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렸던 스페셜 토크의 내용을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남다은 영화평론가의 진행으로 이루어진 이 대화에서 감독은 이 영화의 전반이 기존의 작업과 달랐다고 언급한다. 영화가 기획되던 단계의 성립 조건은 물론, 경력의 차이가 나는 배우들을 한데 섞어 촬영했던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작품의 타쿠미 역을 맡은 배우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 현장의 스탭이었고, 설명회 장면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도 촬영 지역의 현지 주민들로 구성되었다.) 대사를 활용하고 표현하는 지점의 방식만은 그동안 해온 것과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다시 말하면 그 지점을 제외한 많은 부분의 작업이 달랐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 빼곡한 대사로 채워지던 신(Scene)의 자리가 여러 차례 고요함으로 대신되는 것이 외면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극 내부에 존재하는 인물과 사건으로 주로 이어지던 주제 의식은 영화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일본 사회로 국한하고 싶지 않다. 감독이 지적하고 있는 지점은 보편적인 사회 문제와 분명히 연관된다.) 이야기의 일부로 끌고 들어와 인물 사이의 갈등 요소로 직접 활용하는 것이다. 감독의 이런 변화가 앞으로의 작품 속에서도 지속되며 흐름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역시 이전의 작업들과는 여러 지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도 조금은 다른 감정을 남기고 해석에 대한 방식적인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타쿠미(오미카 히토시 분)가 숲 속에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에도 별로 놀라지 않고, 울창한 숲 속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무와 식물의 종을 모두 헤아릴 수 있다. 그의 딸인 하나(니시카와 료 분) 역시 자연의 품에서 지내는 시간들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이 공간은 삶의 터전과도 같으며, 그건 이 지역 하라사와에서 살고 있는 6천여 명의 주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작고 평범한 마을에 도쿄의 연예기획사 직원들이 찾아오면서 문제는 시작된다. 5월에 조성할 글램핑장을 위한 주민 설명회를 열겠다는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오롯이 정부의 보조금을 얻기 위한 것에만 있다. 급하게 추진된 사업에는 지역 사회의 사정 따위는 조금도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최소한의 투자로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노골적인 욕망만 엿보인다. 이에 대한 타쿠미를 비롯한 지역 주민들은 반발은 거세기만 하다.
이 작품의 중심에 놓여 있는 갈등은 주민 설명회를 위해 마을을 찾은 외지인 타카하시(고사카 류지 분)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 분), 그리고 원주민인 타쿠미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속한 그룹을 대변하는 인물에 속한다. 개발을 원하는 외지인은 도시의 관행적 잣대를 기준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하고 보존을 바라는 원주민은 현재 삶의 방식을 근거로 이를 막고자 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개발과 보존, 문명과 자연의 대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균형입니다.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요. 상류에 사는 사람들에겐 책임감 있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글램핑장 설명회에서 이어지는 두 집단의 모습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깨끗하고 맛있는 물이 마을의 자부심인 사람들에게 캠핑장에 설치될 정화조의 용량과 위치는 중요한 문제다. 글램핑장의 건설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사업을 주도하는 측은 그런 사정보다는 효율이 더 중요하다. 64명이 정원이지만 50인 수용 용량을 가진 정화조를 계획했고, 이마저도 지역 관청의 권고사항을 따르고 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방어적인 태도다. 성능을 초과하는 상황이 발생하라도 90% 이상은 정화가 될 것이고, 이 수치는 도쿄의 수질에 비해서도 청정한 것이라는 의견도 덧붙인다.
설명회에서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 역시 호의적이지 않다. 일단 설명회를 위해 마을을 찾은 인물이 결정권이 없는 일반 직원이라는 사실에서부터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주민들의 불만을 마주하는 태도 역시 기계적이며 뻔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애초에 이 설명회 자체가 주민의 불안을 누그러뜨리고 관청의 관련 부서에 주민과 적극 소통했다는 증거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개발을 원하는 문명은 귀를 닫고 밀고 들어오기만 하고, 이에 맞서 보존을 원하는 자연은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자리에 놓여 있는 인물은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다. 두 사람은 도시로부터 왔지만 정확하게는 문명과 자연, 두 진영의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다. 실제로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두 사람이 얻게 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다고 토착민의 입장에서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사장과의 미팅에서 주민들의 요구와 우려는 당연해 보인다고 목소리를 내지만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다. 지역민과 연계해 사업을 성공시키고 싶다는 마음 아래에 그 담당자로 원주민인 타쿠미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현실에서도 이미 많이 들어본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거대 문화가 토착 문화를 병합할 때 그런 방식을 쓰곤 했다.
