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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pr 20. 20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그녀의 세상은 온통 진짜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 수오서재

고수리 에세이


외롭다 힘들다 그러는 사이에도

우리는 여기까지 흘러왔다.


고, 수리. 처음 작가의 이름을 만났을 때 자동적으로 머리는 이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작가에게는 평생 들어온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름을 마주한 낯선 이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이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일지도, 하고 이제야 생각하게 되는 이름. ‘수리’라는 이름을 난생 처음 만나게 된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 신기하다는 생각보다 친숙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 건 어째서 였을까. 흥미로움에서 출발한 호기심이 신기함보다 친숙함으로 방향을 선회할 때,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호기심이 신기함으로 이어지는 길의 모습이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커다란 돋보기를 든 채로 한참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라면, 친숙함으로 향하는 길의 모습은 가슴 크게 내밀고 양팔을 든 채로 내게로 향해오는 모든 바람결을 느끼는 일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수리 작가에게 빠져들기 시작한 건, 그녀의 글을 처음 만나게 된 순간이라기보다 어쩌면 그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어느 날 미용실에서 꺼냈다. 나란히 앉은 우리는 돌돌 감아 올린 머리에 헤어 캡을 뒤집어쓴 채였다. 커다란 펌 기계가 머리 위에서 위잉 돌아가고 있었다. 미용 가운 위로 얼굴만 쏙 뺀 엄마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도 살아야지. 새끼들 먹이려면 내가 살아야지. 혼자서 어찌나 울었던지. 왜 그렇게 울었을까 나도 몰라.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김이 다 폴폴 나더라니. 딸, 정말로 눈은 그렇게 싸여. 싸박싸박. 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니까. 싸박싸박 싸박싸박. 그 소리 들어본 적 있어? 참.. 그땐 무슨 정신으로 살았는지 아직도 생각만 하면…”
엄마는 옷소매로 눈물을 꾹 찍어내며 헛헛하게 웃었다.

[52-53p, 눈 내리던 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작가의 첫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를 읽으며 처음으로 마음을 놓쳤던 대목이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울고 싶어졌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써내려 가는 작가의 글 속에 감히 표현하기 힘든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 내리던 밤’이라는 이 글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작은 기적’, ‘엄마라는 직업’과 같은 꼭지들을 읽으며 그녀가 엄마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지점에서 몇 번이나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지만 참았다.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이 책의 끝을 보려면 벌써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글 자체가 표현하는 상황이 주는 슬픔과 엄마라는 존재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 글을 쓰면서 과거를 회상하고 그 일을 복기하는 동안에 작가가 느꼈을 감정이 얼마나 깊었을지 헤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이렇게 담백하고 정갈하게 써내려면 얼마나 많은 밤을, 얼마나 많은 Delete키를 보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고수리 작가의 첫 번째 세계와 두 번째 세계.


이 책,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는 고수리 작가가 3년만에 내놓은 두 번째 에세이집이다. 첫 책을 세상에 내놓고 쌍둥이 아들을 낳고 키우는 등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는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년의 시간을 조금도 허비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구하여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하늘에 걸어둔 첫 번째 세상과 거의 비슷한 결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금 더 밝으면서 아스라한 희망을 안겨주는 느낌의 책이다. 어쩌면 그건,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랑스러운 두 아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아 그제야 지난번 엄마를 만났을 때 휴대폰 액정이 깨져 있었던 게 생각났다. 엄마 유릿가루 위험해. 나는 금이 간 액정 위에 넓적한 투명 테이프를 붙여준 게 전부였다. 그러다 또 깨달았다. 손가락을 꼽아 세워보니, 엄마의 휴대폰은 이미 4년이나 훌쩍 넘은 고물이었다는 걸. 나의 시간은 바쁘게 흘렀지만, 엄마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엄마 바빠, 바빠’하면서 미루고 쌓인 시간이 알고 보니 4년이었다. 그제야 내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아니, 기어들어 갔다.

