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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pr 15. 2020

여성 최초의 멜버른 컵 우승, 그녀의 이야기.

#180. 라라걸


*촉박한 일정으로 간략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이후에 보강된 내용의 글을 한번 더 게재 / 기사처리 할 예정입니다.


01.


매년 11월 첫째 주 화요일이 되면, 호주 멜버른에서는 큰 축제가 열린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최고의 경주마와 조련사, 기수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기량을 뽐내기 위함인데, 이날은 빅토리아주 정부가 공식 공휴일로 지정할 만큼 큰 축제로 자리잡았다. 1861년 17마리의 말을 놓고 170 파운드의 상금을 놓고 경주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는,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마대회 ‘멜버른 컵(Melbourne Cup)의 이야기다. 이 대회는 첫 대회 이후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한해도 빼놓지 않고 매년 열려 왔으며, 지난해인 2019년에도 159주년 행사가 성황리에 열렸다고 한다.

이렇게 역사가 깊고 권위 있는 대회에서 유감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처음 100년의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여성 기수가 우승한 기록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우승은커녕 대회에 참가한 기수의 수만 따져도 총 3,000여명의 기수 가운데 여성 기수는 10명이 채 되지 못했다고 한다. 경마가 지구 상에 존재하는 위험하고 격렬한 스포츠 중 하나라고는 하나 구조상 어떤 문제가 내재되어 있지 않고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지난 2015년, 155회째로 열린 멜버른 컵에서 ‘미셸 페인’이 역사상 여성으로 처음 우승컵을 거머쥔 일은 그래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대회 사상 다섯 번째 여성 기수였고, 155회 대회에 참여한 24명의 기수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 그 중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최초로 멜버른 컵을 차지했다.

영화 <라라걸>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을 연출한 레이첼 그리피스 감독의 숱한 역경 속에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의 삶을 통해 여성의 열정과 믿음의 힘을 표현해 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녀가 우승을 차지하고 1개월 만에 영화화에 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감독은 단순한 그녀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자란 어린 시절 환경에서부터 어떤 역경을 겪어왔는지, 그녀를 움직이게 한 힘은 어디에서 기인 했는지를 직접 탐구하며 한 사람의 삶을 영화 속에 녹여낸다.

02.


영화 <라라걸>의 전체적인 구성은 그동안 제작되어 온 일반적인 전기 드라마의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물이 현실에서 성취한 업적을 따르며 그 과정에서 획득되는 감정을 영화로 이식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만, 다른 작품에 비해 주인공인 미셸의 서사에 조금 더 집중하는 듯한 부분은 있다. 다른 인물의 개입으로 인해 미셸에게 주어져야 하는 관객의 몰입이 주변부로 흩어지지 않도록 경계한다. 특히 이 부분은 페인 가(家)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전반부에서 두드러지는데, 누구보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오빠 스티비(스티비 페인 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셸이 성장하는 과정과 목표를 형성하는데 활용되는 장치로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가족 모두의 이름이 설명되지 않고, 심지어는 불리지 못하는 인물이 있기도 하나 페인 가족의 이야기가 소개되는 것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장치 이상의 역할을 갖는다. 막내딸로 태어난 미셸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장차 그녀가 자라며 겪게 될 사회의 부조리와 차별과 같은 여러 상황들을 축소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응하는 어린 미셸의 행동을 통해 관객들은 성인이 되고 난 이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추측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감독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미셸의 열정과 에너지가 어디로부터 기인했는지 또한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는 지점이 된다.



03.


이 작품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는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다. 이 부분 역시 그녀가 어린 시절 지켜본 가족의 관계 속에서 처음 등장한다. 경기 중 낙마 사고로 인해 실력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언니 브리짓(아넬리세 앱스 분)을 바라보는 어린 미셸의 눈을 통해서다. 월등히 나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멜버른 컵에 출전할 기회를 패트릭(애런 글레낸 분)에게 내줘야 했던 언니의 문제는 머지 않은 미래에 반복되는 미셸의 문제와 함께 이 문제가 개인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말과 함께 하는 생활이 좋아서, 직접 타지는 못하더라도 트랙 주변에서 공기를 마시는 것으로도 마음이 벅차 올라 무급으로 트랙 일을 돕게 해달라는 요청도 무시당하기 부지기수. 남자 기수들과 스탭들로부터 되돌아 오는 것은 값싼 성희롱과 모멸감뿐이다. 어렵게 트랙에 서게 되더라도 남자 기수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번잡한 의무들이 부과되고, 동일한 수준의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는 등의 차별도 이겨내야 한다. 레이스 중에도 조금의 트집이라도 잡히면 모든 비난은 여지없이 그녀에게 쏟아진다. 이 모든 차별은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100년이 넘는 멜버른 컵의 역사 속에 우승자는 물론 기수의 명단에서조차 여성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04.


세계적인 명마 ‘블라디 보스토크’와의 일화는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남자 기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게 돌아오는 기회를 어떻게든 붙잡기 위해 무리를 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이 녹아있는 대표적인 일화다. 주최 측의 무리한 요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바늘귀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그 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어내지만 낙마하고 만다. 두 번 다시는 경마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을 정도의 심각한 사고. 하지만 그녀는 끝내 다시 일어선다.

3,200회의 출전, 361회의 우승, 7번의 낙마, 그리고 16번의 골절. 차별과 더불어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경마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녀는 인생의 목표와도 같은 멜버른 컵 출전을 위해 미셸은 끊임없이 부딪히고 도전했고, 부조리함을 핑계로 현재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05.


몇 번의 경주 장면과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멜버른 컵의 경주 장면은 실사 장면과 극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긴박한 중계와 더불어 점차 고조되는 말발굽 소리, 뿌옇게 피어 오르는 흙먼지를 보고 있으면 질주하는 말들의 스릴이 직접 전해져 오는 듯 하다. 그녀만큼이나 부상 경력이 많은 말 ‘프린스 오브 펜젠스’와 호흡을 맞추는 미셸. 세계에서 가장 큰 대회에서 함께 극적인 역전을 해내는 그녀의 모습은 첫 만남에 등장한 바닷가의 풍경과 오버랩되며 더욱 진한 감동을 남긴다.

레이첼 그리피스 감독이 이 영화를 연출하는데 있어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미셸이라는 캐릭터가 위대한 영웅이라는 완벽주의 이미지에 갇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 위대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그녀 또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온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일 수 있기를 바랐다고 말이다.

멜버른 컵을 들고 집으로 돌아 온 미셸과 그런 그녀를 처음으로 반기는 아버지. 두 사람이 길게 늘어진 방목장의 길을 걸으며 끝이 나는 영화의 엔딩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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