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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준 Apr 15. 2024

변화와 확장, 당신의 다음은 무엇입니까?

EP6. 영화 <우리의 하루>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0.

이제 다음 주면 홍상수 감독의 새 작품이 정식으로 공개된다. (나는 내일 기자 시사를 통해 관람할 예정이다.) 매 작품 형식적 변주를 일으키고 있는 감독이기에 이번 작품 <여행자의 필요>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갈지 궁금해진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최근 두 작품인 <물안에서>와 이 작품 <우리의 하루>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새 작품에서도 이전에 없던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낸다면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감독의 현재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감독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탐욕스럽지 아니한가. 어떤 의미로든.


아래의 글은 지난 2023년 10월에 개봉한 영화 <우리의 하루>에 대한 내용이다.


01.

누구나 변한다. 의도를 갖고 변화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고, 흘러가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변해있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통해 이전과 비교하여 무엇이 바뀌었는가 하는 것과 변화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은 심지가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다.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작품을 일으키는 시점에서의 변화들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정확한 기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트로덕션>(2021)이 시작이었던 것도 같다. 그 이전까지의 영화들이 이야기에 무게가 놓여 있었다면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형식에 조금 더 힘을 기울이는 듯한 느낌. 접근법이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특히 2022년 이후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작품들에서는 그 경향이 더욱 짙어진다. <소설가의 영화>(2022)에서는 극의 마지막에 놓인 영상 하나가 기존의 형식을 탈피하고자 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탑>(2022)에서는 영화 외부에 놓인 수직적 구조의 물리적 형태를 이야기의 뼈대로 활용하며 이전에 없던 레이어를 하나 더 쌓았다. 영화 <물안에서>(2023) 역시 마찬가지.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이미지를 활용하는 시각적 선택은 이 영화를 극과 회화의 경계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이는 극 중 인물인 승모(신석호 분)의 작업 방식과도 연결되며 애초에 존재했던 감독 특유의 내러티브와 호흡을 맞춘다. 다시 말해, 언젠가부터 홍상수 감독은 자신이 원래 잘해왔던 이야기만으로 극을 완성하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조와 형태를 활용한 극의 외부와 내부의 연결성에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변화다.


영화 <우리의 하루>에는 세 개의 에피소드가 번갈아 등장하는 두 세트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한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던 배우 상원(김민희 분)에 대한 이야기와 젊은 세대에게 반향을 일으키며 유명해진 70대 시인 의주(기주봉 분)의 이야기다. 영화의 제목을 미루어볼 때 동일한 시간 다른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영화 속에서는 어떤 장면을 통해서도 이를 확정할 수 있는 근거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인물과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도 찾아볼 수 없는데, 홍상수 감독은 또 한 번의 구조적 실험을 통해 이를 이어내고자 한다. 두 세트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는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의 호흡을 이끌어내는 식의 형태다. 영화는 이를 위해 몇 가지 힌트를 장치로 활용한다.



02.

한국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상원은 가까운 선배인 정수(송선미 분)의 집에 잠시 살고 있다. 고양이 ‘우리’와 함께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려 하지만 아직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주는 간식을 받아먹는 정수의 고양이가 마냥 사랑스러울 뿐이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외사촌 지수(박미소 분)가 찾아와 연기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전까지 그녀의 시간은 온통 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의주는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겠다는 대학생 남희(김승윤 분)와 함께다. 이 영상은 그녀의 졸업 작품이기도 하지만 최근 그의 시를 사랑해 주는 많은 젊은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한다. 마침 그의 팬을 자처하는 배우지망생 상국(하성국 분)도 그를 찾아온다. 그 역시 예술과 인생에 대한 모호하고 난해한 질문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짧은 설명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유사한 뼈대를 갖고 있다.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방문, 이후 나누게 되는 대화의 주제가 그렇다. 정수가 잠을 자는 장면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의주가 잠을 자는 장면이 등장한다던가, 고양이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던가, (의주는 얼마 전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는 특이한 습관을 갖고 있다던가 하는 장치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다. 곳곳에 놓인 감독의 힌트는 두 세트의 이야기가 마치 데칼코마니의 양면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03.

