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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Sep 11. 2015

영화, 쉽게 보면 안 되나요?

내가 <넘버링 무비>를 쓰기 시작한 이유.



나도 몰랐다. 내 인생에서 영화라는 것이 이렇게 큰 존재가 될 줄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나는 내 인생의 첫 영화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간 대구의 한 작은 영화관에서 본 <뮬란>이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 건 "Reflection"을 부르며 쓸쓸해하던 뮬란의 표정과 그 옆에서 조잘거리던 귀뚜라미의 모습.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그 이후로 나는 영화라는 것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영화가 끝난 뒤 며칠 후 맥도날드 해피밀 세트를 사 먹은 나는 귀뚜라미 인형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던 건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였다. 나는 그때부터 혼자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는데 ,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 영화를 보러 다녔던 건 작품을 감상한다는 의미보다는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알아봤자 영화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나? 하지만 영화의 시작을 앞두고 상영관 내의 모든 불이 꺼지고 까만 스크린에 영사기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빛 한 줄기만 비추면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곤 했다. 어떤 감정을 쏟아내어도 눈치를 볼 사람도 없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에 오롯이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 그 당시 내게 영화란 그런 것이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열릴 당시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 한 건 이때부터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잡지 <시네 21>을 정기 구독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 부산 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충무로 국제영화제, 인디포럼 등의 각종 영화제를 쏘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 때.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블로그를 통해 글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영화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냥 좋았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고, 그런 글들을 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았다. 물론 <시네 21>이나 <무비위크>(지금은 사라진 주간지이다.)에서 접하는 글들을 따라 하기에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솔직히 그때는 잡지를 읽으면서 그 곳에 쓰여진 칼럼 속에 모르는 용어들도 부지기수였다. 주변에는 영화를 전공한 친구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입대를 몇 달 앞두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를 책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영화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하고 멀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데 이렇게 어려운 단어들을 써야 하는 걸까? 그냥 영화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잘못된 것일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저런 고민들을 한 지 5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넘버링 무비>는 시작되었다. 물론 그 5년의 시간 동안 많은 일들도 있었다. 군대도 다녀왔고, 캐나다에도 1년 머무르게 되었고. 메이저 영화사에서 현장 경험도 했고. 그러면서 블로그를 통해서는 책을 통해 습득한 전문적인 용어들로 가득한, 작품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뒤섞어 놓아 마치 <시네 21>의 칼럼과 같은 글들을 허세스럽게 쏟아내었고, 페이스북 페이지 "크랭크 인"을 통해서는 최신 영화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저런 과정들을 거친 결과물은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사람들은 읽기 어려운 글과 길어 보이는 글들은 반사적으로 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두 번째, 영화를 소비하는 대부분의 대중은 결코 헤비 유저가 아니며, 여러 작품을 아우르는 전문적인 내용보다는 자신이 향유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작년 봄이 끝날 무렵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쓰기 시작한 <넘버링 무비>는 최근 영화 <함정>을 써 내면서 지난 1년 반 동안 총 187편의 영화를 다룬 일종의 연재 글 프로젝트다.  <넘버링 무비>라는 단어만 보더라도 쉽게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내가 <넘버링 무비>의 포맷으로 단락마다 번호를 매기는 방식을 만들어 낸 이유는 기존의 긴 글에서 드러나는 반사적인 거부감을 경감시키기 위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넘버링 무비>의 글을 좋아해주기 시작하면서 개인 메일 혹은 메시지를 통해 연락을 받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행복했던 이야기가 바로 <넘버링 무비>를 통해 영화가 더욱 흥미로울 수 있었고,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넘버링 무비>를 만들 게 된 두 번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어렵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어떤 대상을 깊게 탐구하고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확실한 용어들과 개념들, 그리고 역사적 배경과 흐름까지 모든 전반적인 이야기들을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문가들을 위한 스텝이다. 한 달에  한두 편 정도, 팝콘 무비로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런 것까지 꼭 알아야만 할까?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 "누벨바그 사조". 과연 이 용어에 대해 아는 관객이 얼마나 될 것이며, 일상적으로 영화를 즐기는데 이 용어가 얼마나 중요할까? 그런데 이런 어려운 용어들 때문에 관객들은 특정 작품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 "누벨바그 사조"라는 단어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라는 작품에 대해 보지도 않고 선입견을 갖게 된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 작품이 개인에게 재미있는 지 여부를 떠나 작품을 수용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게 만들 선입견부터 만나게 된다면, 그건 차라리 "누벨바그 사조"가 뭔지도 모르고 <네 멋대로 해라>라는 작품을 관람하는 것만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화와 관련된 정확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이전에 먼저 모든 작품들을 선입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 <넘버링 무비>에는 최소한의 전문용어만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넘버링 무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같은 작품 속에서도 다양한 시각과 해석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술이라는 분야가 그렇겠지만, 같은 작품을 보고 나서도 사람마다 해석하는 방법들이 모두 다르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가지각색이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프레임(Frame)이 모두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프레임(Frame)이 존재하는 한 우리 모두는 결코 세상의 모든 해석을 혼자서는 설명해 낼 수 없다. 매년 200편 이상의 작품을 수용하고 있는 나조차도 그렇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특정 작품의 다양한 모습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고정된 프레임(Frame)들이 존재하기에 후천적인 노력으로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넘버링 무비>를 통해 서로의 다양한 시각을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 역시도 최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꺼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인스타그램의 계정에서 이 곳 브런치로 넘어 온 이유는 플랫폼의 특성 상 2,000자 정도에서 글자 수가 제한되는 것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처음 <넘버링 무비>를 시작하고자 했던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지금 현재는 신작에 대한 이야기들과 동시에  그동안 인스타그램에 남겨왔던 글들에 조금 더 살을 붙여서 업로드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들이 오프라인 공간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처럼. 앞으로 이 공간을 통해서도 더 많은 생각들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영화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말 그대로 그냥 즐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평점이나 평가에 휘둘릴 필요도 없으며, 어려운 용어들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도 없다. 누군가에게 악몽 같았던 작품도 내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엄지 손가락을 세우는 수작도 막상 내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 있는 것이 영화다. 우리가 서로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서로에 대해 알 수 없듯이, 영화라는 것 역시 그렇다는 걸 알아주기를.



**'누벨바그 사조(La nouvelle Vague)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을 가진 1960년 대에 일어난 프랑스 영화계의 한 사조로서 그 전에 없었던 새로운 분위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대표작으로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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