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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Nov 03. 2023

도시락

인디그라운드 큐레이션 리플레이 상영 1 : 시원한 바람, 선선한 마음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누나 유정(김나연 분)을 대신해 집안일을 돌보는 동생 유안(구준우 분). 누나의 끼니까지 챙기며 두 사람의 몫을 보살피고자 하지만 유정은 그런 동생의 마음이 미안하기만 하다. 자신을 위해서 뭘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며 괜한 타박을 한 이유다. 아직 초등학생인 동생이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인 토토로를 좋아하는 아이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안에게도 누나를 대신해 집을 돌봐야 할 까닭이 있다. 두 사람만 남았을 때는 자신이 누나를 대신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출장으로 집을 떠난 아빠의 당부다.


영화 <도시락>은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마음에 안고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 누나 유정과 그런 누나를 대신해 두 사람의 몫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생 유안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어른의 보살핌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두 아이의 위치를 전환시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쉽게 두드러지지 않는 마음의 모양을 포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영화가 마련한 장치는 전환된 두 사람의 자리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음으로써 반드시 누나가 동생을 돌볼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 누나 유정이 갑작스러운 학교 급식 문제로 인해 동생 유안의 도시락을 챙겨야만 하는 상황에 놓는 일이다.


일반적인 상황과 달리 누나와 동생의 위치가 바뀌어있던 관계의 재정렬은 감춰져 있던 인물의 감정을 외부로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수돗물에 이상이 생겨 학교의 급식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부탁할 사람이라고는 누나 밖에 없는 동생의 미안함과 항상 도움만 받았던 누나의 책임감 같은 것들. 이는 도시락을 만들어 달라는 소리는 하지 못하고 배달 음식 하나만 보내달라는 유안의 모습과 어떻게든 직접 만든 도시락을 완성해 보려는 유정의 행동으로 발현된다. 보이지 않는 대신 맛과 촉각에만 의지해 재료를 구분하고 음식을 만드는 일은 물론 쉽지 않은 도전이다. 하지만 어떤 제약과 한계의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서 마음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현실적인 문제를 함부로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생이 좋아하는 인형을 곁에 두고 도시락을 만들기 시작하지만 유정의 도시락은 노력에 비해 아쉬움이 남고, 동생의 학교에서 만난 친구 엄마의 가벼운 배려와 응원의 말은 그렇지 않아도 부끄럽던 도시락 가방의 존재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지금 동생에게 필요한 엄마의 자리를 자신이 모두 채워주지 못한다는 마음이 다시 뾰족하고 쓸쓸하게 돋아난다.


“마음은 더 큰데 너무 형편이 없어서..”


누나로부터 햄버거를 건네받은 유안은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 남겨져 있던 요리의 흔적과 누나의 도시락을 마주하게 된다. 다른 곳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위하던 마음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만난 마음은 더 이상 위축되지 않는다. 누나의 손가락을 쥐고 토토로를 닮은 주먹밥의 구석구석을 매만지며 어떤 모양인지 설명해 주는 동생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이 오누이가 가진 마음의 형태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색과 크기를 말이다.



오한울 / 한국 / 2021 / 19 Mins

김나연, 구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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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시원한 바람, 선선한 마음’ 중 한 작품입니다. 2023년 11월과 12월의 순차적 상영을 통해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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