이들에게 주민들만큼의 치열한 고민과 걱정이 없다는 것은 다쿠미를 설득하러 가는 차 안에서의 대화에서 확정된다. 글램핑장의 일과 회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곧 서로의 연애사를 포함한 가볍고 일상적인 대화로 변질되고 만다. 물론 사장 앞에서는 사업의 백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거기까지다. 어느 쪽도 자신의 피부에 와닿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건 타인의 것이 된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는 일이나 글램핑장 정화조의 부족한 용량이 수원을 더럽히는 일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무게가 되는 것이다.
다쿠미와 함께 차를 타고 하나를 데리러 가는 장면에서도 다시 한번 강조된다. 야생 사슴이 겁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그의 말에 마유즈미는 도시 사람들이 오히려 좋아할 것이라며 반색한다. 문명과 인간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토착민과 자연이 가지는 반감에 대해 이해는 하지만 공감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이 이 장면을 통해 정확히 표현된다. 그리고 그런 외지인은 하나가 사라진 숲 속에서 가시나무에 깊게 손을 베이고 만다. 자연 속에서 문명의 마음과 태도로 머문 대가다. 복선이다.
양쪽의 사정이 이처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에 영화가 처음부터 관철해 왔던 타자화된 시선은 이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와도 같았다. 편중된 시선으로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의 문제 모두를 균형감 있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관객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영화를 감각하는 지점에서나 해석하는 지점에서 어떤 진영과 인물을 프레임의 중심에 놓느냐에 따라 작품의 모습 또한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면적 경험이 가능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영화의 후반부에 놓이는 선택으로 인해 이 매력이 반감하고 만다는 것이다. 신화적 존재를 모티브로 한 도시와 문명에 대한 반격, 혹은 일종의 가르침으로 여겨지는 이 장면은 그동안 영화가 이어온 균형감을 일순 무너뜨리는 듯한 아쉬움을 남긴다. 결말의 선택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플롯의 흐름만 고려하자면 이는 조금도 틀리지 않은 선택임이 분명하다. 감독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처음 각본을 쓸 때부터 이러한 엔딩이었고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굳이 그 결말을 직접 지었어야 했는가 하는 물음이 그림자처럼 짙게 남는다. 어쩌면 그 선택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겠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번 작업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함께했던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의 라이브 영상 제작 요청으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영화라는 매체로 극장 개봉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등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영화화는 영상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배우들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 배우들의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첫 시작도 이시바 감독의 음악에 잘 어울리는 장소를 찾는 것이 먼저였고 관련된 리서치를 거듭하며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처럼 어떤 이야기는 계획하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모습을 갖추기도 한다. 이 작품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지난 작품들과 조금은 결이 다른 듯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평소 감독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해 왔던 문장이 하나 떠오른다. ‘스스로의 모든 작업이 우연을 포착하는 일’이었다는 것. 그렇게 보자면 이 영화의 시작은 물론 모든 지점의 변화와 차이가 그리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우연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작품을 거듭하는 동안 변해오기는 했으나,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위해 언제나 치열한 시간을 보내왔다.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반복과 숙달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우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포착한다는 말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수고로움이 두텁게 놓여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작품의 결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 결말이 주어지기 전까지 영화의 갈등은 원주민과 외지인 사이의 것이었고 자연은 보다 높은 계층의 존재처럼 받아들여졌다. 타쿠미를 비롯한 마을의 주민들 역시 도시의 사람들에 비해 자연에 더 가까운 것일 뿐,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거대한 자연의 시점에서 볼 때는 크게 다르지 않은 대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깃털을 구하기 위해 벌판을 헤매던, 결국 실종되고 마는 하나의 모습이 불안하고 위태롭게 그려졌던 맥락이 여기에 있다고도 생각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의 장면으로 갑자기 세계가 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리되어 온 듯한 수많은 물음도 다시 뒤엉키는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타쿠미는 딸 하나를 안고 안개 너머로 모습을 감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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