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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ug 16. 2018

날짜 없음

따뜻한 디스토피아를 만나본 적 있나요?


오늘의 젊은 작가 14 / 날짜 없음 / 민음사

장은진 장편소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세상의 끝까지 21일>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로렌 스카파리아 라는 감독의 작품인데, 키이라 나이틀리와 스티브 카렐이 주연으로 나옵니다. 영화는 타이틀에 쓰여진 대로 지구가 멸망을 21일 앞둔 두 남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인류 종말이나 지구 멸망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을 ‘아포칼립스 필름’이라고 부르고, 어둡고 부정적으로 그려진 세계에 대해 말하는 작품들을 ‘디스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장르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장르들 가운데서도, 심하게 말하면 신파에 가까운, 유한한 삶을 인지한 인물들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지, 또 그 안에서 어떤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가 그려지는 작품들을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세상의 끝까지 21일>은 잘 알려진 영화는 아니지만 가끔 생각이 나는, 만듦새가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앞서 설명한 감정들을 잘 느끼게 해주는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작품들을 좋아하는 데는, 극한의 상황에서는 아주 작은 불꽃도 크게 발화하게 되는 높은 집적도에 대한 갈망, 그런 감정을 한번쯤 느껴보고 싶은 심리를 보상받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아포칼립스 필름적인 요소를 갖고 있거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차용하는 작품들의 장점은 서스펜스를 획득하기 용이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작품이 관객이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긴장감과 같은 것들인데, 이런 장르에서는 아주 작은 자극도 크게 느껴지고 전달되곤 합니다. 가령,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작은 움직임이나 일상적 상황과의 조우, 특정 행위에 대한 해석과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더 예민해지고 두드러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르를 따르는 대부분의 작품이 폐허를 배경으로 삼거나 공허한 상황을 가정하는 경우가 많고, 등장인물도 최소한으로 줄여 많은 부분에 여백을 주고자 합니다. 최대한으로 없애고 나면 더 이상 숨을 곳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죠. 감각의 종류를 줄이거나 제한하면, 나머지 최소한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것과 유사한 원리입니다.


사전 설명이 길었습니다만, 오늘 제가 소개할 책은 최근 민음사에서 나오고 있는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가운데 14번째 작품, 장은진 작가의 장편소설 <날짜 없음>입니다. 


문장 ‘그게 온다고 한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 <날짜 없음>은 앞서 설명한 아포칼립스 필름의 성격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모두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따뜻함을 품고 있는 책입니다. 1년 째 이어지는 이상 기후로 회색 눈이 쏟아지는 세상, 모든 세상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눈으로 뒤덮여 있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 사람들은 이 도시를 회색시, 서로를 회색인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처음 내린 것은 홍설, 붉은색 눈이었다고 합니다.. 붉은색 눈이 내릴 때만 해도 죽음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따로 존재하는 드문 현상이었죠. 누구도 감히 자신의 목숨을 쉽게 버릴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색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금은 다릅니다. 이 곳에서 시체를 만나는 건 더 이상 끔찍한 일이 아닐 정도로 흔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소설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것이 온다는 오늘을 앞두고 대부분의 회색인들이 도시를 떠나기 시작하면서 진행됩니다. 이 행렬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채, 아직 아무도 돌아온 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길의 끝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찬 모습으로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하지만 주인공 해인과 그녀의 남자친구, 그의 반려견 ‘반’은 이 도시에 남고자 합니다. 곧 다가온다는 그것이 진짜로 올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 그대로 남아 어제와 내일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해인을 두고 떠난 가족에 대한 이야기, 해인이 그를 처음 만난 이야기, 많지는 않지만 그들처럼 이 도시에 남겨진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 남자친구와 반려견 반의 이야기 등, 10여 가지의 작은 이야기들이 해인의 시선으로 각자의 플롯을 따라 그려집니다.


(A파트는 소설 속 한 부분을 인용한 구절이고, B파트는 그에 대한 감상입니다.)


1A.
젊은 부부인지 연인이지 알 수 없는 남녀가 눈밭에 피를 흘리며 비통한 자세로 너부러져 있었다. 눈을 헤치고 목에 손을 갖다 대보니 이미 두 사람 다 즉사한 상태였다. 해골만 남은 몸뚱이에서 나올 피가 어디 있다고 철철 흐르는가. (중략) 피를 적나라하게, 길을 걷다 불쑥불쑥 접하게 되는 사람들 중에는 1년 전에 내린 빨간 눈이 차라리 그립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19p]


1B.

자살을 한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핏빛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가는 이 징조의 시작이 회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노라 표현합니다. 수 많은 붉은 비가 내리고 난 다음, 죽음의 온기로 가득한 도시를 잿빛, 회색빛으로 표현하는 것. 반대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흘러내리기 전의 그 피로 가득했던,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는 사람들. 피골은 상접했을지 모르겠으나 회색인이 되지는 않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으로 말입니다.


