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큐레이션 상영 2 : 여기, 한국입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극영화도 다큐멘터리도 어떤 이야기는 개인의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창작자의 것으로부터다.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경험, 지나간 사건의 잔상이 하나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공된 이야기가 배우라는 다른 대상을 통해 표현되는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장면과 대상이 살아 숨 쉰다는 것 정도랄까. 그리고 가끔은 창작자 본인이 프레임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현재라면 지금 의도하고 있는 대로, 과거에 존재한다면 그동안 쌓인 증거의 두께에 따라.
홍다예 감독이 연출한 <잠자리 구하기>는 스스로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 그동안 쌓아온 자료의 품 안에서 완성된 이야기다. 오로지 성적에만 얽매여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일상을 직접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청소년 다큐멘터리 제작 워크숍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작업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의 걸음을 자연스럽게 따라 걸으며 8년 간의 장기 프로젝트가 되었고, 여전히 내일을 알 수 없는 20대의 중반에서야 작은 마침표 하나를 찍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어느 날부터 시작된 이 작품은 개인의 서사를 지나며 응축되어 우리 사회의 입시 제도가 가진 어두운 단면, 그 그림자의 길이를 헤아린다. 2014년 수능,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숨통을 조여 오는, 정해진 날짜 앞에 선 일산 주엽고 고3 학생들의 모습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있다.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시절. 조금만 재미있어도, 약간의 재능만 보여도 그건 곧 미래의 꿈이 되었고, 정말로 이뤄낼 수 있을 것만 같던 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꿈은 허황되기도 했다. 그래도 좋았다. 당장은 원하는 대학을 들어가는 일도 쉽지 않다.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가 벌써 걱정된다. 아직 학생인 다예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윤지, 민정, 민지, 주희, 유아 모두가 그렇다. 아니, 어쩌면 수능을 앞둔 모두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대학을 들어간다고 해서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든 일단 대학을 들어가는 일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정해져 있다. 어떤 누구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스무 살의 시작은 그렇게 정해져 버렸다. 그래서 불안하다. 원하지 않는 미래가 정해졌다는 사실도, 그 미래의 기준을 충분히 달성하기 어려운 현실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을 수행하지 못한 뒤에 예상되는 모습에도 모두 숨이 막혀온다.
결국 모두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원하는 대학에 붙은 친구도 있고, 대학에 지원하지 않은 친구도 있고, 지원한 대학 모두에 떨어진 친구도 있다. 다예도 재수의 길을 걷는다.
다큐멘터리가 가져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적어도 이 작품을 연출한 홍다예 감독은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이야기일지라도 각색하거나 감추는 일 없이 말이다. 입시 스트레스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학생들의 모습을, 스스로의 모습을 끈질기게 담아낸다. 여기에는 다른 학생의 죽음과 수 차례에 걸친 자살 기도와 관련된 이야기도 포함된다. 방황과 혼란, 고통과 인내, 절망과 슬픔 등 고정된 시간 안에서 경험했을 모든 부정적 감정의 결과다.
더 큰 문제는 삶의 가장 높은 장애물이라 생각했던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사회에 발을 내디딘 후에도 이전의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물론, 새롭게 맺게 되는 인간관계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한 미래에 대한 걱정, 무고한 희생과 슬픔을 반복하는 사회적 충격은 여전히 삶을 뒤흔들고 제대로 된 걸음을 딛기 어렵게 한다. 무엇보다 평생 함께일 것이라 생각했던 친구들과의 관계도 서로 가야 할 길이 달라지면서 조금씩 소원해진다.
“나는 입시생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지워가는 우리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사라지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지키려고 했던 것들은 점점 내 곁에서 사라져 갔다. 나도 대학에 붙고 친구들도 대학에 붙었다. 우리의 기억은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았고 나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기록 속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을 곱씹으며 남은 의미를 찾으려 했다.”
작품의 파편은 수능까지의 이야기를 담기 위한 때때로의 촬영으로 남겨졌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학교와 성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제 그 파편을 끌어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나온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남기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자신이 지켜주지 못했던 친구와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망가뜨린 관계를 뒤로 하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면, 모두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독은 생각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두 친구의 인터뷰 영상이 놓인다. 어려운 시절을 딛고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내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의 걸음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게 된 것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수단은 존재하고 우리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삶의 어느 순간도 소중하고 중요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는 사실도 그렇다. 앞으로도 잘 이겨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얕은 희망은 작은 미소처럼 그 자리에서부터 번져 나온다. 다예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과 솔직한 태도만이 작품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제 아무리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그렇다. 다만 이 이야기가 단순히 개인의 범주에서 머물지 않고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은 홍다예 감독이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모두 꺼내 보여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래의 꿈을 남기는 자리 어디에나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쓰여있던 어린 시절의 그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다시 그 자리를 채우게 될 학생들의 등허리를 쓰다듬는다.
“그냥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썼던 편의 마지막 말에 다예는 이렇게 쓴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걸음으로써 서로를 구하게 될 것이다.
한국 / 극영화 / 2022 / 80분
감독 : 홍다예
출연 : 홍다예, 김윤지, 최민정, 강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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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 두 번째 큐레이션인 ‘여기, 한국입니다’의 한 작품입니다. 2024년 3월 1일부터 3월 15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