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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Nov 14. 2018

달고 차가운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것.


오늘의 젊은 작가 02 / 달고 차가운 / 민음사

오현종 장편소설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

프롤로그에서 시작되는 첫 번째 문장으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됩니다.


첫 번째 살인. 두 해를 연달아 대학 입시에 실패한 지용은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기 전 중년의 호프집 여사장을 살해하고 강도의 소행으로 위장합니다. 그가 재수생일 때 만나 처음으로 사랑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줬던 여자, 신혜의 엄마. 그는 단 한번도 그녀의 엄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릅니다.


P.18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깜박깜박 점멸을 반복했다. 불빛이 차가운 어둠에 몸을 내어 주는 찰나, 눈, 코, 입이 한데 뭉그러졌다 되돌아왔다. 눈앞의 얼굴은 누구의 얼굴도 아니었다. 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영화 속에서 살인범에게 살해되는 익명의 여인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런데, 그 위로 한 얼굴이 겹쳐진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두 번째 살인. 지용에게 살해 당한 호프집 여사장, 신혜의 엄마는 10년 전 자신의 딸 신혜가 열한살이 되던 해에 성매매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열한 살이 되는 신혜의 동생에게 다시 한번 성매매를 강요합니다. 지용은 신혜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 지옥 비슷한 것의 상황에서 그녀와 그녀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죠. 이 글의 첫 번째에서 언급한 악을 없애는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에 대한 그의 신념은 죽느냐 혹은 죽이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기에 살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옥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P.68
그날은 엄마가 다른 날 아침보다 좀 더 많이 운 날이었는데, 가겟방에 매일 깔려 있던 이불을 싹 개고 밖에 나가더니 구두를 한 켤레 사 가지고 왔어. 반짝거리는 분홍색 에나멜 구두였어. (중략) 엄마는 봉투를 주면서 복덕방 아저씨한테 말하라고 했어. 엄마가 이것밖에 없대요. 더는 죽어도 안 된대요. 외워서 말해 보라고 했고, 여자아이는 똑같이 했어. 스타킹을 신겨 주며 엄마가 작게 말했어. 혼잣말하는 사람처럼. 왜 나만 죽도록 벌어야 해, 개같이. 너도 밥값 할 나이가 됐으니까 심부름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잖아?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중략) 복덕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잃어버릴세라 봉투를 내밀고 외운 말부터 내뱉었어. 아저씨는 봉투를 받아서 안을 들여다보곤 나에게 앉으라고 말했어. 요구르트도 한 병 주었지. 요구르트를 먹고 나자 노란 원피스가 예쁘다고는 작은 병아리처럼 춤을 춰 보라고 했어. 하지만 아저씨는 그런 식으로 춤을 춰서는 안 된다고 화를 냈어. 처음엔 복덕방 안쪽 방에서 추었고, 그다음엔 지물포에서, 그 다음엔 건재상에서, 약국에서, 멈추지 않고 춤을 췄어. 다리가 부서질 것 같았지만, 춤을 춰야 했기에 울 수가 없었어.


세 번째 살인. 하지만, 신혜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지용을 이용했던 것 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새 아버지가 데려왔다는 작은 동생, 자신에 이어 성매매를 하게 되었다는 갓 열한 살 된 동생도 애초에 없었고, 그 동생만 남기고 2년 전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는 새 아버지도 멀쩡히 살아서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죠. 신혜는 그 새 아버지라는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며, 그와의 온전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엄마를 죽이고자 했던 것 뿐이었습니다. 지옥에 빠져있는 신혜를 구한 것이 지용이 아니라, 신혜가 지용을 더 깊은 지옥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린 셈입니다.


P.174
하지만 진짜 더러운 년이 누군데. 아버지와 내가 사랑하게 된 걸 알면서도 엄마는 아버지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어. 아버지가 없을 때 나만 놓고 조롱했지. 어릴 적부터 영감들한테 몸을 팔고 다니더니 제 버릇은 남 못 주네. 차라리 아버지든 나든 집에서 나가라고 헀으면 엄마가 사람으로 보였을 텐데. 아버지가 자기 몰래 내 방에 드나드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계속 아버지와 잠을 잤어. 난 견딜 수가 없었어. 미쳐 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죽인 거야. 그 여자만 없으면 지옥에서 나올 수가 있는데, 왜 그러면 안 된다는 거니. 난 아버지가 필요했을 뿐이야. 그게 잘못이니? 정말 아버지가 필요했어. 너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넌 너무 약하잖아. 난 어릴 적부터 강한 사람이 필요했어. 나를 아이처럼 보살펴 주고, 예뻐해 줄 사람이.


지용. 그렇다면 이 소설 속에서 지용이란 인물은 온전히 이용당하기만 한 인물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혜의 분홍신 이야기 속에 갇힌 소녀의 과거처럼, 그만큼의 지옥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 역시 애초에 자신만의 지옥 속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의 무게를 타인에게 이양하려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모습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을 잠시도 놓아주지 않는 부모, 특히 엄마. 엄마의 뜻에 따라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 엄마의 표현에 따르자면 성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형과 누나에 치이며 가슴 속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쌓아왔습니다.


P.33
의대 본과에 올라간 뒤로 병원 앞에 오피스텔을 얻어 잠을 자는 형이 빨랫감을 가지고 들렀다가 귀찮은 듯 한마디 던지고 갔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왜 집안 시끄럽게 해.


