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준 Mar 08. 2024

29번째 호흡

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큐레이션 상영 2 : 여기, 한국입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홍보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연출을 맡은 감독과 주요 배역을 맡은 주연이다. 이들은 영화의 전면에서 하나의 작품이 더 많은 관객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 편의 영화가 감독과 주연의 힘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스태프와 조연 배우들, 배역은 있지만 존재감을 드러내서는 안 될 엑스트라까지 많은 구성원들의 참여와 노력이 더해진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종종 잊어버리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반복해서 노출되는 대상에 익숙해지며 당연함을 느끼고, 그 사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들에는 관심을 잃는다.


피라미드.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 세계에도 피라미드 구조가 생겨난다. 누군가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니고, 최상단에 위치한 이들의 잘못도 아니다. 유일한 아쉬움은 그저, 가장 아래에 놓인 이들이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그 존재감마저 잃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다만 프레임 속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인지와는 무관하게 현실 위에서는 모두가 열정으로 가득 찬 배우이자 구성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국중이 감독은 이 문제를 조금 더 들여다보기 위해 좀비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포착한다.


전형적인 좀비 영화가 잠시 상영된 이후,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조명이 환하게 켜지며 떠들썩해진다. 영화 촬영 현장이다. 괴상한 분장과 피칠갑을 한 배우들이 직전까지 펼치던 실감 나는 연기를 멈추고 분장 수정과 피드백을 받는다. 팔을 조금 더 기괴하게 꺾고, 발은 더 과감하게 끌고. 잠깐의 시간 동안 다음 장면을 위한 연기 주문이 밀려든다. 화면 속의 좀비를 조금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제 조금 실감이 난다. 모니터 속의 영상, 실감 나던 좀비의 움직임과 그로 인한 공포가 배우의 연기와 스태프들의 움직임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영화 <29번째 호흡>의 첫 배경이 되는 좀비 영화 촬영 현장에는 아희(전아희 분)가 있다. 그녀는 작품에 필요한 수많은 좀비 엑스트라, 그중 하나다. 알아들을 수도 없이 소리를 삼킬 때 나는 먹먹한 쇳소리만 내며 관절이 역행하는 방식으로 몸을 비튼다. 좀비 역을 맡아 연기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아희의 연기 경력에는 ‘영화 부산행 천만배우’, ‘유명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출연 배우’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달려있다. 모두 좀비로 출연해 얻은 훈장이다. 역시 수백수천의 엑스트라 좀비들 중 하나. 그렇다 보니 내세울 것이라고는 좀비 연기뿐이고, 이제는 전혀 다른 배역의 오디션을 보러 가서도 좀비 연기를 요청받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나 맨날 좀비만 하니까 지금도 계속 좀비만 하잖아. 내 필모 이만큼 있는 거 다 좀비야. 이러다가 내 연기 인생 좀비로 끝날 것 같아.”


좀비 연기든 뭐든 어떤 연기를 해도 지금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 촬영 현장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어떻게든 현장에 있다 보면 평소에는 연락을 하기 힘든 친구들도 만나고, 돈도 벌고 경력도 쌓을 수 있어 긍정적인 부분도 분명히 있다. 심지어 이런 역할조차 얻지 못하고 배역을 구하러 다니는 연기자들이 지금도 있을 것이다. 아희도 처음에 그랬다. 좀비 역할 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경력이 쌓였다는 뜻은 그만큼 쉬지 않고 열심히 배역을 찾고 끊임없이 연기를 해왔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 들어와도 좀비 역할은 그만하고 싶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온몸에 피칠갑을 한 자신의 모습만 계속될까 걱정이 된다.


좀비를 연기하는 배우를 소재로 잡은 영화의 자극적인 외면과 달리 극 중 아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하나의 분야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성공한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이 그 시간 속에 묶이고 저당 잡히는 것을 경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처음에 자신이 원했고 사랑했던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씩이라도 더 나아지길 원하는 건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도 작품 어디에, 어떤 장면에 자신이 나오는지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마냥 즐거울 수 없다. 고민도 걱정도 없이 순수하게 연기를 사랑하고 행복해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 영상 속의 내 모습이 이제는 조금 서글프다.


모두가 아희의 마음과 같은 것은 아니다. 성수(한성수 분)와 지혁(송지혁 분)은 그런 그녀를 나무란다. 두 사람도 아희와 함께 좀비 연기를 계속해 온 친구들이다. 어차피 다른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좀비 연기라도 하면서 돈을 버는 게 나은 게 아닌가 하고 말한다. 괜히 다른 데 가서 연기와는 상관도 없는 양고기 굽고 배달 일이나 하며 시간 보내지 말고 어떻게든 연기와 가까운 곳에 머물라는 뜻이다.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지만 아르바이트와 좀비 사이의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은 아니다. 좀비도 연기라고 강조하는 두 사람 앞에서 아희는 고민이 더 늘어만 간다. 자신을 찾을 수 없는 배역, 다시 말해 자신의 연기가 어떤지조차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알 수 없는 배역. 정말로 그게 연기이긴 한 걸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희는 다시 한번 좀비 배역을 안고 촬영 현장으로 되돌아온다. 복잡한 마음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답답하다. 역시 피칠갑을 한 채로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다른 배우들을 지켜본다. 언젠가 몇 번이고 반복되어 온 듯한 기시감이 든다. 아희는 이대로 영영 좀비의 모습을 벗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이제는 정말 좀비가 아닌 사람이 되고 싶은 최후의 몸부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엔딩크레딧이 흥미롭다. ‘돌 맞는 좀비배우’, ‘핸드폰 보고 웃는 좀비배우’, ‘타이밍을 물어보는 좀비배우’, 배역이 없는 그냥 ‘호흡 촬영장 좀비배우’의 면면까지 극에 참여한 모두의 사진과 이름이 그곳에 있다. 국중이 감독이 이 영화를 어떤 마음으로 완성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모두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보고 기억해 주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라고 말하는 것 같다. 모두가 하나의 작품 속에 필요한 좀비 배우이기 이전에 소중한 땀과 시간을 쌓아가고 있는 찬란한 배우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된다.



한국 / 극영화 / 2022 / 26분 53초

감독 : 국중이

출연 : 전아희, 한성수, 송지혁

_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두 번째 큐레이션인 ‘여기, 한국입니다’의 한 작품입니다. 2024년 3월 1일부터 3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www.indieground.k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