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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13. 2018

연애의 기억

누구에게나 떠올릴 사랑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연애의 기억 / 다산책방

줄리언 반스 장편소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을 탐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들의 내용을 모두 이해했는지 하지 못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가 그의 책들에 가장 깊이 빠져있었을 때는 아직 이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기는커녕, 맛을 보기도 전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어쩌면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잠시 떠올려봐도 기억에 남는 게 하나도 없네요. 하늘을 날아가는 여자와 땅에 발이 붙은 듯 보이는 떠 있는 남자가 서로 손을 맞잡으려는 그림이 그려진 주황색 표지만 떠오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알랭 드 보통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 속에 알랭 드 보통의 언어가 내밀하게 숨겨져 있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어쩐지 줄리언 반스가 인간의 심리를 탐색, 아니 탐미해가는 방식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 다시 한번 허영심으로 가득한 마음을 꺼내어 모든 페이지를 뜯어먹어버리고 싶은 마음일 뿐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어렴풋이 기억나는 알랭 드 보통의 그 딱딱한 언어가 줄리언 반스의 것과 같을 리 없지만, 그 깊이감에서 유사함을 느낍니다. 굳이 다시 표현하자면, 양 쪽 모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고 어두운 청색의 색깔을 하고 있지만, 줄리언 반스 쪽의 깊이는 그 바닥을 꼭 한번 짚고 올라오고 싶은 마음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깊이와는 다르게.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를 하려고 알랭 드 보통의 작업들을 너무 깎아내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게 알랭 드 보통의 기억이란 20대 초반, 혈기만 팔딱거리던 시절의 이야기이자, 뉴런이 아닌 적혈구로 이해된 것이니 양해를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만큼 줄리언 반스를 좋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역시나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을 참 좋아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가장 마음에 들어했고, 이번 작품 <연애의 기억>을 표지도 아닌, 타이틀만 보고 집어든 건 우연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건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나, 책이라는 매체 하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음악도. 영화도. 드라마도. 예능도. 다큐멘터리도. 심지어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프로그램 중에서도 동물들의 짝짓기가 제일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들 가운데 이 작품이, 올해 읽은 소설들 가운데 이 작품이, 이 모임을 시작한 이후로 <달의 궁전>과 <연애의 책>에 이어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언급한 책들과 이 책이 유사한 결을 갖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이 책 <연애의 기억>은 19살 소년 폴이 같은 마을에 살던 40대 유부녀 수전과 나눈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폴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책의 내용은,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을 지나는 인물의 기억을 차용하는 듯 하지만, 마치 줄리언 반스 본인의 기억을 꺼낸 듯 느껴질 정도로 깊은 통찰과 섬세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책의 아이러니한 점은, 대부분의 묘사와 설명이 1인칭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사랑의 대상이 되는 수전의 입장이 전혀 묘사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그저 폴의 생각과 마음, 추측들 속에서 한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이 되고, 또 어떻게 시간을 버텨내게 되는지, 마침내 어떻게 사그라들게 되는지를 따라가게 될 뿐입니다. 그 묘사가 너무나 적확하고 뛰어나 읽는 내내 의심할 겨를이 없지만, 마지막 페이지가 되면 그제서야 놓치고 있던 부분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전은? 하고. 언제나 함께 시작하는 사랑의 주체는 두 사람이니까요.


책은 크게 1장과 2장, 그리고 3장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장이 폴과 수전, 두 사람이 함께 사랑에 빠지게 되어 밀애를 나누고,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지만 그를 피해 마을을 떠나는 장면을 이야기 한다면, 2장에서는 본격적인 관계의 위기,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을 놓아버리는 수전을 대신해 홀로 책임을 짊어지게 된 폴의 상황과 심리가 그려집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이 책의 시점이 1인칭, 폴의 입장에서만 그려진다는 이야기는 대부분이 어른의 사랑과 어른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 사랑이 여물어 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사랑이 여물어야 한다는 의미가 단순히 얕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어른의 사정보다야 직선적입니다. 책에서는 이런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139p.
나는 어린아이고, 그녀는 중년의 유부녀다. 나에게는 냉소주의가 있고, 삶에 대한 이해라고 알려진 것이 있다. 하지만 나는 냉소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이상주의자이기도 햬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힘을 다 갖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면 그녀는? 그녀는 냉소주의적이지도 이상주의적이지도 않다. 그녀는 이론화라는 정신적 난장판 없이 살아가며, 각각의 사건과 상황을 오는대로 받아들인다. (후략)


