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준 Apr 22. 2024

언어의 간극으로부터 추출해 내는 믿음

EP7. 영화 <여행자의 필요>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외국인 배우가 극의 중심에 놓인 적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함께한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다. 이번에는 더 선명하다. 이야기나 인물이 아닌 거리의 문제다. <다른나라에서>에서 보이던 안느의 잔잔한 심상이나 <클레어의 카메라> 속 클레어의 이국적이고 몽환적이던 이미지와는 분명히 다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극 중 인물들의 거리는 보다 명확하고 단호하다. 모국어가 달라서 생기는 거리가 아닌, 우리가 나고 자란 세계가 달라서 생기는 차이. 영화 <여행자의 필요>는 그런 언어의 간극으로부터 시작된다.


“항상 자신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 피곤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는 한 여자(김승윤 분)가 이리스(이자벨 위페르 분)로부터 불어를 배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방식은 아니다. 교과서나 참고서도 없이 텍스트 카드 몇 장으로 이루어지는 이 수업은 다소 생소한 구석이 있다. 어떤 상황이나 감정에 대한 문장을 프랑스 여자가 쓰고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해 주면 배우는 쪽이 이를 반복해 연습하는 식인 것 같다. 여자의 피아노 연주가 끝났을 때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릴 때도 그녀는 카드를 꺼내 불어로 써주고 테이프를 내밀었다.


두 사람은 영어라는 서로에게 온전히 종속되어 있지 않은 언어를 통해 어렵지 않게 의사소통을 나누지만, 정작 한국어나 불어로는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다. 이리스는 여자의 한국어를, 여자는 이리스의 불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이는 상대의 언어를 자신의 이해로 교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배경이나 생각의 기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이 행복하고 멜로디도 아름다워 좋았다고 말하면서도 실력이 부족해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다고 말하는 여자를 그 과정에서 느낀 내면 깊은 곳의 감정을 묻는 이리스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02.

여자의 소개로 만나게 된 또 다른 여자(이혜영 분)와의 만남에서도 역시 같은 일이 반복된다. 어설프게 기타를 연주하는 그녀에게, 이리스는 이번에도 연주를 하는 동안에 무엇을 느꼈냐고 묻는다. 이번에도 여자는 이전의 여자와 거의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행복하고 좋았지만 실력이 부족해서 짜증을 느꼈다고 말이다. 이리스는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카드를 꺼내 그 대답을 불어로 옮겨 적는다.


“너무 짜증이 난다. 내 자신에. 너무 지겹다. 내 자신이. 언제나 바란다. 되고 싶어 한다. 이 자는 누구인가. 내 안에 있는 나를 너무나 피곤하게 만드는 이 자는.”


이 장면으로 인해 두 한국 여자와 이리스 사이에는 더 큰 언어 사이의 틈이 벌어지게 된다.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반복적인 체계와 태도로 인해서다. 다른 언어를 가진 프랑스 여자에게는 ‘그 자’가 누구인지 묻게 만드는,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다. 이는 직전의 장면에서 와인을 제안하는 여자에게 막걸리를 달라던 이리스의 말속에도 감춰져 있다. 살균처리 문제로 인해 해외에서 생막걸리를 마시기 위해서는 현지에 공장을 짓는 수밖에 없다던 부분이다. 그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과 옮겨온 것의 차이, 나면서부터 알게 되는 언어와 자라서 배운 언어의 차이, 처음부터 태어나 자란 사람과 여행자로 흘러들어온 자의 차이다.


두 사람과 한 남자(권해효 분)가 자리를 옮겨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쓰인 비석에 이르는 장면에서도 그 간극은 더욱 커진다. 시의 내용보다 시인의 얼굴이 잘 생겼다는 사실에 더 관심이 많은 이리스의 모습은 단순히 언어가 말의 도구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가 일본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번역기를 통해 다른 언어의 말뜻을 알 수 있는 것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시와 외면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것과 그 배경적 서사를 이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여행자의 필요>가 말하는 간극에는 이 모든 것들이 놓여있다.



03.

