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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ug 01. 2018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마지막까지 나아가기가 힘들어 꼬박 스무날이나 걸렸다.



어쩐지 ‘사랑’이라는 글자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요즘, 이 책을 고르게 된 건 순전히 저의 가벼움 때문입니다. ‘첫사랑 낙원’이라는 달콤한 암시의 타이틀 일부와 바이오 캔디의 옅은 주황색 비닐을 닮은 권두의 이미지는 제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순수하고 달콤하다 못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어떤 사랑의 심상을 느끼게 했습니다. 책의 띠지에 적힌 ‘죽음’과 ‘폭력’에는 눈길이 닿지 않을만큼. 어쩌면, 대만. 이 대만이라는 나라의 지난 달콤한 영화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뇌간 속으로 스며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의 소개를 먼저 시작해야겠습니다. 작가 소개는 책의 날개에 달린 설명으로 대신합니다.


대만 타이난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했고, 2009년 대입자격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하며 화제를 모았다. 타이베이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지만 2주 만에 우울증이 악화되어 휴학했다. 세 번의 자살 시도 뒤에 2012년 대만정치대학 중문과에 다시 입학했지만 3년 후 또 다시 우울증이 악화되어 휴학했다. 2017년 2월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발표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았지만 그로부터 두 달 뒤인 4월 27일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작가의 부모는 주인공 팡쓰치가 열세 살부터 유명 문학 강사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설의 내용이 작가의 실제 이야기에 바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가해자로 지목된 강사는 이 같은 내용을 부인했다. 2017년 대만에서 출간된 책에 실린 작가 소개는 다음과 같다.


타이난에서 출생. 전공이나 학력은 없다. 모든 신분 가운데 가장 익숙한 것은 정신병 환자라는 것. 두 가지 꿈이 있다. 하나는 소설을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말처럼 책벌레가 독서 애호가가 되었다가 다시 지식인이 되는 것이다.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그녀의 지독하고 어두운 삶이 담긴, 린이한 작가의 하나뿐인 작품이자 유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스스로 읽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영화의 경우에는 어쨌든, 나의 괴로움과 상관없이 스스로 저를 관통해 흘러나가 버리지만, 책은 내가 나를 그 속에 던져 그 이야기 속을 직접 헤엄쳐 나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는데 꼬박 스무 날이 걸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놓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나의 사랑이 빈곤하다고 하여 다른 이의 사랑마저도 값을 깎아 매도질한 것에 대한 반성과 세상의 양 쪽 모두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한 일들에 대한 미안함.


책은 총 세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낙원 / 실낙원 / 복락원. 말 그대로, 낙원은 프롤로그의 형식을 빌려 소설 속 피해자인 팡쓰치와 진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 그녀의 절친인 류이팅의 시선으로 그려집니다. 이 챕터의 마지막에서 선생인 리궈화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팡쓰치의 일기를 류이팅이 읽게 되면서 다음 챕터인 실낙원, 낙원을 잃어버린 시절의 팡쓰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소설은 상당히 고통스럽습니다. 피해자 소녀의 마음이 종이 위로 전해질 정도로 말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표현에 가감 없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면서, 그 묘사 이면에 13세 – 17세 소녀의 심리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일을 빼놓지 않습니다.


진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일까? 진실과 거짓은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세상에 절대적인 거짓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녀는 찢겼고 휘저어 뭉개졌으며 찔려 죽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녀도 선생님을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것이 된다. 그녀에게는 다른 미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과거 자신의 위조품이다. 애초에 진품이 없는 위조품. 분노의 오언절구는 영원히 늘여 쓸 수가 있다. 쓰고 또 쓰고 천 글자를 써도 끝나지 않는, 애절하고 장엄한 시가 될 수 있다. 선생님은 문을 닫고 검지를 임술에 대며 말했다. 쉿, 이건 우리 둘의 비밀이야. [94p]


실낙원 파트의 가장 잔혹한 묘사 뒤에, 팡쓰치는 낙원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놓아버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챕터 복락원. 허나, 작가는 이 복락원 파트마저 미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었겠죠. 실락원을 통해 그려졌던 것이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가해자 개인의 폭력성이었다면, 복락원을 통해서는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성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인공인 팡쓰치가 아니라 이원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팡쓰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물이지만, 그녀 역시 남편의 학대에 고통 받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는 단순히 팡쓰치 개인의 아픔만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대만 사회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 곧 80-90년대 우리 나라 여성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아파하면서도 그저 속으로 감내하기만 해야 했던 모습들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마오마오라는 이물이 오히려 더 부각이 되는 것은, 바보같이 순진하지만 나의 감정이 아닌 타인의 감정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유일한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쩌면, 이미 유명을 달리한 작가 린이한이 실제로 그리던 이상적인 남성성, 이상향과 같은 것들 것 담긴 캐릭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 소설의 가장 큰 의의는, 이와 비슷한 사건을 마주했을 때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지, 왜 부모나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그 고통을 왜 혼자서만 짊어지려고 했는지 등의 내뱉기엔 쉬운 의문들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에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의 97p에 등장하는 “성교육이라니? 성교육은 성이 필요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야. 교육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니?” 라는 엄마의 대사와 더불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팡쓰치의 아빠는, 작가 본인이 겪은 또 다른 폭력, 가장 가깝고 안전했어야 할 가정조차도 도움이 될 수 없었음을 암시합니다.


작가는 이 책의 말미에 있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그 어떤 팡스치든 소비되어버릴까 두려워요. 그녀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엽기적이고 선정적인 소설로 보여지는 건 원치 않아요. 매일 여덟 시간씩 글을 썼어요. 쓰는 동안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언제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죠. 다 쓰고 난 뒤에 보니 가장 무서운 건 내가 쓴, 이 가장 무서운 일이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것 뿐이에요. 소녀는 피해를 입었어요. 소녀는 독작들이 이 대화를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상처받아요. 하지만 악인은 고고하게 높은 곳에 있죠. 글밖에 쓸 줄 모르는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요.


이 책은 작가가 자신의 아픔을 위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도 혼자 고통 받고 있을 또 다른 팡쓰치들에게 보내는 아픈 메시지였던 셈입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철저히 홀로 견뎌야했을 그 고통이 더욱 서글프기만 합니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요? 어째서 피해자가 입 다무는 걸 교양이라고 해요? 어째서 남을 때린 사람이 텔리비전 광고에 나오죠? 정말 실망스러워요. 언니에게 실망한 건 아니에요. 이 세상이든 인생이든 운명이든 아니면 신이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정말 형편없어요. 요즘은 소설을 읽다가 인과응보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울음이 나와요. 세상에 아물 수 없는 고통이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인정했으면 좋겠어요.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제일 싫어요. '그래서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서정적인 결말이 싫어요. [267p]

 

이 책을 읽고 저는 김소월 시인의 첫사랑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이 시는 조국의 해방을 첫사랑의 감정에 빗댄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팡쓰치도. 린이한 작가도. 다음 생애엔 꼭 그런 사랑을. 누구나 꿈꿀 수 있는 보통의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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