P.58
엄마가 모든 일을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테고, 너는 나를 실망시켰다고 소리 지를 게 틀림없었다. 좋다, 나는 실망시키고 싶었다. 좀 그러고 싶었다. 어째서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말인가. 엄마와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는데. 내가 뭘 바라는지는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데.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남의 탓부터 하겠지. 우리 아들은 나쁜 친구에게 물든 거다. 집에서 공부만 한 애라 그렇다. 도대체 누가 우리 아들을.


처음 신혜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느끼는 감정이 일반적인 반응과 유사하면서도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의 삶에 그런 따뜻함과 온화함,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굳어 있던 뇌가 물렁거리는 것 같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 감정은 이전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비로소 어른이 되는 일이 반드시 죄는 아닐 거라 믿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어른이 되는 길이 세상으로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신혜라는 인물 하나에게로만 뻗어간다는 것이랄까.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풍선에 셀로판 테이프를 붙이고 바늘로 구멍을 하나 뚫으면, 그 작은 구멍 하나로만 모든 공기가 새어 나오고 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P.76
신혜가 없으면 안 되지만, 더러운 것은 싫었다. 더러운 걸 손에 묻히는 건 싫었다. 분명 참을 수 없을 거였다.


이 문장은, 어른이 되는 일이 죄악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 그의 마음 이면에 과거에서부터 짓눌려왔던 억압의 산물, 혼자서는 이 삶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할 유약한 존재로서의 모습이 가장 잘 녹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신혜는 그의 그런 모습을 지용 본인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용이 신혜의 엄마를 살해하는 악을 저지른 데는 위에서 언급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지옥에서 구하는 일 이외에도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자신이 증오했던 이, 어머니를 간접적으로 살해하는 행위가 이양되어 있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자신의 엄마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해를 저지를만한 사회적 악을 저질렀던 것은 아니며,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 역시 엄마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는 무관하면서도 객관적인 사회적 악 – 성매매 – 을 저지른 신혜의 엄마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것입니다.


P.133
내 부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도 다른 사람 부모를 사라지게 할 수는 있겠지. 그게 조금 더 쉬운 일이니까.


신혜가 자신을 속이고 새 아버지와 함께 침사추이로 도피를 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악을 퍼 부운 신혜를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지만, 살해, 악을 악으로서 없애는 일을 또 한번 저지르지는 못합니다. 그녀가 저지른 악이 타인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지옥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떤 따뜻함과 온화함을 알게 해 준 이가 신혜라는 것 또한 잊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그는 정말로 신혜를 사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 앞에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P.180
차 안은 참 따뜻해 보였어. 남자아이 하나가 내렸고, 운전석에서 여자가 따라 내리더니 그 애를 부르더라고. 여자가 손에 들고 나온 남색 머플러를 남자애 목에 둘러 줬어. 그 애는 계속 땅만 내려다보면서 학원 안으로 걸어가더라. 왜 그랬을까. 나는 그때 부끄러웠어. 내가 너무 싫었고. 남자아이가 미웠어. 나한테도 저렇게 예쁜 차를 몰고 데려다 주는 엄마가 있다면, 내가 저 아이였다면, 교실 안에 들어와 네가 나랑 같은 반이라는 사실을 알았어. 그렇지만 그날은, 너를 좋아하게 될 줄 몰랐어. 정말 그랬어.


신혜도 지용을 오롯이 이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다만, 지용이 그렇게도 악에 받쳐 원망하고 부수고 싶어했던 그 지옥이 신혜에게는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국의 어떤 것. 아니 함께 사랑을 나누던 첫날 밤, 지용이 신혜의 육체로부터 얻은 황홀함과 온안함, 따뜻함보다도 더 큰 안락함으로 느껴졌던 것이죠. 그를 부수고 내가 올라서고 싶을 만큼.


P.182
무슨 말인지 알아, 신혜야. 이제야 너를 이해하게 됐다는 걸 알아. 다시 만나지 않는다 해도, 우린 죽는 날까지 같은 지옥에 살 거라는 것도 알아. 나는 이런 방식으로 너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된 거야.


이제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각자가 처한 입장에서 인물들이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던 사정과 타인(가족도 포함한)의 살해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또다른 누군가의 아픈 삶 또한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달고 차가운'이라는 이 책의 타이틀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습니다. 언어학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달다'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차갑다'. 두 단어가 만나면 그 수식어는 긍정적인 것이 될까요? 부정적인 것이 될까요? 이제 저는 지용의 마지막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P.183.
쇼윈도의 딱딱한 유리를 지문으로 천천히 더듬어 내렸다. 신혜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부드러운 것을 다시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나기 시작했다.



+ )

이 책을 꼼꼼히 씹어볼 필요가 있다. 동일한 문장 혹은 유사한 내용이 인물의 입장이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활용되는 장면들이 서너 차례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떤 노래를 들을 지 궁리했다.’(P.21 & P.97) 혹은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P.70 & P.81)과 같은 식이다.


++)

이 책의 겉 표지 제일 뒤쪽에는 이 책의 내용이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공부 기계가 살인 기계로 전도되다!

희세의 이야기꾼 오현종의 속도감과 영상미 넘치는 문체

평범한 재수생이 전략적 살인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역설적 성장 서사.


정말 별로다. 책도 영화도 굳이 저 짧은 문장에 작품을 꼬깃꼬깃 쑤셔 넣어야만 하는 걸까. 차라리 나는 없었으면 한다. 이 책은 공부 기계가 살인 기계로 전도되는 것도, 평범한 재수생이 전략적 살인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조금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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