163p.
한 여성 친구가 자신의 결혼 이론을 이야기해준 기억이 난다. 결혼은 “필요한 대로 살짝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이론. 이것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실용적이고, 심지어 냉소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고, 결혼에서 살짝 나온다는 것이 간통을 뜻하지는 않았다. (중략) 하지만 이 시기에 내가 나의 삶을 이해한 바로는, 나에게는 반대의 등식이 필요했다. 일이 내가 그럭저럭 이어나가는 것이 되고, 사랑이 나의 삶이 되어야 했다.


물론, 이 모든 표현은 현재 그녀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아직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녀에게 도움만 된다면 언제든 나는 어른이 될 각오가 서 있다는 것’이라 말하는 그의 어린 사랑을 표하는 것입니다. 1인칭의 표현이기에 그런 부분들이 뒤로 숨겨져 있지만요.


두 사람이 도피 행각을 벌이기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폴이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구니 자신을 어떻게 먹여 살릴 수 있냐는 수잔의 말에 폴은 자신에게 500 파운드가 있다고 말합니다. 수잔은 아무말을 하지 않죠. 하지만 책의 뒷 페이지에는 이렇게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녀에게도 도주 자금이 있었다. 거기에는 오백 파운드 이상이 있었다.’


이런 다양한 표현들로 화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상대인 수잔의 성격을 같은 방법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저는 어쩌면, 이 책이 줄리언 반스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19세 소년의 말을 빌리고는 있지만, 역시나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이라면 상대의 생각이나 마음과 같은 것은 결코 알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한 것이라는 추측인 셈이죠. 완전히 똑같은 내용을 겪지는 않았겠지만 어느 정도 팩트가 가미된 소설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3장.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젊음의 시기가 끝나고, 폴은 어른의 사랑, 어른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때는 그것이 오롯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그렇지 않은 사랑도 있음을 깨닫게 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가령, 303페이지에 나오는 이런 표현과 같은 것들입니다.


303p.
그가 이해하기 된 또 한 가지. 그는, 현대 세계에는, 시간과 장소는 이제 사랑 이야기와 관련이 없다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그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만큼 큰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오래되고, 지금도 계속되고, 도저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망상에 굴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 있다는 망상.


어쩌면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연애의 기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사랑 그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어른의 무엇을 깨닫게 된 지금에, 그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이야기. 기억이라는 단어는 그런 것이니까요.


이 책의 가장 뛰어난 표현은 229페이지부터 시작되는 섹스에 대한 묘사입니다. 다른 책들처럼 섹스의 방식이나 섹스의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섹스에도 감정이 있음을, 그 감정들 사이에도 관계가 있음을 자신 나름대로 설명해 놓은 부분이에요. 그리고 그 중에서 슬픈 섹스라는 표현을 통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 나갑니다. 자신을 모두 던져버리고 술에만 빠져 사는 수잔을 바라보는 폴의 마음과 나름대로 자신의 사랑을 이어나가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보지만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무력함과 슬픔 같은 것들. 한 부분만 발췌해 읽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자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229p.
슬픈 섹스는 그녀가 술에 취하지 않고, 너희 둘 다 서로를 바라고, 너는 어쨌거나 상관없이 그녀를 늘 사랑할 것임을, 그녀가 어쨌거나 상관없이 너를 늘 사랑할 것임과 마찬가지로 사랑할 것임을 알지만, 너는 – 어쩌면 너희 둘 다 – 이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행복에 닿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다. 그래서 너의 사랑을 나누는 행동은 위로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의 서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부정하려는 가망 없는 시도가 된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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