2A.
운두 깊은 관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눈밭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사람은 허리 굽은 노인의 아들이었다. 늙고 가죽만 남은 아들은 급격한 추위와 지진에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으로 보였다. 나는 곧바로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끊임없이 내리는 회색 눈이 아들의 몸을 점점 지워 나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 뚜껑이었다. 온몸을 지워내려는 회색 눈과 치우려는 나 사이에 치열하고도 기나긴 사투가 벌어졌다. 뚜껑을 치우려는 내 능력이 닫으려는 회색 눈보다 조금만 앞서도 이기는 게임이었다. [102p]


2B.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다룬 작품에서 빠지지 않고 반드시 등장하는 플롯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나의 안전과 희생을 통해 타인을 위험 혹은 죽음에서 구해내는 것. 다만, 일상에서는 오롯했을 이 희생적 행위가 이 배경에서는 다소 저열하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 행위가 스스로의 인간성을 증명하고 획득하기 위한 행위로 해석되는 지점에서 타인을 도구화하는 모습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타인의 의지와 선택을 주관적 판단으로 배척해버렸다는 점의 논리가 평상시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희망이 없는, 그 희망에 대한 가능성을 포기했던 세상에 원하지 않았던 타인의 개입으로 억지로 다시 참여하게 되는 것. 그 죽음에 대한 선택과 그 과정 또한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 명백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행렬에 뛰어든 회색인들은 광기와 공포에 빠져 더 이상 인간이라 하기 힘든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3A.
반의 발작은 다행히 위험한 순간에서 멈췄다. 그러나 정신은 아직까지 온전하게 돌아온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반의 목덜미 근처를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쓸어내리듯 연신 두드렸다. (중략) 그는 지금까지 이런 위급한 상황을 몇 번이나 혼자서 겪어왔던 것 일까. 반이는 이런 위기의 순간을 몇 번이나 고통스럽게 넘겨 온 것일까.
“후회해요?”
“뭘요?”
“반을 살려 온 거요.”
“한 번도요.”
“……..”
“이런 식으로 작별하는 걸 상상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124p]


3B.

책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여기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 정말 최대로 포용적인 상태가 되어서 나의 생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생까지. 하지만, 지금 당장 나의 생이 어찌될 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타인의 생을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말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의지대로 행동도 합니다. 망설임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상황 앞에선 망설일 시간조차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요. 곧 모두의 존재라는 것이 부정당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게 온다는데, 그는 여전히 이별의 어떤 모습에 대해 상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부정당하더라도 스스로 부정당하지 않는다면, 지킬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어제와 내일을 이어나갑니다. 지금 여기에 서서.



숫자 179에서 시작해 마지막 내용이 담긴 0을 향해 하나씩 차감되며 시작되는 이 소설의 구조적 형식은 확실하지도 않은 종말의 날을 어쩔 도리 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심리를 물리적으로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결말에 대한 초조함을 극대화시키는 장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독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숫자가 끝나는 페이지에 소설의 결말이 표현되어 있을 것이며, 그 지점에서 이 소설 또한 끝이 날 것이라는 것을. 장은진 작가는 그 점을 매우 교묘하게 파고들어 숫자가 0에 이르기까지 결말에 대한 암시와 결정을 최대한 유보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결말은 해피 엔딩 혹은 새드 엔딩, 둘 중 하나일 뿐인데, 종반부의 내용 중에서도 11, 9, 8, 6, 5, 4,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하나의 숫자에 징그럽게 많이도 쓰여있는 반 페이지 이상의 문장들은 결말을 알고 싶은 성급한 마음을 붙들지 못하고 0번에 대한 갈망만을 더욱 갈구하게 만듭니다. 이 소설은 해피 엔딩일까요. 새드 엔딩일까요. 만약 이 소설을 제대로 읽어보실 분이라면,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 소설의 숫자 0번은 마지막까지 아껴두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게 오고 안 오고는 노파에게 큰 관심거리가 아닌 듯했다. 관심사라면 오로지 하루를 지탱해 나가는 데 있는 것 같았다. 허무하디 허무한 게 삶이라지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살고 버텨야 한다. 딱 한 번 뿐인 게 그거니까. 아니, 허무하지 않다. 누군가를 애달프도록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눈을 감는다면 어찌 허무하달 수 있을까. 짊어지고 갈 수 없는 물질은 무상해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이건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가만히 돌아보면 올해는 제 마음이 조금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때보다 무언가 환원 받고자 하는 욕심이 강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 누군가에게 주었던 사랑을 지금 되돌려 받기를 원했고, 투여한 노력과 시간을 보상받기 원했습니다. 처음에 줄 때, 할 때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라며, 정말 실로 내가 주고 싶어 하는 일이라며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자 했지만요. 진실로 그러한 마음만 있었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아니었다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그게 진심이에요. 그리고 더 못된 짓도 했습니다. 상대로 하여금 마음의 부채를 빚지게 하는 일. 그래서 이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습니다.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짊어지고 갈 수 없는 물질에서 벗어나. 어떠한 바람도 없이 두고 올 수 있는. 진짜 마음을 주고 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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