[24-25p, 엄마에게 보낸 첫 번째 메시지,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이번에는 조금 더 빨랐다. 작가의 글이 내 마음을 움켜쥐기 시작한 지점이 말이다. 이번에도 엄마의 이야기였다. 스스로는 조금 신기하다고도 느끼고 있다. 수리 작가와 나는 자라온 환경도 다르거니와, 엄마에 대한 기억도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을 터인데 나는 그녀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부모의 보편적 속성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작가들이 엄마의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깊게 동화되거나 감정적 동일시를 겪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연하고 유약한 편에 있지만, 평생 아버지를 미워하고 용서하고 증오하고를 반복해오며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깊게 생각해 온 부분들이 어느 정도 겹쳐지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쪽의 일방적인 생각이다. 홀로 나를 지켜온, 혹은 그래왔다고 생각하는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안타까움과 미련,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 그리고 사랑과 같은 감정. 그리고 그 위에 쌓여온 현실과 존재 사이의 선택 속에 언제나 방황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작가님이 풀어내는 방식을 보며 나는 언제나 꼭 글 속에 눌러앉아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도 후후 바람을 불었다. 코끝이 간지러웠다. 어느새 배시시 웃고 있었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꽃잎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여덟 번이나 이 놀이를 했다. 그 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장면만, 그저 마법처럼 신기하고도 행복한 이 장면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른이 된 후에, 김창완 아저씨가 부르는 ‘너의 의미’를 들으며 나는 이 장면을 떠올렸다. ‘슬픔은 간이역에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온 넌 향긋한 바람.'

슬픔이 버스정류장에 코스모스로 피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때 코스모스 꽃잎 한 장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이름 모를 할아버지, 사실 그 할아버지는 김창완 아저씨가 아니었을까. 호호 할아버지가 된 김창완 아저씨가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잠시 그곳에 들른 건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해 본 적도 있다.

158-159p, 코끝에 행복,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글에 깊게 반응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엄마’라는 소재 때문만은 아니다. 어느 영화나 소설이 그렇듯, 소재만으로 마음을 내어주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작가의 글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방식과 삶의 태도 때문이다. 첫 번째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의 158쪽에는 김창완씨와 관련된 글이 한편 나온다.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평소 작가가 김창완이라는 아티스트를 얼마나 흠모해왔는지 조금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수리 작가는 이번 책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현재 SBS에서 진행되는 김창완씨의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김창완씨의 목소리로 작가의 새 책에 담긴 글 한 꼭지가 읽히게 된 것이다. 그날, 고수리 작가는 자신의 SNS를 통해 날아갈 듯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공유했는데 사실 그때는 그냥 유명인의 목소리로 자신의 글이 읽혀서 그런가 했다. 책을 읽은 지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수리 작가가 평소 어떤 사람인지 잠시 잊어버려서. 그런데 아니었던 거다. 그녀는 자신이 흠모했던, 어릴 적 감정적 키다리 아저씨와도 같았을 그 이의 목소리로 자신의 글이 읽혔으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얼마 전 열린, 작가를 닮은 북토크에서.


수리 작가의 책 속에는 온통 진짜들뿐이다. 어쩌면 세상에 내놓기 힘들법한 자신의 이야기들도 모두 진짜,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모두 진짜, 심지어는 책을 쓰기 전에 글의 꼭지들 속 주인공들에게 모두 해당 이야기를 책으로 세상에 내놓아도 되겠냐고 묻는다는 그녀의 사려 깊은 마음들도 모두 진짜다. 작가를 직접 만나보면 그녀가 살고 있는 삶이 책과 조금도 어긋남 없이 일치함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모두 진짜다. 사랑하게 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마음 속 깊이 존경하게 된다. 내가 쓰는 글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내 마음 속과 내 과거 속에 있는 어떤 일들을 있는 그대로 써서 세상에 내놓는다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도 처음에는 많이 무서웠어요.’


언젠가 만난 작가에게서 돌아온 대답이다. 어떤 질문이었는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수리 작가를 더욱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태도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힘껏 끌어안는 작가의 모습에, 나는 작가의 세상을 온몸으로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고수리 작가는 스스로 자신이 쓰는 글을 ‘따뜻한 슬픔’이라고 말한다. 아직 그 ‘따뜻한 슬픔’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그런 표현이 아니더라도 그냥 다 좋으니까. 다만, 그녀의 세상을 만난 뒤로, ‘따뜻한 슬픔’이 누군가의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는 기억을 녹여낼 수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요술과도 같은 경험, 수리 작가의 이름은 정말로 그랬다.


작가의 두 번째 세계에 기록해 둔 짧은 메모.


나는 종종, 태깅(Tagging, 꼬리표)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경우 책의 한쪽 모서리에 내 생각을 기록해두곤 한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 작가에 대해 내가 어떤 마음인지 나중에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다. 이번 책,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에도 몇 개의 메모를 남겼다. 그 중 하나를 함께 나누며,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여기에 쓰여진 마음이 고수리 작가가 쓰는 글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최고라는 뜻의 정수가 아니라, 코어의 의미를 갖는. 그래서 좋아하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는 일과 그것을 돌아보는 일과 그 일로 인해 마음을 스스로 여며야 하는 이들을 보듬는 일들을 그녀는 모두 해낸다.

24-25p, 엄마에게 보낸 첫 번째 메시지,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에 써둔 메모.


작가의 세상 속에서 모두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기억을, 자신을, 누군가를, 우리 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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