삶과 연기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는 이것이 합리적인 추측이라는 데 더욱 힘을 싣는다. 이 부분은 의주의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는 심장이 좋지 않아 술과 담배를 금지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를 처음 만나러 오는 상국이 양주와 담배를 선물로 사 올 정도로 애연가 겸 애주가였던 의주다. 남희가 사 온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진짜 맥주와 똑같다며 너무 좋다고 말했던 이유다. 하지만 이후 상국과의 대화에서 그는 진실함과 솔직함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그에게 있어 무알콜 맥주는 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대리하는 비겁한 거짓에 가깝다.


지수로부터 연기에 대한 조언을 받은 상원 역시 동일한 맥락에 대해 강조한다. 진짜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외면에 씌인 거짓된 것들을 모두 벗겨내야 한다고 말이다. 가식과 허식과 같은 것들이다. 의주의 경우처럼 실제적인 상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두 사람 모두가 많은 지점을, 행동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까지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상국과 남희가 떠나고 홀로 옥상에 올라 의사의 금지 사항에 해당되었던 술과 담배를 꺼내놓는 의주의 모습은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자 하는 선언과도 같다.


이처럼 두 이야기를 하나의 교차점 위에 교묘하게 얹어놓은 감독의 시도에서 가장 빛이 나는 부분은 이를 통해 어떤 특정한 결과를 도출하고자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두 사람의 관계나 두 이야기의 하루에 대한 추측과 같은 확정적인 지점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역시 스크린 너머의 공간에 묻어놓는다.



04.

물론 이 작품에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작품의 이야기 속에 자신을 투영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다. 배우와의 사이에서 형성된 개인사가 세상에 공개되고 난 이후 그의 작품은 더 이상 스크린 너머의 것만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기억이 맞다면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이후다. 몇몇 작품들은 그의 뮤즈가 여전히 극 속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작품들은 현실의 문제를 극 중에 삽입하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장치들이 두드러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관객이 추측 가능한 지점의 모호한 지점에 대해 직접 매듭을 짓지 않는 스타일이 한몫을 더하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상원의 대사가 그 시작점이다.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는 특이한 습성을 의주가 보여준 다음 장면에서 상원 역시 동일한 행동을 취한다. 이 행위가 그리 보편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두 사람이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가끔 이렇게 먹게 되더라. 나 아는 사람이 맨날 이렇게 먹었어. 있어, 그런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은 대사 속 ‘아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의주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지점이 된다.


이 외에도 굳이 기주의 성을 홍 씨로 설정했다던가, 이혼하면서 엄마 쪽으로 갔다는 딸을 언급한다던가 하는 모든 부분이 감독의 사생활과 부합한다는 점은 극 중 두 사람이 현실의 어떤 인물로 모델링 되었는지 상상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만약 이 설정이 감독의 의도와 맞닿아 있다면 영화의 타이틀인 ‘우리의 하루’가 의미하는 우리라는 단어는 꽤 많은 대상을 지칭하는 중의적 표현으로 남게 될 것이다.


05.

작품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고 있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극의 단순한 이미지와 달리 장면과 장면의 연결이 의미하고 상징하는 이야기의 레이어는 점차 더 두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의 레이어만 따로 떼어다 이야기하기 힘든 점 역시 하나의 이유가 된다. 진실과 허상, 실상과 가상, 극과 현실이 모두 혼재하는 극 속에서 관객은 어디에 무게를 둬야 하는 것일까.


처음에 변화라는 단어로 그를 설명하고자 했지만, 어쩌면 그는 지금도 자신의 외연을 확장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나리오와 촬영, 연출과 편집과 같은 역할의 경계는 물론, 이야기를 쌓는 방식과 이를 위한 구조적 형태까지도 모두 변화시켜 가며 말이다. 어떤 제약에도 굴하지 않는 가장 순수한 표현에 다가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의 작품을 통해 장면과 장면, 이야기 세트와 세트가 아닌, 작품과 작품이 이어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완전히 서로 다른 작품 안에서, 역시 모호하고 확정적이지 못한 장면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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