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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Jul 25. 2023

젖꼭지 3차대전

인디그라운드 12번째 큐레이션 : 내 일기장 속 영웅들 3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2019년쯤이나. 여성 연예인들의 노브라가 사회적인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PD 출신인 백시원 감독도 당시 방송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놓고 상사와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상사는 두드러지는 여성의 젖꼭지에 모자이크를 처리하라고 했지만 취지에 옳지 않다고 생각한 감독은 극 중 인물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불편함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이 영화 <젖꼭지 3차 대전>은 그런 사실적 상황 속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코미디적 연출과 다양한 상황을 제시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많은 부분이 각색되고 픽션화되기는 했지만 당시에 경험했던 사회에 만연해 있던 은근한 성차별에 대해 들여다보고자 한 것이다.


영화는 연예인의 젖꼭지가 도드라지는 방송 화면을 모자이크 하라는 마정도 부장(정인기 분)에 맞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용 피디(최성은 분)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구조도 그리 복잡하지 않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두 사람이 총 세 차례에 걸쳐 부딪히는 것이 뼈대의 전부다. 대신 각각의 지점이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 번의 대전) 던지는 문제의 화두는 모두 다르다. 갈등의 중심에 놓인 매개는 여성의 젖꼭지 하나이지만, 감독은 이 과정을 통해 여성의 특정한 신체 부위가 드러나는 것에 (실제로는 여성의 자유와 권리, 평등을 보장하는 일에) 반감을 가지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차별적이고 비합리적인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02.

마 부장과 용 피디, 두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부딪히게 되는 이유는 방송위원회의 심의 규정에 있다. 극 중에서 설명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자면, 심의 규정 레벨 4에 해당되는데, 여기에는 여성 및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유두가 방송에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레벨 4의 경우에는 심의 상 절대 넘지 말아야 할 바운더리 라인과도 같아서 명시된 내용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문제는 성기의 경우 남녀 무관하게 노출되지 않아야 하지만, 유두의 노출이 금지된 것은 여성에게만 국한된다는 것.


그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이미 방송된 영상을 돌이켜 보면 아프리카 원주민의 삶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는 여성의 나체에 모자이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나간 케이스가 있다. 노브라 정도가 아니라 태초의 모습 그대로가 담긴 상태 그대로 방영이 된 셈이다. 반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 ‘비너스의 탄생’ 속 여성의 모습에는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다. 현재의 심의 규정에 위반되는 같은 여성의 유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은 있는 그대로 방송이 되고 또 다른 한쪽은 모자이크가 되었다. 심지어 회화의 쪽에 모자이크가 덧입혀진 채로. 심의 규정에 명시된 내용에 공정성이 확보되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이전에 이미 그 기준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03.

이 영화에서 중심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젖꼭지이지만, 이가 상징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평등에 해당된다. 이 지점의 문제가 오랜 세월에 걸쳐 억압되고 제한되어 왔음을 설명하고 강조하기 위해 백시원 감독은 영화 속에 여러 레퍼런스들을 심어 놓는다. 가수 박지윤의 성인식이 유행하던 때에 배꼽티 금지령이 있었던 사실과 (이때는 여성의 배꼽 노출이 문제가 되어 모자이크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 보다 더 오래 전인 가수 김완선 씨의 시대에는 찢어진 청바지조차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지금 여성과 달리 남성이 자유롭게 상의를 탈의하고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근거를 제시한다. 1930년대의 미국에서는 남녀 모두가 바닷가에서 상의를 탈의할 수 없는 법이 있었지만 남성들이 불편함을 호소하며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70년간 여성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두 젖꼭지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 것이라는 의미다. 젖꼭지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는 자유로울 수 있고 또 누군가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영화가 남녀 갈등을 조장하거나 성차별만을 부각하기 위한 작품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성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용 피디의 반대쪽에 서 있는 마 부장이라는 인물은 극적인 대립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에 가깝다. 오래된 가치만을 고수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은 묵살하는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인물이다. ‘모든 남성이 그렇다’는 흑백에 가까운 시선을 이 영화가 가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용 피디 곁에서 함께 싸우고 힘이 되는 조연출 호진(장요훈 분)의 존재로 증명이 된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에는 남성이 어떻다던가, 여성이 어떻다는 식의 대사는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04.

영화가 구조화한 세 단계에 걸친 두 사람의 대립은 그런 마 부장의 시선과 주장이 얼마나 편협하고 기울어져 있는 것인가를 확인해 가는 과정이다. 그는 처음에 여성의 노브라와 유두의 존재가 성상품화에 해당하고 심의에 벗어난다며 개인의 주장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곧 젖꼭지라는 단어조차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한다며 그 글자가 주는 뉘앙스 자체마저 불쾌하다며 이 주장에 명확한 근거나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선정적인 젖꼭지와 신성한 젖꼭지가 따로 있다거나, 남자아이의 젖꼭지는 괜찮고 여자아이의 젖꼭지는 문제가 있다는 식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갈등이 심화되고 용 피디의 의견에 합당한 근거가 더해질수록 마 부장의 주장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한다.


반대의 위치에서 마 부장의 압력을 조금씩 피해 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가는 마 피디의 행동에는 익살스러우면서도 눈물 나는 구석이 있다. 심의 규정이라는 직장 내 시스템과 상사의 고루한 입장이 자신의 의견은 물론 여성 전체의 권리를 침해하는 상황. 직접 들이받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현실적인 부분과 실리적인 부분 모두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는 모습 때문이다. 영화가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코미디 장르로 표현되고 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 지점의 문제가 개인의 노력으로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05.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영화는 젖꼭지라는 하나의 소재를 중심으로 극을 완성했지만 실제로 담아내고자 했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넓은 쪽에 있다. 결국은 여성의 자유와 평등 같은 권리에 대한 이야기고, 신체적으로는 자기 결정권까지 닿아있다. 어떤 논란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궁극적인 의미의 권리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주어지기까지는 아직 멀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을 연출한 백시원 감독은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이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같은 마음이다. 극 중 마 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단어 하나, 장면 하나에만 몰두되지 않고 이 영화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지 않을까? 모두가 함께 용기를 내어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된다.



백시원 / 한국 / 2021 / 23 Mins

최성은, 정인기, 장요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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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열두 번째 큐레이션 ‘내 일기장 속 영웅들’ 중 한 작품입니다. 오는 2023년 7월 30일까지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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