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h the Life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내는 법

by JP 정표

Etch the Life: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내는 법

한국에서의 시간은 늘 직선이었다.

다음 목표, 다음 마감, 다음 프로젝트.
멈추면 뒤처지는 줄 알았고,

속도는 곧 생존의 언어였다.


그러다 어느 날,
달력 속 일정에 ‘다시’라는 단어가 줄지어 있는 걸 보고 멈칫했다.
다시 야근, 다시 주말 출근, 다시 미룬 저녁 약속.
일은 쌓이는데, 시간은 내 삶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즈음,
2년간 벨기에 IMEC로 떠날 기회가 주어졌다.

‘파견’이라는 이름이었지만,
내게는 잠시 경로를 이탈해도 된다는 허가처럼 느껴졌다.


비행기 안에서 한 다짐은 단순했다.

“이번엔 가족과 저녁을 함께 먹자.”


하지만 그 결심은 금방 시험대에 올랐다.
벨기에 공항에서 가장 중요한 가방이 사라졌고,
우리는 첫날부터 유니클로에서 옷을 사며 새로운 땅에 적응을 시작했다.
완벽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또한 여정의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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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첫 몇 주는 어색했다.
오후 5시가 되면 사무실이 비어버리는 풍경이
처음엔 조금 게으르게 보였다.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공원을 걷는 일은
낯설고, 어쩐지 비워진 기분을 주었다.


“이렇게 시간을 써도 되는 걸까.”
손에 무언가를 꽉 쥐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한국식 감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테르뷔렌 공원을 거닐며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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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들고 있는 건,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들이구나.


식각(Etch)은

불필요한 층을 깎아내며
남겨야 할 면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삶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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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와 습관으로 가득했던 하루에서
조금씩 덜어내고 비우자
비로소 중요한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벨기에에서의 저녁들은
다시 배우는 시간표였다.
빠름보다 깊이를,
점유보다 관계를,
성과보다 지속을 생각하는 법을 배운 시간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한국에서 새로운 박막을 쌓아 올리는 중이다.
솔직히 말해,
그 다짐이 무색하게 또다시 야근을 하기도 한다.
익숙한 속도에 휩쓸릴 때가 있다.


하지만 이번엔 알고 있다.
그 속도감이야말로
내가 먼저 깎아내야 할 층(Layer)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 어떤 층을 남겨야 하는지도.


삶에서 완벽한 균형을 찾는 일은
마치 반도체 공정에서
수율 100%를 꿈꾸는 일과 닮았다.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래도 우리는 매일 조금씩 다가간다.


오늘도 나는 식각실이 아닌 삶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가며
내 삶의 공정을 이어간다.


Etch the Life.
빛과 공정으로,
나의 시간을 새기는 중이다.


-JP 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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