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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un 07. 2021

달리지 않던 사람이 스스로 달리는 이야기.

#213. 단편영화 <주근깨>


**넘버링 무비의 모든 글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영화와 관련된 많은 내용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00.


영신(권영은 분)과 주희(정수빈 분)는 다이어트 캠프에서 만난 사이다. 캠프에서 두 사람은 룸메이트로 만나 친구가 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꽤 여유로워 보이는 영신과 달리 주희는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다이어트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 실제로 주희는 엄청난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그래도 영신은 개의치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이 캠프를 탈출해 맛있는 음식을 원없이 먹는 것이며, 그 욕구를 참을 수 없을 때가 되면 조교 선생님들이 관리하는 냉장고를 털기도 한다. 오히려 살을 더 빼고 싶어하는 것은 주희다. 2kg만 더 감량하면 캠프 비용을 전액 환불 받을 수 있기에 그 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고자 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굳이 찾자면, 다이어트 캠프에 입소하고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영신의 모습 정도랄까. 사실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현실에서 단단하지 못한 의지의 결과를 목격하는 경우가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니 말이다. 꼭 다이어트를 성공해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영화는 이 귀엽고 평온한 이야기 속에 두 개의 큰 돌을 집어 던진다. 하나는 어느 날 밤에 일어난 갑작스런 입맞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이어트에 성공한 주희가 다이어트 캠프 내에 일으키고 만 파장이다.


먼저, 영신과 주희의 입맞춤은 영신이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냉장고를 털던 날에 일어났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나눠 마셨고, 시작은 주희 쪽이 먼저였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어쩌면 동경일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감정은 뜨거운 불꽃이 되어 영신의 마음으로 옮겨 붙는다. 이 짧은 순간은 캠프의 본 목적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던 영신에게 어떤 계기를 만들어 준다. ‘있잖아 주희야. 엄마가 나를 여기에 가둬줘서 정말 다행인 것 같아.’


하지만, 세상은 영신의 마음이 잔잔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운동을 위해 다같이 산을 오르던 날, 주희와 주희에게 관심을 보이던 조교 하나가 숲 속에서 은밀한 행위를 나누는 것을 영신이 목격하게 된다. 연못에 그려진 두 파장, 그 교집합의 공간에 홀로 던져진 영신은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자신은 해내지 못한 다이어트를 멋지게 성공해내던 그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던 자신에게 (자신의 주근깨를 보며) 예쁘다고 먼저 말해주던 그녀. 제약으로 가득한 캠프 안에서 의지가 되어주던 그녀가 바로 주희였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극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의 중심에는 영신이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장의 내러티브에서도, 우정과 사랑의 내러티브에서도, 갈등과 회복의 내러티브 속에서도 모두 말이다. 다만, 영화의 종반부에서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며 스텝 업 하기 전까지는 오롯이 피동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다이어트를 원한 것도 자신이 아니라 부모였고, 사랑의 갈등에 휘말리게 된 것도 주희의 행위에 의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달리지 않던 사람이 스스로 달리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던 김지희 감독의 의도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


이후에 이어지는, 주희와 사랑을 나눴던 조교가 캠프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두 사람의 밀회가 발각되는 일이나 그로 인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까 초조해 하는 주희의 모습과 같은 장면들은 모두 영신을 깨우기 위한 재료에 불과하다. 이야기의 끝자락에 이르러 일련의 모든 사건을 자신이 짊어지고 자발적으로 캠프를 떠나오는 영신의 모습. 그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가 진정으로 닿고자 했던 장면이다.


영신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얕은 감정이나 욕망에 휘둘리며 타인의 결정에 끌려 다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내딛는 이 걸음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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