이렇게 영화의 초중반부에서 두 여자와의 교습 장면을 통해 넓혀놓은 언어 사이의 거리는 후반부에 이르러 ‘믿음’이라는 단어를 도출해 내는 쪽으로 나아간다. 애초에 극 중 누구와도 자신의 모국어를 나눌 수 없는 이방인 이리스의 처지는 처음부터 믿음의 문제에 놓여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자신의 언어를 가르치는 위치에 놓여 있었기에 잊혀졌던 문제다. 그것을 조금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전환이 시작되는 것은 집으로 돌아간 이리스가 동거인 인국(하성국 분)을 만나면서부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연인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한 것들이 남아있고, 연락도 없이 방문한 인국의 어머니(조윤희 분)는 이 틈을 파고들며 믿음의 무형성,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 사람이 진짜를 말하는 건지 가짜를 말하는 건지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거야.”


사실 영화는 이 지점에 대한 기초적 토대를 이미 마련해 둔 바 있다. 처음 만났던 여자의 소개로 찾아간 또 다른 여자와의 만남에서다. 교과서 없이 텍스트 카드로만 1-2달은 수업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리스에게 여자는 정확히 이 카드로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아직 알 수 없는 프랑스 여자와 전통적인 교수법이 아닌 수업 방식에 대한 의문이다. 심지어 자신은 기니피그, 실험 대상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이리스 역시 그 의문에 동의하면서도 외국어를 통해서 정확한 감정을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결코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간극과 믿음 사이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아직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믿음을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 좁혀가는 경로가 여기에서 그려진다.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 공부를 3년이나 했는데도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여자의 딸(박미소 분)은 이리스의 새로운 교수법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믿음을 더해주는 장치로 활용된다. 교과서로 실패한 사례가 눈앞에 있으니 교과서 없이 하는 수업은 기대 볼 만하지 않나.


04.

다시 이리스와 인국, 인국의 어머니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여기에 놓인 몇 개의 신 위에는 다시 여러 믿음이 놓인다. 자신의 교수법이 한국에서 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이리스의 믿음과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지만 자신과 잘 통한다고 느끼게 된 인국의 믿음과 남자의 시가 언제나 좋다고 여기는 여자의 믿음이다. 이들 모두는 내내 계속해 이야기해 왔던 간극의 문제를 한순간에 지워낸다. 단 하나, 인국의 어머니가 꺼내는 이리스에 대한 불신만이 다른 모든 증거들 사이에 뾰족하게 서 있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이리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무엇도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국의 말을 통해 그녀가 근린공원의 벤치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는, 프랑스 사람이었다는 정도의 단서만 제시할 뿐이다. 그것조차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인국이 그렇게 믿고 있는 사실에 불과하다. 이 문제는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에게도 중요하다. 이리스가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이따금씩 불어를 유창하게 하는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국이 프랑스 여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어서다.


여전히 많은 것들의 진실은 알 수 없다. 이리스의 새로운 교수법이 효과적인 교육 방법인지를 정량적으로 보일 수 없고, 그녀가 정말 프랑스 사람인지 사실적으로 알 수 없고, 인국이 시에 재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없다. 영화는 이 모든 불확실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간극을 보여주고자 하고, 이 사이에 믿음을 새겨넣음으로써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전히 이리스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 관객들에게도 이는 유효하다.



05.

자신이 인지하고 있든 아니든, 사회와 우리의 삶은 수많은 믿음으로 세워져 있다. 심지어 어떤 믿음은 특정할 수 없는 타인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에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런 것들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언어는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요소에 불과하다. 상대적인 거리감을 더 멀게 느끼고, 조금 더 적극적이고 맹목적인 태도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매개다. 믿음은 우리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이형적인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이리스와 헤어진 후에 여자(이혜영 분)와 남자(권해효 분)는 그녀가 왜 한국에 왔을지 궁금해한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니까. 그것은 하나의 삶을 여행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넘버링 무비'의 다른 글은 작가의 매거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전 06화 변화와 확장, 당신의 다음은 무엇입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