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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Nov 23. 2023

양궁소녀

인디그라운드 큐레이션 리플레이 상영 5 : 우리 이웃들이 수상해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처음 만나는 세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전부가 될 것만 같은 예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얼마나 자주 찾아올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세계로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 촉박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다.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클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 역시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어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 선택이 하나뿐인 자신의 인생을 어렵고 고되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기꺼이 자신을 내던져야 할 것만 같은 순간 말이다.


영화 <양궁소녀>는 아직 자신의 꿈이 온전히 세워지지 않은 소녀의 불안정한 심리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작품이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기는 하지만 정작 그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확신은 들지 않는 시기. 간혹 흥미가 생기더라도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결정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서기만 하는 때. 우리 모두가 지나왔지만, 역시 정확한 답은 내릴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이야기와도 같다. 선택이라는 행위의 무게 또한 그 확신과 결정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된다. 책임을 진다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 모르기에 움츠려들 수밖에 없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책임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인물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02.

이야기는 여러 학원을 전전하는 수민(김푸름 분)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시간에는 책이 가득 든 캔버스 가방을, 또 다른 시간에는 검도 학원에서 쓰는 죽도를 어깨 뒤로 둘러맨 모습. 잠깐의 여유도 없이 학원 건물을 오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작 그녀가 좋아하는 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컴퓨터 슈팅 게임. 수민은 핸드폰으로도 연동이 되는 이 게임을 틈만 나면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수민을 학원 골목으로 내미는 것은 당연하게도 엄마(이가경 분)다. 심지어 이제는 양궁 학원까지 다니라며 성화다. 좋은 학교를 가는 것과 활을 쏘는 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게임 상에서 쏘는 총도 부족해서 활까지 쏘러 다니냐며 웃는다.


이 극의 초반에서 양립하는 대상은 자신의 힘으로 곧게 서지 못하는 수민과 그런 딸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엄마다. 영화가 두 인물을 직접 부딪혀 스파크를 발생시키는 식으로 동력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마뜩잖기는 하지만 엄마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하루에 큰 반감을 가지지 않는 수민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오히려 무엇을 하고 싶다는 꿈이 없기에 엄마의 적극적인 개입에 수동적인 태도로 협조한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 딸이 자신의 꿈이나 목표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적도 없었고, 하라는 대로 잘 따르며 곧잘 하는 모습을 보이니 공부에만 더 욕심을 갖게 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런 두 인물을 지속적으로 하나의 프레임 속으로 밀어 넣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영화는 새로운 학원에 등록할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말을 뒤로한 채 핸드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 같은 공간에 두고자 한다. 심지어 이 공간은 집과 같은 두 인물의 개인적인 공간이 아니라 엄마가 운영하고 있는 병원의 진료실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로운데, 관객들은 이 지점으로부터 일종의 불안정성을 경험하게 된다. 엄마의 직업적인 부분으로부터 획득되는 통념적 사고와 두 사람 사이의 일방적인 모습에서 추측 가능한 관계성으로부터다.



03.

“양궁은 자세가 중요한 운동이야.”


수민이 의지하는 온라인 속 슈팅 게임은 단순히 10대의 관심사를 대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영화 밖 현실에서도 꽤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이 게임을 영화의 안팎을 모두 통틀어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야기 속 수민에게는 다른 의미가 된다. 현실 속에서 자신이 찾지 못한 목표와 꿈을 대신하는 대상이다. 엄마의 의지대로 나아가는 현실과 달리, 게임 속의 수민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전달하기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며 1등이라는 단기적인 목표를 향한다. 심지어 여기에서의 목표는 다른 무엇을 포기할 필요도 없고, 실패할 경우 재도전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처음 양궁 학원에 갔을 때 그녀가 큰 기대감을 가질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지나왔던 수많은 학원과 과목(종목)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로 인한 시작이 아니라는 것과 여기에도 역시 확고한 미래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궁은 일반적으로 많이 선택되는 종목이 아니라는 점 역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수민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이 생소한 운동에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과녁 안으로 하나도 들어가지 않던 화살이 하나 둘 들어가기 시작하고, 다른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처음으로 ‘하고 싶다’는 적극적인 마음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양궁 연습을 견학하기 위해 친구들과의 약속을 미루고, 스스로 다른 학교의 양궁부를 찾아 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 비교해 분명히 달라 보인다. 엄마는 사람이 잘하는 걸 하고 살아야 편하게 산다고 말하고, 자신 역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쉽게 포기가 되지 않는다. (메신저의 프로필 사진마저 양궁 과녁으로 바꿔놓은 수민의 모습은 귀엽기도 하지만 그가 얼마나 진심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만든다.) 양궁은 자세가 중요한 운동이라고 했다. 그동안 제대로 세우지 못했던 삶에 대한 태도와 자세가 지금 제대로 서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연히 찾아온 양궁이라는 종목과 함께.


04.

하지만 역시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이 존재한다. 고등학생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가장 크다. 이제 와서 운동을 시작하기에는 늦은 것도 사실이다. 자신이 타고난 신동이 아니라는 것 또한 수업을 처음 받던 날 확인했다. 그저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그동안 쌓아왔던 공부를 포기하고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금처럼 엄마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가면 미래에는 훨씬 더 편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양궁이라는 장치 하나가 그렇지 않아도 작은 바람에 나부끼던 수민의 삶을 강하게 쥐고 흔든다.


그런 수민을 바라보는 엄마 역시 마냥 딸의 선택을 지지해 줄 수는 없다. 자신도 이미 그런 비슷한 고민을 수십 번 더 겪어봤다. 기회비용이 훨씬 더 큰 선택, 자신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한 결정도 있었다. 수민은 자신이 의견을 말하면 엄마가 반대할 테니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는 소극적인 태도지만, 반대로 엄마는 그런 자신의 반대조차 뚫지 못하는 약하고 여린 의지만으로 꿈을 지지해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지금 양궁을 시작하겠다는 것은 어렵고 험한 길을 일부러 선택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동안 자신의 의지대로 그 많은 학원을 계속 보내왔던 것 또한 딸 수민으로부터 아무런 꿈이나 의지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런 두 사람의 입장을 동등하게 비춰낸다. 수민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과 말이고, 엄마의 입장에서 역시 가질 수 있는 마음과 행동이다.



05.

단 한 가지, 수민이 말하는 것처럼 엄마가 자신만큼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삶에도 가볍고 쉬운 선택만이 주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 모두는 나아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선택과 그로 인한 행동을 취해야만 하고, 그로 인한 결과와 책임 역시 스스로가 져야만 한다. 때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고 가혹한 결과를 받아 들게 되기도 하지만, 그 정도도 감수하지 못한다면 아직 성숙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 삶을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과녁 앞에서 활시위를 당긴 수민은 7점의 자리에 화살을 꽂는다. 처음 2점을 쐈을 때에 비하면 높은 점수다. 충분하지는 않다.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날들을 꼿꼿한 자세로 활시위를 당기며 보내야 할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 요원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활을 당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또 오래 지켜본다. 이 자리는 처음으로 선택한 수민 자신의 것이다. 



김수림 / 한국 / 2021 / 29 Mins

김푸름, 이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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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우리 이웃들이 수상해’ 중 한 작품입니다. 2023년 11월과 12월의 순차적 상영을 통해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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