진하게 와 닿는 기분이었다.



03.


미쓰백의 부모나 지은의 부모나 양쪽 모두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는 표현조차 너무 순화된 것 같다. 그들은 나쁜 부모였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하기는 어렵다. 자신들의 악행을 묻기 위해 더 큰 거짓을 만들고 종국에는 자식을 죽이려고 드는 지은의 부모와 달리, 미쓰백의 엄마는 최소한의 모성애와 인간성은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멀쩡한 상태에서도 진심으로 지은이 죽거나 사라지길 바라던 그들과 조금 달랐다. 그래도 그녀는 알콜 중독으로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지은을 때린 본인의 행적을 발견하고는 자신으로부터 아이를 떼어놓고자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폭력이 일어난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며, 미쓰백은 그 잔혹한 기억과 사라지지 않는 흉터들을 쥐고 평생 아파해왔으니 말이다. 피해자가 있는 한 가해자는 사라질 수가 없고,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는 한 가해자는 용서받을 수 없다.


04.


유일하다는 것은 제한적 상황의 끝을 말하는 것과 같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보다 더 제한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유일한 상황에서 하나의 선택지가 더 있거나, 하나의 대안만 더 있더라도 이렇게 벼랑 끝에 몰리지는 않는다. 미쓰백의 이야기다. 그녀에게 엄마의 죽음을 대신 치러줄 수 있는 보호자가 한 명만 더 있었더라도, - 실제로 미쓰백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죽음을 정리하는 것은 장섭(이희준 역)이지만,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으로 인해, 사망 신고를 해야 하는 일로 인해 미쓰백은 다시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 지은에게 미쓰백이 아닌 상처와 아픔을 대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었더라도 그녀는 지금과 같은 행동, 다른 누군가의 삶을 제 삶에 포함시키려거나 생각하고자 하는 행동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받지도 주지도 않으려고 하는 모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곁에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자 하는 장섭의 관심과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자신의 자격 미달을 이유로 거절해왔던 그녀다. 물론 그런 제한적 상황을 지나며 그녀 역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과거와 달리, 혼자인 상태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함께일 때 해결되어 나가는 장면들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05.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반복되어 연출되는 장면이 있다. 미쓰백과 지은이 만나게 되는 두 번의 장면. 미쓰백이 지은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 미쓰백이 옷과 햄버거를 사주기 직전이다. - 아이는 화면의 왼편에, 미쓰백은 화면의 오른편에 위치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번 조우했을 때는 그 장면이 바뀌어 지은이 화면의 오른쪽에, 미쓰백이 왼편에 위치하게 된다. 원론적인 구조상 해석에서 오른쪽은 ‘안정’을 왼쪽은 ‘불안정’을 의미한다. 물론, 이는 동일한 컷과 내러티브 내에서의 상대적인 의미를 뜻하며, 전체적으로 형성되는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번 작품에서 겹쳐지는 이 두 장면 역시 이 구조화 프레임 속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절대적인 상태로 해석하자면, 미쓰백도 지은도 모두 불안정한 존재다. 하지만, 처음 장면에서의 두 사람 관계를 보자면 지은에 비하면 미쓰백이 확연히 안정적인 상태이기에 미쓰백이 오른쪽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 된다.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 사람 모두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라 볼 수 있지만, 더 극적으로 안정적 상태를 찾은 것은 지은이라고 볼 수 있기에 오른쪽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동일한 두 장면,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게 되는 장면의 이와 같은 해석은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지은의 삶이 지난 부모의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극적으로 개선되고 있음을 강조할 수 있게 만든다. 그 변화에 중심에 미쓰백이 존재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06.


연행된 지은의 아버지(백수장 역)란 작자는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냐며 악다구니를 쓴다. 그리고 저주라도 퍼붓듯 이렇게 이죽거린다. 이런 꼴 다 보고 겪으며 자란 어린 년의 앞날도 알만하지 않느냐고. 미쓰백의 지난 삶이 어린 지은의 삶에 작게나마 한줄기 빛이 될 수 있는 건, 그렇지 않다는 걸 몸소 직접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의 손 또한 지난 시절의 상처로 가득한 상태지만, 그런 손이라도 작고 어린 다른 손을 외면하지 않고 잡을 수 있음을 지은에게 직접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미쓰백의 삶도, 지은의 삶도 쉽게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버텨낸 시간은 분명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니까. 다만, 미쓰백이 자신의 이름을 선택해 그 삶을 살아냈던 것처럼 지은 역시 자신의 삶을 그렇게 살아나가게 될 것이다. 어쩌면 미쓰백의 사랑 아래에서 조금은 더 수월하게 말이다. 아니, 꼭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Copyright ⓒ 2018.

joyjun7 All rights Reserved.

www.instagram.com/joyjun7

매거진의 이전글 #136. 창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