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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May 29. 2020

10개월, 나의 삶이 망가지는 시간.

#182. 2020 전주국제영화제_상영작 02_십개월


올해 열릴 예정이었던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코로나 19' 사태를 맞아 기존의 운영 방식을 변경했습니다. 이에 5월 28일(목)부터 6월 6일까지 열흘에 걸쳐 영화제 상영 예정이었던 작품들을 온라인 OTT 플랫폼인 'wavve'를 통해 유료 상영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www.jiff.or.kr)을 참고바랍니다.



01.


젊은 산모와 한 의사가 병실에 함께 있다. 산모는 사고라도 크게 당한 듯 왼팔에 큰 붕대를 감고 누워있고, 의사는 그 곁에 앉아 자리를 지킨다. 이윽고 산모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고 주변을 살핀다. 어리지는 않지만 앳된 얼굴. 의사는 담담한 어조로 아기는 무사하지만 그녀의 팔이 부러졌다고 말한다. 그의 판단으로는 그 와중에 팔로 아기를 잘 감싸 안았던 게 아닐까 싶단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여자. 정신을 차린 듯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선생님. 저 다 망가졌어요. 하나도 빠짐없이. 진짜 다, 다 망가졌어요. 저 이제 어떻게 해야해요? 어떻게 해야하는 지만 알면 저 그거 하면 되잖아요. 왜. 왜. 저만 이런 거에요? 다른 사람들 다 멀쩡하고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왜 나만 이렇게 막막하고 힘든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다 멀쩡하다면 산부인과 의사인 제가 이런 엉터리 상담사가 되어 있지는 않겠죠. 그렇죠? 다들 막막합니다.'


산부인과 의사로 보이는 그의 말이다. 모든 산모는 앞이 막막하단다. 영화 <십개월>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02.


조금 전, 울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그녀의 이름은 미래(최성은 분)다.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뛰쳐나와 컴퓨터 게임 개발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 하나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때때로 핀잔을 주는 부모님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재가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속을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있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도 있기에 웃음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가 뱃속에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남궁선 감독의 영화 <십개월>은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이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출산을 하기까지의 시간을 그린 작품이다. 임신을 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고 느끼는 미래. 출산까지 10개월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는 그녀의 삶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얼마나 출산에 비협조적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03.


언제 잠자리를 가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계획에 없던 임신. 아직 자신의 미래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상황이기에 반가움보다는 당혹함과 걱정이 더 먼저 밀려온다. 임신 테스트기를 15개나 사서 부정하고 또 부정해보지만 이미 시작되어 버린 현실은 바뀔 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남자친구 윤호(서영주 분)가 좋아한다는 것이랄까? 하지만 그마저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이지 당사자인 미래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제 아무리 인생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지만 그녀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일부터 지우는 일까지 가능한 모든 상상이 머리를 가득 메운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내적 갈등만 가져다 주었다면 조금 나았을 지 모르겠다. 흔들리기 시작하는 자신의 미래를 홀로 버텨내는 동안 외부적인 상황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음과는 달리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남자친구의 현실, 그로부터 비롯되는 관계의 균열, 여성의 의무를 강조하며 결혼과 출산을 서두르는 양가 부모님의 압력, 그리고 건강을 잃어가면서까지 매달렸던 일의 경력 단절까지. 불러오는 배의 크기만큼이나 미래를 짓눌러오는 현실 속 문제들은 더욱 커져만 간다.


영화 <십개월>은 객관적 지표라고 할 수 있는 임신 기간과 주관적 지표인 인물의 핵심 키워드를 따르며 진행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내용들, 예상하지 못했던 임신을 경험하는 산모들이 겪게 되는 내적 문제와 외적 갈등을 모두 담아내기 위한 방안이다. 모든 산모들이 공통적으로 지나게 되는 임신 기간의 명시와 영화 속 핵심 인물인 미래의 개인적인 상황에 따른 키워드의 명시는 공감의 영역과 더불어 개별적인 지점에까지 이야기가 닿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간결함의 획득은 덤이다.


04.


카오스.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을 혼돈스럽다는 뜻으로 표현하던 미래는 이 단어를 자신의 태아에게 붙이며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자 노력한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이를 지울 생각까지 했던 처음에 비하면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벌써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과거에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이제는 집을 떠날 수 없는)들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없기도 하고, 임신이 단순히 아이를 낳는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일임을 깨닫고 난 후에는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이처럼 생명의 탄생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숭고하게만 여겨왔던 이 사회의 지난 사고 방식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남궁선 감독의 의도는 영화의 곳곳에 묻어난다. 숭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럴 수는 없다는 뜻이다. 작품 속 병원의 대기실에서도 모든 산모들이 행복해 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러니까 이 영화 <십개월>은 출산의 과정을 통해 산모들이 겪을 수 있는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것 외에도 임신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명확히 이야기 하고자 하는 작품이기도 한 셈이다. 이제 곧 태어날 아이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아이보다 더 중요할 사람.



05.


아주 무거운 영화는 아니다. 의외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들이 제법 보인다. 그렇다고 만만하다는 소리도 아니다. 시종일관 자신의 호흡을 놓지 않으며 주제가 갖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배우 최성은의 연기가 있다. 아직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도 못한 이 배우의 연기는 마치 이미 동일한 고민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게 하는 것 마냥 이 영화 <십개월>이 생동감 있게 팔딱거릴 수 있는 원동력이다.


십 개월이 지나고 그녀는 지금 병원에 누워있다. 힘겨운 사투 끝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던 존재와 조우한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울음부터 터뜨린다. 아이를 바라보며 미래는 파르르 떨려오는 입술 너머로 수많은 감정을 삼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이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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